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색, 춤추는 붓

권기철展 / KWONKICHUL / 權基喆 / painting   2011_1116 ▶ 2011_1126

권기철_love_한지에 혼합재료_91×213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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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제이원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제이원 GALLERY J-ONE 대구시 중구 봉산동 218-9번지 Tel. +82.53.252.0614 www.artjone.com

텍스트로서의 몸과 그림 ● 권기철의 그림은 대상의 명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이지만, 모더니즘의 전통이 회화의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배제했던 타자들을 힘껏 끌어안는다. 화려한 색채와 액션, 그리고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의 회화는 몸, 음악, 문학 등 작가가 그림 이외에 심취하고 있는 다양한 삶의 취향과 지향이 뒤섞이는 장(場)이다. 이러한 뒤섞임은 그의 스튜디오에 있던 많은 문학 서적들이 반영된 문장과 문자의 흔적들, 음악을 틀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붓이 시작해서 끝나는 시점의 행위가 분명히 나타나는 즉발성, 감정의 상태들이 드러나는 과정에 직접 반영되어 있다. 물론 그의 회화는 몸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음악을 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해독할 수 있는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회화라는 장에서 잘 섞이기 위해 변형된 요소로 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짐짓 엄밀해 보이는 형식주의 회화가 가지고 있는 단조로움을 파열시키고, 생의 약동과 활기를 불어 넣는 이질적 요소들임은 틀림없다. 화가가 아니면 목수가 되었을 뻔한 그는 이번 전시에서 소나무로 된 입체작품까지 첨가하였다. ● 캔버스 보다 흡입력이 강한 한지 위에 다양한 재료로 번짐, 흘러내리기, 튀기기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조절된 화면들은 몸의 연장으로서의 붓과 물감이라는 그림의 특성을 보여준다. 맨 종이가 드러난 흰 바탕은 단순히 그림의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라, 여백으로, 그 위에 스며들거나 얹힌 형상들과 밀고 당기는 적극적인 부분이다. 여백을 제외하고 가장 밝은 색채인 노랑 계열의 색채는 얼룩이나 선, 형태 등으로 존재하면서 화면에 활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분리된 색 면들을 이어주거나 어두운 바탕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형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문방사우(文房四友)에 익숙했으며, 지금도 종종 캘리그래피 작업을 하는 권기철의 작품에서 기호의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바탕에 낙서같이 글자를 끄적여 놓은 작품을 비롯하여 문자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문자적 요소들은 ㅅ자의 연속으로 풍경으로 확장되거나, 이니셜을 연상케 하는 기호들은 정체성과 중첩된다. 화살표나 교정부호 같은 도형기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밝은 분홍으로 그려진 작은 기호들은 화면에 강한 포인트를 주면서, 상징 뿐 아니라 조형적 요소로 빛을 발한다.

권기철_love_한지에 혼합재료_91×53cm_2011
권기철_love_한지에 혼합재료_91×53cm_2011

권기철의 작품에서 주요한 조형요소는 점 선 면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이것들이 다양하게 조합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이야기는 일상적 시간성을 따르는 소설적 서사 구조라기보다는 시처럼 응축되어 있다. 그의 작품 속 기하학적 요소는 화면의 좌표축을 설정해 주는 먹줄이나 간혹 등장하는 숫자 밖에는 없다. 그 조차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텍스트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지, '회화의 평면성'을 확보하기 위한 형식주의적 요구사항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먹줄은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목(木) 작업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흑백회화에 많이 활용된다. 흑백회화는 먹, 흑연, 기름들, 아크릴 물감 등이 섞여 만들어지며, 서너 번씩 올리면 층이 드러난다. 수직과 수평은 생각이 뻗어나가는 좌표가 되어준다. 흑백 회화 뿐 아니라, 색이 들어간 작품에서 검정은 손 글씨의 흔적을 연상시키는 주요한 요소이다. 검은 선들은 힘찬 액션과 기호의 흔적으로, 서로 용이하게 호환된다. 화려한 색채는 보색대비나 오방색 등 전통적인 배색법과 관련되며, 인도나 중국 등지의 오지 여행에서 발견한 민속의 원색적 색감에서도 연원한다. ● 색은 다층적으로 배열되며 색감에 따라 산이나 물 같은 자연 풍경이 강하게 연상된다. 지난여름에 했던 전시회의 작품 제목들은 「어이쿠! 봄 간다」였는데, 작가는 대구시 외곽의 작업실로 와서 두 번의 봄을 보내면서, '내가 살아 있구나'를 느꼈다고 말한다. 자연은 주요한 요소이지만 통상적인 풍경화 같은 류가 아니다. 그에게 자연은 무엇보다도 몸이기도 하다. 작품에 강하게 내재된 신체적 요소는 입체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소나무로 만든 입체 작품은 의자이면서 테이블, 또는 작업실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몸을 싸안는 가구이자 공간이며, 동시에 자신의 이미지이다. 자동차 앞의 엠블럼 같은 말과 이쑤시개로 만든 몸통 위의 촉수는 앞으로 힘차게 달리면서도 섬세함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 희망이 투사되어 있다. 쇠 대신에 드럼 스틱으로 빗장질러 연결된 나무 둥치들은 분해해서 재조합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구조를 가진다. 둥근 받침대에 괴어져 있어 시이소처럼 기우뚱한 그것은 작가가 몸과 공간을 가변적인 것, 즉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권기철의 작품에서 몸은 초월적인 것이나 대상적인 것이 아니다.

