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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207_수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필(筆)과 놀고 필을 놀리는 표면 - 회화의 직설과 역설 ● 지난 10년간 정경화의 제작은 갈필의 파선들과 점들로 평면 전체를 골고루 덮는 풍경으로 일관된다. 농담과 점진적 변화가 거의 없는 단순한 얼룩들과 언뜻 드러나는 바탕의 여백들 사이의 대비는 그의 회화를 여타의 수묵화와 구별되게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들에서 받는 강렬한 인상의 대부분은 여기서 비롯된다. 먹이 적용되는 힘의 다양한 방향감이 수묵의 전통으로 보이게 하는 반면 그러한 대비의 명시도는 그의 회화를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한다. 정경화는 지금까지의 시도들을 두어 해 전부터 "농필(弄筆)"이란 말로 일괄한다. 특히 미술가가 자신의 제작 공정과 표면의 질을 설명할 때 이 생경한 용어를 자주 언급한다. 얼핏 "농필"은 수묵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그것과 다른 새로움을 성취한 것을 설명하거나 10전년의 시도가 완성되어가는 최근의 성과들을 요약하는 개념처럼 들린다. 나는 미술가가 고안한 이 용어가 실재하는 그의 작품에 어떻게 부합되는지 살피고 싶다. 이 관찰을 통해 그의 회화가 지닌 특징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직설: 필의 전개 ● 정경화는 2001년에 전통적 교훈이 요구하는 수묵의 재료적 활용과 대상의 사실적 표현에 관한 훈련을 종합하고 전문 미술가로서 막 세상에 나갈 준비를 했다. 이 때 그는 모필(毛筆)의 부드러움을 포기하고 나뭇가지나 칡과 같은 딱딱한 도구로 그것을 대신하는 선택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의 화면은 그것을 촉촉하게 적시는 칠(painting)의 부드러움이 없어지고 대신 날카롭게 망막을 자극하는 손짓의 기록들이 남게 되었다. 그의 선택은 표면을 물감으로 덮는 회화의 그 본질적 정의를 포기하고 곧 긋는 행위의 기록인 소묘로 전락하는 것으로 비치기까지 했다. 나뭇가지를 붓(筆)으로 쓸 때 듬성듬성 드러나는 바탕의 노출과 몸짓에 저항하는 표면의 긁히는 소리가 화가에게 제작의 즐거움과 제작 생활의 확신을 안겨주었다. 여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유를, 표면에 돌진하는 손짓에 반응하는 화면의 생생한 반응은 살아 있음을 확인시킨다. 여타의 가공 없이 즉각 보답하는 화면에서 정경화는 회화의 꾸밈없는 직설의 가능성을 발견한 듯하다. 이 즐거움과 확신은 번잡한 판독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긋는 몸동작의 방향과 그 힘만으로도 풍경을 구현해 내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로서 미술가는 과거의 교훈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향할 기회를 보게 된 듯하다. 군살 없이 관람자의 망막을 자극하는 먹의 단순한 단위들이 풍경으로 읽힌다는 사실, 그리고 그 판독이 여과 없이 관람자의 눈에 곧장 꽂히는 그 사실에 그는 놀라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 칠이라는 회화의 중요한 본질이 포기될 염려를 유발한다. 한 토막의 나뭇가지 끝에 묻힌 먹은 흔적을 지속시켜 표면에 스며들게 하기는 어렵다. 관람자의 몸(감각, 눈)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소묘의 방법으로 제작의 자유를 누리고 실험의 가능성을 정경화는 보았지만 그것이 관람자의 마음에 깊이 있는 울림으로 읽혀질 긴 호흡이 없는 것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2003년 이후 지속과 스며듦을 위해 나뭇가지 대신 죽필(竹筆)을 선택했다. 지금껏 그는 이것으로 그린다. 죽필은 자잘한 여러 나뭇가지를 묶은 것과 같고 그 틈 사이로 어느 정도 먹물을 간수할 수 있다. 죽필의 채용으로 그의 화면은 자유와 생기를 유지한 채 표면을 스미게 하는 얼룩들을 갖게 되었다.
