초대일시 / 2011_120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통의동 33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해석된 자연, 재해석된 욕망 ● 지구는 대기의 압력 차이를 극복하고자 수시로 바람을 일으켜 대기를 순화시키고 그 순환은 대기를 정화하고 기후를 조절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람이다. 차이의 극복을 위해 그 경계를 횡단하는 바람은 움직임이며 소통의 상징이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부드럽게 양극을 횡단하는 바람은 지구의 호흡이다. 소통하고 혼합할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다. 그에 비추어 인간은 욕망이라는 바람을 통해 타자를 바라보고, 섞이고 또한 차이를 넘는다. 이금희의 회화는 그러한 자연과 인간의 욕망을 해석하고 그 둘의 교차점에서 비롯된 다양한 생성과 소멸의 키워드를 그리고 있다. 쉽게 말해, 자연과 인간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생하는 존재라는 것이고, 작가는 그 상생의 이유를 다양하게 표현해 왔다는 것이다. 처음. 언제나 은밀하면서도 묘한 설렘을 불러 일으키고 가장 강력하게 우리의 기억을 컨트롤할 수 있는 말이다. 이금희의 작품 전면에 흐르는 감정 역시 그 느낌과 비슷하다. 처음 느껴본 이성의 살결처럼 내밀한 호기심을 떨칠 수 없으며 온몸의 감각이 이성의 살결이 닿은 부분에 집중되는, 극도의 긴장감에서 오는 그 터치는 이성을 욕망하는 가장 강력한 기억이 된다. 이성의 살결 같은 이금희의 화면처럼.
떨림, 욕망하는 자연 ● 이금희는 자연 관찰에 필요한 카메라와 같은 다양한 장치들을 꽃에서 찾는다. 꽃은 자연의 욕망 그 자체다. 단순히 번식과 생존을 위한 욕망일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욕망으로서 꽃은 환경에 따라 매우 민감하면서도 다변적인 자연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것은 유혹과 자기절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에게 존재함을 알린다. 우리가 매트릭스라고 하는 시쳇말로 현실 자체를 부정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 역시도 매트릭스 너머에 또 무엇이 존재한다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내가 있다는 감각만큼 확실한 진리는 없다. 따라서 내가 있다라고 하는 명제에 해당하는 모든 개체들의 존재는 진리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자연의 욕망이 현실에 실재하든 아니면 작가의 작품 속에 놓이든 간에 그 역시 진리의 연장이다. 우리의 감각과 감정의 집중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다소 불편하지만 매력적인 끌림이며 존재에 대한 다양한 감각적 인식이다. 우리의 시각은 빛으로 사물을 지각한다. 빛은 일정한 파장 즉 떨림을 지니고 있으며 그 떨림이 각각의 사물이 지니고 있는 파장과 관계하면서 우선 평면적으로 형태와 색이 구별된다. 그 후 촉각이나 후각 등 다른 감각들을 통해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지각된다. 그렇게 지각된 다양한 정보들은 경험과 기억의 필터링으로 개념화 되면서 최종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떨림은 에너지의 존재 방식이면서 차이를 발견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관계 설정이기도 하다. 요컨대 작가가 자연 해석의 시작과 끝을 꽃 이미지로 표현했다면 그 꽃을 바라보는 최초의 감상이 바로 떨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역시 자연을 바라보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수 많은 의미들을 파악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자연과 작가 자신의 부딪힘 즉 떨림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최초의 부딪힘이야말로 모든 생성의 근원이자 시작과 끝을 잇는 접점이기도 하다.
