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Muddy Stream

윤동천展 / YOONDONGCHUN / 尹東天 / painting.installation   2011_1130 ▶ 2012_0127 / 월요일 휴관

윤동천_정치가-공약_애드벌룬_지름 2m×3_2011

초대일시 / 2011_1130_수요일_05:00pm

기획 / OCI미술관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일상 속 하늘의 북소리 ● 천고(天鼓). 전시장 입구에 놓여 진 거대한 추상 작품인 「탁류」를 지나 첫 벽면에 다가올 글귀이다. 하늘의 북소리, 하늘의 통곡소리... '천고'는 단재 신채호가 1921년 1월 중국 북경에서 발행한 개인잡지의 이름이다. 이 잡지를 통해 독립의지를 일깨우며 민족주체를 부르짖었던 신채호. 그가 천고의 기개로 세웠던 항일언론활동을 대변하는 이 단어 바로 이웃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 이 두 액자는 얼마나 가깝고도 멀리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 병마와 싸우며 생활고로 하루하루 연명해야하는 상황일지언정 세수할 때조차 허리를 굽히지 않으며 주체적 의지를 지켜냈던 신채호였다. 그 시절과는 비교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지금,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무언가에 쫓기듯 매일을 달음질치거나 벌어도 벌어도 모자른 양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편 이는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빈곤층으로 전락되어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하는 사람들의 각박한 상황을 환기시키는 문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 되었던, '천고'는 이러한 현실, '탁류' 속에 내맡겨 있는지 모르는 우리의 삶과 주변을 되돌아보라는 이번 전시의 화두일 것이다. 또 하나의 액자엔 지장(指章)과 함께 '푸른 맹세'라 적혀져 있다. 이는 단재의 기개 혹은 통곡의 응시를 마주하게 된 작가 스스로의 다짐일 것이다.

윤동천_정치가-내밀다_쇠봉, 액자, 수영오리발_가변크기_2011

윤동천은 이번 전시에서 보다 거시적인 시각을 투영하면서도 작품의 소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형식과 의미 파생 방법을 더욱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다. 거대한 「탁류」 앞에서 소리 없이 울리는 「천고」. 근대 서양화의 대표격으로 간주되는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화폭과 종이 위 연필로 써내려간 작업의 대비는 서로에게 우리의 근대 역사와 미술사를 반사해내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을 거쳐 서구화로 점철된 근대화 과정에서 급속도로 변모해간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부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회화와 글, 한국의 것과 서구의 것, 민족주체와 인류의 보편성 등 우리의 근대를 이루었던 여러 표상들 사이의 긴장과 간극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반향과 중첩의 오랜 세월을 통해 이미 우리의 현재와 미술이 된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을 환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윤동천_정치가를 위한 도구들_2011_연작 中 부분

윤동천의 회화 작품들은 추상 혹은 미니멀리즘이라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을 차용하지만 작가가 발 디디고 있는 특수한 문맥에서 발생하는 양태나 사건, 기억 등을 담는 작업이다. 푸른색과 붉은 색이 점점으로 가득 차 가을 단풍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그림에는 「번지다-시대우울」, 윤기 없는 검정 바탕에 윤기 나는 검정 바탕을 올린 추상작품에는 「거대한 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거대한 침」을 얼핏 바라보면 개념상은 말레비치의 「흰 색 위에 흰색」이나 라인하르트의 검은 그림을 떠올리게 되고, 자유로운 형태의 색면이 서로에게 침투되면서 일종의 숭고미까지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색장회화(Color Field)와도 유비될 것이다. 하지만 '김수영 시인을 기리며'라는 작품의 부제를 본다면 그 의미는 전혀 새로운 것이 된다. 관념적 경향의 초현실주의적 시를 썼었던 김수영은 1960년대 4.19를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사회적 자유를 부르짖으며 억압적 현실과 소시민적인 비애를 성찰하는 시로 전향하게 된다. 그 동안 외면했던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시인으로써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했기 때문이며, 시 형식에서도 더욱 적극적인 실험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이 때 나왔던 그의 유명한 말이 "시여, 침을 뱉어라"였다. 「거대한 침」은 바로 윤동천이 자신의 추상을 '구체적 추상'이라 명명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단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작업일 것이다. 화면은 더 이상 조형적 특질로 완결되는 자족적 공간이 아니며 화가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거나 인류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신의 기치를 내거는 아방가르드적 상징도 아니다.

윤동천_정치가를 위한 도구들_2011_연작 中 부분

윤동천은 회화 뿐 아니라 사진, 텍스트를 포함한 각종 오브제들을 특정한 일상적 사건 혹은 문화사라 할 수 있는 외부에서 그 요소를 끌어와서 정리하고 작가 고유의 시각으로 구성하고 재배치함으로써 그 의미 변화에 주목한다. 그런데 그 문화사적인 요소는 외부적 사건 뿐 아니라 대상적인 영역만으로는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가슴으로 반응하거나 머리에 떠오르는 자취와 감각을 표상하기도 한다. 보다 직접적인 예로 망치로 수없이 두드려낸 알루미늄 판, 구겨진 천이 액자에 걸려 있는 작업을 들 수 있다. 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위에는 구멍과 잔 흠집들이 가득하다. 이는 일상적 재료를 사용하여 작가가 그 제작과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아르테 포베라(Art Povera)의 전통에 닿아 있고 캔버스를 구멍 내거나 칼로 찢어 유명한 폰타나(Lucio Fontana) 작업의 맥을 잇는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제목인 「울화」와 「부아」를 대면하면, 캔버스의 오브제화니 공간주의니 하는 미술사적인 설명은 한방에 무색해져 버린다. 이 단어들 앞에서 더 이상 무엇을 말할까. 일상과 미술의 교차 등의 수식어도 이제 너무도 관용적 표현이 되 버린 스스로를 발견할 뿐 순간 무의미해져 버린다. 울화, 부아, 너무도 명백한 제시가 아닌가. 한마디로 속이 다 후련해진다. 이것이 윤동천 작업의 즐거운 묘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은 이러한 작품 앞에서 그것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여러 사건들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감정이든 혹은 말 그대로 두드려 팬다는 상상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든, 우리 사이에 공유의 감각을 이루어낸다는 점이다. 게다 '울화'와 '부아'는 영어든 불어든 어떠한 언어로도 제대로 번역될 수 없는 한국인들만 정확히 반응할 수 있는 문화특정적인 감정이다. 거대 담론으로써 한국성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문맥과 관련한 지표를 제시하면서 함께 나누는 순간을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 윤동천 작업에서 핵심적인 참여적 맥락이다.