뼈대와 힘: 필의 특질 ● 정경화는 이들 일련의 시도에 활용된 붓의 변화가 "새로움에 대한 모색"으로 붓의 "독창적 표현을 위해 모필에서 나뭇가지로" 그리고 "나뭇가지에서 죽필"로 옮아왔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나는 그가 자신에게 부과된 교훈에 대한 반응을 본다. 그는 관찰된 대상들과 그 관계를 변화무쌍한 표현 가능성을 지닌 모필로 재현하는 전통적 훈련을 마무리하는 끝에 단순하고 딱딱한 도구로 대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시도를 통해 그 새로움을 향해 간 것으로 비친다. 이는 5세기 말 시에허(謝赫)가 제시한 여섯 가지의 제작법들 중 "뼈대 있게 붓 쓰기(骨法用筆)"에 대한 반응이다. 정경화의 화면에 등장하는 나무나 바위 그리고 계곡을 비롯한 지형들의 사정들은 세세하게 재현되지 않은 채 간단한 휘갈김들로 축약되어 있다. 이 축약물들이 오로지 뭉치고 흩어지거나 힘들의 방향으로 구축되고 그것이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되어 전방으로 쏟아지려 한다. 점이나 선 혹은, 얼룩의 단위로 대상이 휘갈김으로 환원되고 그것들이 표면을 장악했다 퍼지는 세력의 변화는 대상들과 그것들 간의 조직을 뼈대 있게 재현할 것을 요구한 시에허의 암시에 대한 미술가의 분명한 응답이다. 여기서 그의 붓 즉, 필(筆)은 단순히 물리적 도구에 머물지 않고 그것 자체가 특질(quality)로 읽혀지고 또한 미술가도 그렇게 간주한다. 필은 몸짓의 힘과 방향을 평면에 기록하는 도구에만 머물지 않고 필 그 자체가 곧 몸짓의 동세를 대신한다. 더욱이 그의 회화를 앞에 두고 "필이 뭉쳤다" 혹은 "필이 뻗쳤다"라는 진술이 그 제작의 도구가 뭉쳤다거나 뻗쳤다는 것이 아니라 평면에 강렬하게 감지되는 시각적 징표들의 특질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제작의 도구(즉, 매체)가 특질이라는 마음의 상태(기호나 판단)를 대신하고 그것과 같은 자격을 갖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언어에 앞선 인간의 앎을 설명할 때의 예시를 환기시킨다. 그는 맹인이 지팡이로 길을 찾는 방법의 설명으로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직관적 앎을 밝히려 한다. "맹인의 손아귀를 자극하는 지점들의 간격과 그 압박의 정도로 설명하는 것보다 길바닥을 두드리는 지팡이 끝에 이미 그의 감각이 있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암흑 속에서 길을 찾는 지팡이의 기능을 훨씬 더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정경화의 필은 단지 대상이 지닌 외관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 힘(氣)의 흐름과 발산 그리고 그 속도와 강도가 표현되게 하는 그 자체 하나의 시각적 특질이다. 그의 필은 산세와 계곡, 나무와 바위와 같은 대상을 그럴듯하게 조작해서 관람자의 눈을 속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들이 현실에 있는 근본적 까닭을 드러내는 시각적 힘으로 파악된다.
유연함의 역설: 농필 ● 김상철은 정경화의 화면에서 "굳이 바위와 나무를 구분하고 하늘과 땅을 나누는 것"이 "부질없어 보인다"며 "거기에는 무수한 필선들과 묵점들이 자리"하고 "마치 수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악보와"같다고 지적한다("숨쉬는 필묵, 살아나는 실경", 「숲·바람·숨결」 2003). 그는 또 정경화의 회화가 형상을 "해체하고 리듬과 운율"을 포착하기 위한 "과정"이라 한다. 그의 언급은 대상의 외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붓과 대상 그리고 제작자의 몸짓을 일치시키는 과정을 눈여겨본 것으로 비친다. 그렇다고 정경화 화면의 이미지들이 온전히 대상의 비유(figurative)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누구든 그의 회화를 보면 풍경으로 판독하고 그 속에서 나무들과 바위 그리고 지형들을 넉넉히 추리해낸다. 간헐적으로 인공의 석물(탑이나 부도)이 드러나는 것도 있다. 그의 화면은 힘의 흐름이라는 비가시적 사실과 환경이라는 구상적 이미지가 공존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시각적 비유가 공존하는 셈이다. 힘의 흐름과 운율은 머물지 않고 움직이려는 것이라면 시각은 견고한 형태로 고정되려는 것이다. 이 둘의 통합은 바로 최소한의 비유를 겨우 허용하는 범위로까지 축약한 먹의 형태에서 비롯된다. "농필"은 "붓을 놀리다", "붓을 희롱하다"라는 의미와 함께 "붓과 함께 노닐다", "붓과 거닐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국악의 연주기법 중 "농현(弄絃)"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농현은 현악기의 줄을 짚고 흔들어 소리를 애초의 것보다 더 많이 끌어 올려 길게 내는 것을 말한다. 