이동, 은밀한 신체 ● 작가는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의 개념에서부터 다양한 표현의 양식과 철학적 근거들을 찾은 듯 하다. 간단하게 설명해, 신체는 전체와 부분 같이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유기체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는 다양한 상황에 따라 변용되는 특징이 있으며 이 변용의 특징은 유기체적 관점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즉, 유기체로부터 자유로운 기관 없는 신체야 말로 생명의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기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기관 없이 신체는 욕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관을 통한 감각 없이는 욕망은 자폐증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그러나 신체는 단순히 부분과 전체라는 필연의 기계장치로 치부하기에는 그 변용의 능력이 대단하다. 그러한 변용능력이 최대로 발휘 될 때 비로서 생명은 재생하고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며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것도 생성과 소멸의 키워드로서 생식기를 상상할 수 있는 은밀한 신체가 그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로부터 자유로운 욕망은 그 자체 긍정이며 운동이다. 운동은 발전의 근원이며 발전은 순환의 한 카테고리를 형성한다. 또한 그 순환의 범주는 그 범주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역사를 축적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즉 발전의 지향점에 따라 이념이 발생하고 그 이념은 사회를 재구성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재구성 속에는 엄청난 폭력도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복과 사랑으로 결합되려 욕망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 발전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긍정의 욕망이며 발전의 욕망이다. 떨림으로 시작된 최초의 부딪힘은 타자와의 위치이동의 단계로 진화한다. 이는 서로가 지니고 있는 욕망의 교환이며 낯섦의 극복 과정이기도 하다. 자연의 욕망으로서 꽃을 우리의 은밀한 신체로 치환하여 표현한 작가는 그 치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유기체로부터 자유로운 신체, 궁극으로 그 신체로부터도 자유로운 긍정의 욕망으로 이동하기를 권유한다. 신체와 신체의 결합을 향한 욕망. 그 절정의 깨달음. 직관적 상승으로의 업그레이드가 불가피하다.
상승, 절정의 깨달음 ● 장자의 대붕은 바다에서부터 구 만리나 높은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메추리의 비웃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랜 기간 폭풍우와 태풍을 견디며 큰 바람을 기다렸다. 마침내 힘찬 날개 짓과 함께 그 큰 바람을 타고 구 만리의 상공으로 오른다. 메추리는 불과 구치의 높이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먹이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용이하며 즉각적인지 따라서 그것이 얼마나 편안한 삶을 가져다 주는지를 역설한다. 그러나 대붕은 구 만리의 높이에서 그 이상의 거리를 횡단하며 내려다 보이는 모든 것들과 소통한다. 미세한 바람의 흐름을 쫓아 궁극적 삶의 귀결인 죽음에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도록 모든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금희의 소멸이 이와 같은 이치라면 그에 의해 해석된 자연은 우리가 찾아 헤매는 그 어떤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금희는 신체를 꽃으로 치환하여 표현함으로써 타자와의 결합관계에 대한 욕망을 의식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합관계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패턴을 다시 한번 들뢰즈로부터 빌려와야 할 듯 하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이어지는 혈통관계의 패턴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이면서 각기 다른 개체가 되는 '리좀(Rhizome)'과 같은 결연관계의 패턴이 그것이다. 리좀은 일종의 뿌리줄기로서 다른 개체이면서 하나인,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에 대한 구별이 전혀 없는 결합 혹은 번식형태를 지닌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욕망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거기에는 '나는 ~이다'라는 절대 동사의 개입이 있을 수 없다. 단지 '~그리고 ~그리고'로 이어지는 접속사의 유연함과 열림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속사의 조직은 충분히 동사의 결정적인 특성을 뒤 흔들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러한 결합을 인식하는 행위가 직관이다. 뿌리줄기로 이어지는 모든 개체들은 그 어떤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근원에 이어져 있다. 그 어떤 인식적 단계가 필요 없다. 무수히 많은 개체들은 곧 그것 자체이며 그 근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들이다. 이는 직관적 대상 파악에 대한 가능성이 발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금희의 신체가 그리고 욕망의 결연적 결합을 통한 절정의 깨달음이 바로 직관적 인식행위다. 즉, 인간은 유기적 자연과 우주의 일부분이며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직관이다. 떨림과 이동 그리고 상승으로 이어지는 직관의 단계적 깨달음은 사실 그 자체가 하나로 묶여 있어 동시에 진행되는 뿌리줄기와 같은 사고의 유형이다. 이금희의 작품 전체를 관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욕망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꽃으로 표현하고 이를 다시 신체로 치환하여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 결합을 상상할 수 있도록 구성된 것이 이금희의 조형언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해 질문하기를 종용한다. 과연 우리가 우주의 일부이며 그 자체라는 것을 직관할 수 있을까. ■ 임대식
Vol.20111208f | 이금희展 / LEEKUMHEE / 李金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