윤동천_정치가-오직 보이는 것 1, 2_C프린트_각 80×120cm_2011

윤동천 작품이 파생하는 진솔한 공명은 형식과 내용, 기표와 기의의 결합 속에서 명확한 의미로 규정됨으로써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을 바라보는 일반적 관점의 빗장을 깨부수고 새로운 문맥에서 펼쳐 보이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때로는 「부아」에서처럼 그 어느 한쪽(제목, 기의)으로 인해 의미가 적극 수렴됨으로써 명확해지기도 하고 작품에 따라 명확하게 보이던 의미가 모호하게 미끄러지기도 하는 반전도 있다. 물의 표면 모습을 그리고 있는 「흐르는 물과 고인물」을 보자. 이에 대해 시간의 흐름, 수질 오염 등 보다 원형적이거나 보편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쉽게 4대강 사업을 떠올릴 것이다. 「흐르는 물과 고인물」은 말 그대로 단순히 물의 상태를 재현하는 지표에서 시작하여, 환경 문제를 암시하는 단계로,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정책이라는 문맥 속에서 읽혀지는 상징적 의미로 진행해가면서 여러 층위의 의미망을 구성한다. 동시대적 도상해석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 한번 작품을 돌아보자. 어느 한 순간 그 물의 표면은 오히려 낯선 붓자국들 뿐으로 환원되어 다가온다. 그 여러 겹의 명확한 의미가 모두 가능하기도 하고, 동시에 무화되기도 하는 공간인 것이다.

윤동천_사라지다-적녹색맹을 위한 그림_캔버스에 유채_181.8×227.3cm_2011

윤동천의 작업은 정치적이다. 어떠한 이념 혹은 쟁점을 적극적으로 전파한다는 의미에서도 아니며 모든 인간의 활동이 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물론 지난 개인전과 비교할 때 이번 전시에선 정치현상에 대한 풍자의 수위가 한층 더 높아진 느낌이다. '의미 있는 오브제-정치가 연작'의 하얀 애드벌룬 「정치가-공약」, 막대 봉에 나뭇가지들이 뻗어있는 「정치가-자라는 코」, 검은 안감이 대어 있는 흰 버선 「정치가-속」, 코르크로 석고 형태의 당나귀 귀를 막아버린 「정치가-경청」 등은 더할 나위 없이 신랄하며 직설적인 은유이다. '의미 있는 오브제-정치가를 위한 도구들'은 더욱 강력한 시각적 명쾌함으로 다가오는데, 파리채, 끈끈이, 쥐덫, 각종 세제와 표백제, 빨래방망이, 마대자루 등 작가가 직접 구한 오브제들이 조각대 위에 봉헌되고 있다. 특히 국회에서 국무위원들한테 똥바가지를 퍼부었던 김두환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똥바가지는 과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 작가는 열악했던 정치 구조를 풍자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십년 전을 회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아졌는가 돌아보면 결국 도돌이표를 찍고 있는 듯 보이는 현실에 화가 나 결국 이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국가의 운명과 장래를 걸머지는 엘리트나 혹은 영웅적 지성인으로서의 예술가를 꿈꾸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누구나 일상을 통해 작업하고 사회와 정치를 형성하는 시각에 있어서 창조적이고 참여적인 역할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윤동천의 예술관은 "모든 사람이 미술가이다"라고 주장한 요셉 보이스 혹은 노발리스(Novalis)의 명제와 닮아 있다. 미술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윤동천의 주장이다. 이는 일상이 미술로 승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예술이 누구에게나 이루어져서 그 특별한 지위가 사라지는 상황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는 모든 만들기 활동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하루하루 때우듯, 다람쥐 쳇 바퀴 돌듯 살아가는 일상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과 의미 불어 넣기가 요구된다.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음식을 지을 수 있을까. 색다른 맛이 날까. 어떻게 썰고 끓일까. 정성을 다하던 배합과 시각을 다르게 하든, 나는 그것을 '맛'을 더한다고 말하고 싶다. 거친가 하면 매우 정교한 작업, 똑부러지는 명확함과 모호한 감성이 공존하는 공간, 다양한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배합도 모두 매력적이지만 내게 있어 윤동천 작품은 그 무엇보다 참 '맛'이 있다.

윤동천_겸허한 소통 1_C프린트_80×54cm_2008 윤동천_고독 연작 1_C프린트_80×54cm_2006

윤동천의 작업은 우리 삶 속의 흔한 대면과 질문들 속에서 생성되며, 탁류로 대변되는 현재 속에서 천고의 기개를 그리워하는, 세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 북소리는 우리 시대엔 이미 불가능한 것일 지라도 그는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윤동천의 작업은 풍자적이고 냉소적인가하면 실재로는 현재를 건드리고 변화시킴으로써 한결 나은 세상을 염원하는 이중의 의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진아

Vol.20111128l | 윤동천展 / YOONDONGCHUN / 尹東天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