권기철_love_한지에 혼합재료_91×53cm_2011
권기철_권기철_love_한지에 혼합재료_91×53cm_2011

육체와 정신을 명확히 구분하는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몸은 영혼에 비해 무겁고 물질적이며, 이성적인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로 등장하곤 한다.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철학자 니이체가 말하듯이 '영혼이란 몸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몸은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고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반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몸은 삶과 예술에 특정한 관점과 지향성을 부여한다. 아멜리아 존스는 「몸」에서 재현의 수수께끼, 불멸과 초월을 성취하고자 하는 항상 실패하는 욕망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이 몸과 더불어서 라고 말한다. 그림에는 몸을, 그러므로 자아를 완전하고 진실하게 그려내고자 하는 욕망이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몸과 정신을 나누는 이원론처럼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실체가 되려한다. 또한 몸은 결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기호는 그것의 의미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가득 차' 있고, 이러한 몸은 '결코 자족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몸은 타자와 다른 대상에 열려 있는 살'이며, '항상 현재형으로 완전히 살아지는 우발적인 것'(메를로 퐁티)이다. 그림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체적이며 육체적이다. 그림은 몸과 같이 '이 세상의 살'(메를로 퐁티)인 것이다. ●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은 원근법적 공간 같은 시각적 공간에 투사되곤 하지만, 양자를 분리하지 않는 사고는 주체가 중심이 되는 시점과 지점이 불분명하다. 권기철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먹 선으로 된 좌표계조차도 무정형적인 형상이 그려진 이후에 첨가되는 것이지, 그 전에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분법이 해체되면 작품 역시 몸으로 간주하는 비유법이 성립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의 몸은 유기체의 자족성(자기 동일성)을 가지기 보다는 타자를 내부로 받아들이는 표면이 된다. 주체란 항상 그 자체 내에서 완전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타자를 조건으로 하는 몸/자아로서의 주체인 것이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몸은 자신의 우연성과 불완전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것은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서 잘 나타나는 자아와 타자의 상호주관적 교환을 조건으로 하는 몸'(아멜리아 존스)이며, '불확정적이고 무형적이며 아직 조율되지 않은 잠재력의 덩어리'(엘리자베스 그로츠)로서의 몸이다. 작품에 보다 깊이 개입되는 몸은 추상회화로 정점을 이루는 모더니즘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낳았다.

권기철_댄싱힐_한지에 혼합재료_162×112cm_2011

특히 작품의 주제(특히 문학적인)와 재현을 비순수한 요소로 보고, 그림에서 이를 배제하고자 했던 그린버그의 논리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린버그는 주제에서 매체로의 전환을 촉구했고, 그 결과 현대회화는 순수성, 조형성, 추상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을 전제하는 칸트주의가 극단화 된 것으로, 몸에 대한 억압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암암리에 서구의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몸에 대한 정상성의 기준을 내포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논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매체의 불투명성'을 논하는 부분이다. 이제 그 불투명해진 매체에는 몸을 포함시켜야 한다. 매체로서의 몸은 하얀 종이, 곧 투명하거나 중성적인 것이 아니다. 물질로서의 몸은 불투명하고 취약하며, 가변적이다. 특히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오른 손을 크게 다쳐 왼손잡이가 된 작가에게 몸은 결코 초월되는 무엇이 될 수 없는, 매순간 의식되는 실체일 수밖에 없다. 동일시해야할 정상성에 대한 기준이 와해되면, 몸의 불편함은 부정이나 배제 될 필요가 없다. 권기철의 작품에서 몸은 타자로서 호출되며 작품의 시작이자 과정이고 끝이 된다. ● 작품에 몸을 적극 도입하려는 후기 모더니즘의 추세는 추상표현주의에 있어서 그린버그와 경쟁관계에 있는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를 부각시켰다. 아멜리아 존스는 그린버그가 전략적으로 몸을 배제하려고 할 때조차 예술가들은 점점 더 공공연하게 몸을 그들 작품의 부분으로 수행했다고 본다. 이제 몸은 편재하는 현전이라는 사실이 당연시되었고. 근대적 형식주의에도 불구하고 몸은 전적으로 의미와 관계를 맺었다. 권기철의 작품에서 모더니즘의 순수주의가 배제하려 했던 또 하나의 가치는 문학이다. 구체적인 문장 전달과는 무관해서 가독력이 없지만, 기어코 찾아서 읽는 관객도 있다. 작품 안에 글씨가 있는 경우 제목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그에게 작품은 몸이면서 텍스트이기도 하다. 몸이 바로 텍스트이며, 텍스트가 바로 몸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그자체가 이미 복잡하게 구성되어지고 또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띤 장소인 것이다. 피터 부룩스가 「육체와 예술」에서 말하듯이, 육체는 세계 안에서 상징을 통하여 의미를 창조하는 동기가 되면서, 동시에 그 창조 과정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환상은 육체 위에 미래의 성취, 쾌락, 권력 등의 상상적 옷을 입힌다. 기록된 텍스트로서 몸은 세계와 의미를 교환하는 장이 되는 것이다. ■ 이선영

