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hos and Small Narratives

Japanese Contemporary Art 일본현대미술展   2011_1118 ▶ 2011_1211

Tomoko Nagai_Puppet and Various Countries_Oil, glitter, modeling paste on canvas_162×194cm_2011

초대일시 / 2011_1118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타케오 하나자와 Takeo Hanazawa 花澤武夫_미츠히로 이케다 Mitsuhiro Ikeda 池田光弘 존 이토 Zon Ito 伊藤存_이즈미 카토 Izumi Kato 加藤泉_마키코 쿠도 Makiko Kudo 工藤麻紀子 마사히코 쿠와하라 Masahiko Kuwahara 桑原正彦_나오후미 마루야마 Naofumi Maruyama 丸山直文 카에 마스다 Kae Masuda 増田佳江_쿄코 무라세 Kyoko Murase 村瀬恭子 유코 무라타 Yuko Murata ムラタ有子_토모코 나가이 Tomoko Nagai 長井朋子 히로시 스기토 Hiroshi Sugito 杉戸洋

후원/협찬/주최/기획 / 가나아트

관람료 /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파토스와 약함: 1984년 이후 일본의 회화에 대해_전시서문에서 발췌 ● 살아남기 위한 '작은 이야기'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나 동시다발적 테러 사건에서 알게 되는 것은, '거창한 이야기'가 그 효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위안거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대에 화가는 얼마나 부응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회화를 통해 사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나라나 무라카미조차도 전시, 혹은 미술 시장이라는 소비사회와의 연대 말고는 다른 참여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글로벌 체계가 바뀌어 개별 주체들과 국가간의 거리감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때에도 여전히 어떻게든 '작은 이야기'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작가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 예를 들면 시몬 미나미가와는 2008년 자신의 전속 갤러리에서 『핑크와 블랙, 전쟁과 평화』라는 전시를 열었다. 뉴스캐스터와 전투기, 전차가 그려진 이 화면에서 사실 어떤 뉴스나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사실 전쟁을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들과 나란하게 줄무늬와 물방울이 무늬가 그려진 캔버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뤽 튀망이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그들에 작품에 뉴스의 단편들을 사용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이슈들도 일종의 특이한 형식 속으로 흡수된다. 미나미가와의 이미지들의 병치가 만들어낸 의미의 공허함은 마치 공기를 마시는 듯이 매우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흥미로운 점은 미나미가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존 이토와 유코 무라타 또한 이와 유사한 형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세 작가의 화면 구성은 '강렬'하기보다는 오히려 탈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Takeo Hanazawa_At Dinner with Diana_Oil and silverleaf on canvas_131.5×194cm_2010
Mitsuhiro Ikeda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45.5×227.3cm_2011
Zon Ito_Squirrel Spirit_천에 자수_80×118cm_2009

또 다른 유형으로, 이즈미 카토나 신타로 미야케의 경우, 그들은 회화라는 가상의 공간 속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출현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작가가 2차원적 화면 안의 생명체를 입체적인 형태를 통해 삼차원의 현실 세계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로써, 회화(이미지)와 입체(현실) 사이의 관계는 심하게 흔들리게 된다. 회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이 회화를 모방하고 있는지가…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생명체의 이미지가 근거 없다는 사실 또한 망각된다. 이 가운데, 생명체는 스스로의 규칙을 발전시켜 나간다. ● 미츠히로 이케다나 타케오 하나자와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데 불리할 수도 있는 이런 태도는 어떠한 성숙함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그러한 긴 과정으로부터의 일종의 도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는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려는 의도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가령 이케다는, "혼돈은 보다 혼돈스러운 것 가운데에서만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의 구조를 알고자 이를 언어화시키며, 미분화하는 것으로는 그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혼돈스러움을 자신의 작품 안에 (혹은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본연의 자세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자신 스스로를 바꾸어서라도 세상과 동행하려는 것이다.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상황과 타협하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존재의 거부'(R.D.레인)라는 방법을 취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Izumi Kato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11
Makiko Kudo_Time to Sail_캔버스에 유채_227×365cm_2010
Masahiko Kuwahara_Lanoli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09

