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104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임동식_박소영_박계훈_정보영_한석현_임성수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1411번지 제1,2,3전시장 Tel. +82.43.236.6622 www.spacemom.org
산수정경/ 자연에 대한 여섯 가지 '태도' 산수 정경, 자연이 시선에 포획되다. ● 자연은 주체의 시각의 프레임에 걸려 풍경과 산수가 되었다. 원시의 자연은 인간이 그 안에서 생존하고 투쟁하는 삶의 장(場)이었다. 자연은 늘 그렇게 삶의 거처로 펼쳐져 있었지만, 산수가 되고 풍경이 된 것은 세상의 경물이 사람의 시선에 발견되고 포획된 이후부터였다. 이것은 산수와 풍경화의 장르적 출현으로 봐도 분명하다. 그저 역사적, 성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는 도상으로서만 존재하던 풍경이 랜드스케이프의 독립된 화목으로 출현한 것이 산업혁명과 도시화가 시작된 18세기 이후였으니 말이다. '풍경', 그것은 '상실된 자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동양 사회에서는 자연을 재현하며 그것을 경(景), 즉 보이는 대상이라 하지 않고 그냥 산수(山水)라고 하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산과 물 사이를 와유하는 매개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전통의 산수가 그렇게 무념한 중립의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전적 중국 산수화의 미학을 정초한 곽희(郭熙)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수화를 즐기는 사람은 무엇보다 덕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하였다. 그것은 유가적인 지식인의 도시적 이상을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고전 산수화가 동아시아 유림들의 도학적 이상향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역시 지극히 현세적이며, 심지어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풍경과 산수는 미술의 한 장르가 아니라, 인간이 저마다의 세계관을 투사하는 하나의 매개체(media)였다. 그래서 산수풍경은 사람과 자연이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는 철학적 다이어그램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풍경, 사람과 대상의 철학적 다이어그램 ● 스페이스몸에서 마련한 산수정경은 정(精)의 산수와 경(景)의 풍경이 미술가들의 손과 시각에 의해 어떻게 통합되고 재해석되는가를 보여주는 지극히 성찰적인 주제의 프로젝트이다. 초대된 여섯 명의 작가들 임동식, 정보영, 박소영, 임성수, 한석현, 박계훈은 각기 다른 여섯 가지의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임동식은 땅과 나무를 통해 자연과 접신하는 애니미즘의 원시적 감정을 되살린다. 아스라이 잃어버린 땅의 진동과 울음이 세밀한 붓의 터치를 타고 울려나온다. 행위와 개념미술에 심취했던 오랜 시간 뒤, 자연에 소리에 심안을 뜬 작가의 충동과 절제가 어우러진 겨울 풍경은 정감으로 가득하다. 정보영은 공간을 다룬 풍경을 통해 철학적인 부재와 현존의 문제를 담아낸다. 원근법에서 시작하여 탈근대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정보영의 공간재현은 붓끝으로 써낸 한편의 논문처럼 묵직하다. 박소영의 떨어진 별은 우연히 포착된 자연에 대한 의미를 다시 입히는 과정이다. 우연에 필연을 더하는 작업, 발견된 오브제로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흰 수석의 형태로 제시된다. 한편 젊은 두 작가 임성수와 한석현은 유사 공학자와 문화 사회학적 접근으로 마을과 동네의 공간 지리학에 도전한다. 각자가 재현한 풍경은 하나는 판타지의 세계이고 하나는 사회학적 대상으로 다른 위상에 있지만, 두 사람에게는 공학적인 조작과 사회학적 시선으로 세계에 발언하는 패기가 있다. 귀여운 악동 같은 두 사람에게 자연은 시각의 대상으로서의 경(景)도 아니고 낭만적 감정이 투영되는 정(精)도 아닌, 그냥 사는 터전(場)의 문제인 것이다. 한편 장인적 작업을 선보이는 박계훈의 장지화는 미시적 집착과 관조적 시선을 동시에 보여주는 모순의 풍경이다. 칼로 도려내 화면에 물결치게 하는 새싹들은 철조에서 바느질을 거쳐서 종이로 이어지며, 대상에 대한 현미경적 몰입의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종이 위에 휘영청 솟아나는 나무와 나비의 풍경을 발견하면 비로소 시선은 강박에서 풀려나게 된다. 쇠와 실을, 칼과 종이를 품어내는 모순과 역설의 경이로움을 만나게 된다. 여섯 명의 작가들이 펼쳐 보이는 저마다의 산수 정경(情景)은 랜드스케이프에서 마인드스케이프로, 생태 지리학에서 공학적 판타지를 오간다. 이 모든 과정은 머리에서 사유되고, 심장의 원초적 생명력으로 덥혀지며, 공학적 지형에서 유희하다가, 관조의 이중주로 나아가고 있다. 그 향연은 낭만적이지만 유머러스하고, 교훈적이며 역설적이기 조차하다. 산수가 풍경이 되고, 풍경이 심상이 되는 여섯 가지 공간학, 그것은 결국 인간 삶의 양태의 제각기 다른 재현이 아니겠는가. 세계에 대한 여섯 가지 다른 철학적 재현의 심포지엄의 장에 초대받은 관객은 행운을 얻은 것이다.