농현은 본래 남인도의 현악기 비나(vina)의 독특한 연주기법이 고대에 한반도로 전래된 것이란다.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전라도의 음악에서 농현은 딴 지방보다 더 길고 더 격렬하다. 필을 우롱하거나 놀리는 것은 정경화가 채택하고 주목하는 재료의 물리적 사실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유사하게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재료의 물리적 속성이 노출되지 않을수록 성공적이다. 고대 지중해인들은 딱딱한 대리석의 속성을 세련되게 숨겼기에 살아 있는 듯 한 착각의 여신상을 만들었다. 정경화는 그 반대의 선택을 통해 오히려 재료 그 자체의 특성을 화면에 노출시킨다. 이 때 그가 쥔 필은 그대로 표면의 저항과 충돌한다. 그리려는 동작의 힘과 그것에 대응하는 화면의 힘이 그의 표면 곳곳 남아 있다. 이 충돌의 정도와 방향을 기록하는 것으로 미술가는 대상들의 뼈대와 그것들이 환경에 관계하는 구조를 자신의 회화에 기록해왔다. 표면의 저항에 대한 미술가의 반응과 미술가의 돌진에 대한 평면의 반응은 그 앞에서 화면 전체를 응시하는 진지한 관람자의 마음에 요란한 소리의 긴 떨림으로 메아리친다. 이는 견고한 시각의 매체인 회화가 눈의 판독을 넘어 울림이라는 연속의 매체 즉, 음악에 관련되려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김상철이 정경화의 회화를 악보 같다고 한 것은 정확한 지적으로 보인다.
노니는 공간으로서의 평면: 필의 일치 ● 상반된 힘들의 충돌들은 필의 경로를 남긴다. 흙 마당을 대 빗자루로 쓸 때 쓰레기를 치우는 방향에 따라 그 결이 일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대 빗자루로 그 곳에서 아이들이 말놀이를 하게 되면 그 흔적들은 거의 정경화의 회화에서 보이는 결들과 유사할 것이다. 아이의 놀이에 사용된 비는 아이의 흥겨움을 고스란히 마당에 기록한다. 이 때 대 빗자루의 움직임은 정경화의 죽필의 흥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2007년 이후 줄곧 적용되는 발묵(潑墨)의 평면들에서 흥겨움은 이전보다 더하다. 발묵이 제공하는 유연함이 죽필의 딱딱함을 간간이 중화하고 결들의 응축과 확산에 율동감을 강조함으로써 표면의 흥을 증폭시킨다. 그의 필은 표면의 곳곳을 미술가의 관심과 시선을 안내하고 그의 손짓을 유도한다. 이는 평면을 여행하는 것이자 산책하는 것이다. 미술가는 이 유람을 통해 종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감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나무들이 비탈에서 자라는 그 존재의 힘을 더듬는가 하면 가파른 지형의 동세를 휘감아 보기도 한다. 이 때 그의 감각은 죽필을 쥔 손에 있지 않고 평면과 접촉하는 그 끝에 있게 된다. 죽필은 세상을 향해 뻗은 촉수처럼 몸의 일부가 되고 미술가의 마음은 그 끝에 집중된다. 달리말해 죽필은 미술가 자신이 된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결국 미술가가 필로 평면을 희롱한다가 아니라 그 스스로 필이 되어 평면에 노는 것이 된다. ● 정경화는 대상의 골격만을 취하는 축약된 율동의 형상들을 딱딱한 필로 화면에 구축척하는 풍경으로 지난 10년간 수묵화의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신체의 움직임이 여과 없이 기록되고 재료의 물리적 특성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직설로 그의 수묵은 관람자의 감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명시도로 회화란 저쪽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그대 앞의 분명한 실재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묵화가 충분히 사변적 교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한편 그의 회화는 그것을 향한 사람의 의지와 그 의지에 반응하는 그림의 긴장 간의 관계를 떨림이나 메아리와 같은 공감각적 개념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더 나아가 물질인 회화 매체가 인격인 제작자의 감각을 대신하는 구체적 사실임을 그의 회화는 논증한다. 이 통합과 가능성의 확장은 필과 놀고 필을 놀리는 유연한 평면의 개발에서 가능했다. ■ 이희영
Vol.20111207c | 정경화展 / JUNGKYUNGHWA / 鄭景化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