권기철_댄싱힐_한지에 혼합재료_162×112cm_2011

노래하는 색, 춤추는 붓-색은 춤추고 노래한다 ● 구두가 맘에 들어서 신어서는 안 될 구두를 본인의 욕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결국은 본인을 사랑해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욕심을 부린 빨간 구두의 카렌의 이야기. 빨간구두를 신은 소녀는 영원히 춤을 추는 마법에 걸려 결국 양쪽 발을 잘리게 된다. 춤추는 구두는 잘린 발을 안고서 구두는 구슬프고 광기어린 춤을 추며 떠돈다. 댄싱힐이란 명제는 어린시절 잔혹하다 싶은 동화를 기억 어딘가에서 부터 꺼내는 그림이다. 하이힐이 높아질 수록 구두를 신은 발과 거리가 먼 코는 높아가고 세상은 내 턱 밑에서 흐르고 있다고 한다.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이란다. 하지만 이 구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인데 불구하고 여자를 위해 발전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어찌보면 계속 남성을 위해 태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쇼윈도를 보는 여자의 눈이나 마찬가지니까. 이렇듯 구두는 과시욕, 소비욕, 자기만족등 인간의 욕망을 대변해 주는 아이템이다. 인간의 욕망보다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을 보여주려는 물건에 더 가깝고 남자들에게는 성적인 환상을 주는 섹스판타지를 구축하는 물건에 가깝단 말이다. 환상을 주고 허상만 남는 힐의 높이는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 지금 현재의 이미지가 허상인지 진실성있는 본질인지 다시 질문한다. 이런 구두가 홀로 춤을 춘다. 신체는 없어지고 결국엔 색만 남는다. 색면 위에 붓이 춤추고 나면 구두가 홀로 남아있다. 구두가 춤을 추듯 춤추는 붓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작가 권기철의 그림은 색들의 노래이다. 그래서 이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화면은 색 면과 그 위를 흩뿌리는 지나간 선들로 이루어져 리드미컬한 화면을 구성한다. 자유로운 선과 화려한 색은 시각적인 음률을 보여주고 있으며 유동적인 선들은 작가내면의 울림을 음악적인 역동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국화가 가지고 있는 정적인 재료에 아크릴을 이용한 뿌려진 물감자국들은 기존 정적이고 다소 감정표현에 서툰 한국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색선이 표현하는 밝고 경쾌함, 그러나 그것들을 붙잡는 화면을 바로 다잡는 울림까지. 할퀴고 지나간듯한 그의 붓질에서는 이성의 체계보다는 오히려 한 인간의 작은 감성의 몸부림마저 느껴진다. 미술사조가 늘 그러하듯 이성과 감성의 반복된 변화에서 작가의 그림은 흔들리고 가벼운 인간의 본질적인 감성에 대해 적극적인 시각유희로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재현적 묘사와 같은 현상의 외면이나 사고의 체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정신적 체험으로 형성되는 의미에 대해 표현하였다. 원색을 주로 하는 소수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단순한 색채 또는 색 면 대비 효과를 더욱 더 극대화 하면서도 여백을 두어 자유로운 형상과 색채로 가득 채운 쉴 틈 없는 색 면과 선의 노래 속에서 쉴 틈을 만들어 준다. 이것은 음악적이며 유기적인 시각의 운동이다. ■ 전은아

Vol.20111125f | 권기철展 / KWONKICHUL / 權基喆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