정신분열증적인 분열은 카시키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원근법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드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비틀거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면서도 현대 일본화의 마티에르나 구도에 근접해가거나, 혹은 멀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공간, 마티에르, 채도에 대한 그의 예술적 감각은 자신의 신체와 이념 속에 뿌리 박혀있는 감각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일본인(혹은 일본인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 다양한 취향으로 분리 가능한 여러 단편들을 보여주는 카시키와는 반대로, 마사히코 쿠와하라나 토모코 나가이는 단 하나의 성향으로 모아진다. 그들은 다양한 사물들을 하나의 취향으로 통합하는가 하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사물의 계층구조를 배제해 가는 철저한 기준을 갖고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취향이라는 층위에서 적용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취미(선택)를 받아들이는 그 품의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Naofumi Maruyama_Puddle in the Woods 4_Acrylic on cotton_227.3×181.8cm_2010
Kae Masuda_everlasting green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11
Kyoko Murase_Lily_코튼에 유채, 색연필_200×190cm_2010

약한 일본의 회화 ● 이러한 사회 참여를 위한 예술적 수단들은 자칫하면 이탈로 보여질 수 있다. 사회에 직접 손을 대서 힘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복잡다단함에 공감을 가지며 그 모습을 가시적인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형태의 사회 참여이다. ● 일본의 회화에서 또 다른 특징적인 점은 나오후미 마루야마나 히로시 스기토의 작품이 발산하는 분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작품에는 밀도의 높고 낮음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는 비시간 예술이기에 더욱 견고히 이어져 내려온 회화의 구조를 살짝 뒤흔든다. 그들은 해체 혹은 재구축이란 강한 행위가 아닌, 어디까지나 구조의 힘과 그것에 의한 편리함은 인정하면서도, '약함'이라는 성질을 회화에 부여하고자 한다. ● 마루야마나 스기토 작품에서 드러나는 분위기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오늘날 일본 건축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준야 이시가미가 분위기에 잠재하는 비가시적인 구조에 집중하는 것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산소, 질소나 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원자나 분자, 혹은 소립자라고 하는 구조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빈 공간도 실은 거대한 구조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스케일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스케일을 바꿔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많다."라고 이시가미는 말한다.

Yuko Murata_Vitamin Juice_캔버스에 유채_53×65.1cm_2011
Hiroshi Sugito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 그래파이트_140.5×260cm_2011

강함에 대한 요구를 뛰어넘으려는 의도에서, '약하다'라고 보여졌던 것들 중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태도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주목 받고 있다. (적어도 철학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예를 들어, 철학자 유우지로 나카무라 (b.1925)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랑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열린 감수성이야말로 파토스라고 말했다. ● 일본의 몇몇 화가는 지난 3월 11일 이후 타인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으로 약해졌다. 예를 들면 마키코 쿠도가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지진 재해 이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열린 개인전에서 일찍이 그녀의 작품 중 분명한 특징이었던 심상 풍경 성향이 옅어지고 있었다. 그림 안에 등장하는 사물 간의 스케일이 정연해진 결과, 풍경의 리얼리티가 높아졌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마음 안으로 (쿠도에게서 보자면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작품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 또한 카에 마스다도 변하고 있다. 광물이나 지층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그야말로 회화스러운 지층을 보여주는 작업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다소 회화의 세계 그 자체에 갇혀있는 듯한 경향을 보였다. 그런 그녀가 최근에는 무의식적으로 한 그룹의 초상을 화면 속에 그렸다고 들었다. 이처럼, 다른 이의 아픔을 느끼고 이에 공감하며, 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마음가짐이 일본 회화를 (혹은 1984년 이후의 회화를) 지탱해 왔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본 회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 켄지로 호사카

Vol.20111122e | Pathos and Small Narratives-Japanese Contemporary Art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