임동식의 겨울풍경: 소멸과 생성의 애니미즘 ● 원래 자연은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사물은 자신의 태고의 언어를 가지고 인간과 소통하였다. 현대인들은 이 언어를 까맣게 잊었지만, 원초적 심성으로 육화되면 그 자연의 언어가 들리게 되는가 보다. 임동식이 그리는 풍경이 그렇다. 그가 그린 풍경은 신성이 깃든, 영매의 자연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고요하지만, 다가서 그 생명체 밑에 서 바라보면 거대한 생명의 존재가 물신처럼 숨 쉬는 경이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경지의 풍경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요, 함께 자연의 신성으로 들어갈 마음의 빗장을 열었을 때라야만 보이게 되는 그런 환상경이다. ● 붓으로 캔버스에 그리는 풍경화는 화가 임동식이 뒤늦게, 새로이 배운 장르의 미술이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한 임동식이 20여 년간 매달린 것은 개념과 행위미술이었다. 삶과 터에 얽힌 예술의 원시성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임동식의 노정은, 마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국화와 같은 자기 회귀의 과정이었다. ●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 한동안 시끄럽게 추구하던 "자연-생명에의 회복"이라는 것을, 세월이 흐른 뒤 충청도 원골마을에서 비로소 구현하게 된 데는 이미 예술과 자연의 합일을 생활 속에서 체득한 "자연-예술가" 친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의 그림과 제목에 등장하는, 바로 이 모든 풍경들을 권해준 친구이다. 물론 임동식의 풍경화는, 1970-80년대 그의 행위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의 원시성에 대한 추구는 1980년대를 이끌던 시절에도, 그리고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도 그를 온전히 사로잡은 유일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가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던 때, 땅의 소리가 울려나오는 진원으로 그를 인도 한 이는 그저 범부인 농사꾼이었다니 아이러니하다. ● 임동식은 자연을 풍경으로 구도 잡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용솟음치는 생명의 기운을 화면에 옮기는 것만으로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 장중한 나무는 강한 생명력으로 원시의 소리를 뿜어냈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정력으로 가득한 풍경에 이어 이번 전시에는 겨울 연작이 나왔다. 원시의 힘이 회복된 자연, 살아있는 자연은 겹겹이 쌓여가는 눈의 두께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르고 있다. 허뿌연 모노크롬의 화면은 여름의 왕성했던 목소리를 잦아들게 하고 예민한 화가의 청력은 홀홀히 눈에 싸여 자신을 숨기는 자연의 소리 죽임을 경청한다. 세계를 하나의 모노톤의 풍경으로 만드는 자연의 마술에 매료된 채로 말이다. 그리고 잠시 잦아든 생명을 감지하는 화가의 눈길은 더없이 겸손하다. 화면을 끊임없이 어루만지는 손질은 땅을 경외하는 자의 종교적 자기 헌신으로까지 느껴진다. ● 좀 특이한 실내 풍경화도 있다. 임동식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정물로서의 풍경이 그것이다. 자신이 그린 풍경화를 배경 삼아 죽 늘어놓고 친구와 나란히 앉은 방안의 정경은 그의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한 인물화이자, 생의 단계를 나타내는 알레고리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매혹적인 겨울 풍경들, 봄의 청춘과 장년기의 여름을 지나, 가을의 원숙함은 어느덧 겨울의 휴식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출품된 겨울 풍경은 실경이기에 앞서 휴지기에 들어선 생명체의 정중동의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임동식에게서 한동안 이 정중동의 풍경을 쉬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가 인생을 회고하기에는 아직은 추수할 것이 많을 것이므로.
충만함. 사유과 존재의 공간: 정보영 ● 정보영의 회화는 공간을 다룬다. 그리고 회화기법은 전통적이다. 회화가 공간 재현의 미술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작품이 새삼 신선하다고 느낀 감정이 더 놀라운 일이다. 처음 원근의 간명한 공간 도식에서 출발한 정보영의 실내풍경화는 충만한 존재와 숭고의 문제로 점차 상승해 왔다. 부재와 숭고를 통해 역설적으로 주체의 현존으로 되돌아오는 정보영의 공간 탐구의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진지하며,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고안한 건축적인 원근법은 공간의 수학적 도해이자 구조화된 풍경이었다. 단안의 관념적 시선으로만 포착되는 추상적 세계 인식이었다. 주체와 객체를 명확히 분리시키는 서구의 인식론이 원근법적 세계관의 좌표에서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은 ● 현대 철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정보영이 공간을 재현하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근대인들의,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명료함에 대한 호기심에서였다. ● 그러나 10여 년간 화가가 공간의 침투와 확장에 몰두하는 사이, 그녀의 시선은 재현 가능한 근대적 공간에서 부재의 증거로서의 공간이라는 주체의 현존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좋아하는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 장르화의 내부 공간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박스 공간을 넘어 인물의 심리와 관계의 동선에 따라 복잡해진 것처럼, 정보영의 공간 역시 진공의 도식에서 유기체적 생성의 공간으로 변화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공간의 구조를 명료하게 하였던 촛불은 심리적 스토리와 사유의 화학적 반응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 그 빛은 시간을 타고 공간을 흘러넘친다. 쏟아져 흐르는 물, 타오르다 잦아지는 연기, 느려지는 오르골의 선율, 점차 녹아내리는 촛농, 이 모든 것들은 공간의 파동을 암시하는 장치들이다. 시간의 오고 감을 따라 새벽 동이 멀리서 밝아오고, 창문으로 스며든 빛은 자리를 바꾸어가며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모노톤의 벽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얼룩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그 모든 시간의 흔적들에 존재의 기억이 끈끈하게 달라붙는데, 텅 빈 공간이 시간의 비늘들로 채워지면서 생성되는 기억들의 거주지가 된 것이다. ● 서양미술의 이미지 아카이브에 익숙한 정보영은 사유의 공간을 뽑아내는데 능숙하다. 내성적이며 성찰적인 작가가, 이제 일상과 숭고의 문제를 사유하기 위한 회화적 미장센으로 독일의 낭만주의 풍경을 선택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자연과 신의 숭고미를 탐미하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풍경화 패러디는 자못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산과 바다의 광활한 공간이 고작 브로콜리 송이들 위에 작은 미니어처를 세우고 거울로 확장시킨 손안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니 허탈한 느낌마저 준다. 정보영은 그 거울의 존재를 슬쩍 지우고 남긴 미니어처의 잔영을 통해 보여주기까지 한다. 미니어처의 조작을 통해 숭고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정보영의 태도는 이처럼 통쾌한 부분이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아름다움이란 크기와 질서에 기초하는 만큼 인간의 지각은 너무 큰 것, 너무 작은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통일성과 전체성을 벗어나는 광활한 스케일을 경계하였고, 작은 것이 순간적 지각으로 스쳐갈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정보영의 풍경화는 숭고미를 뽐내는 스케일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이며 조작 가능한 것인지 보여준다. 숭고와 초월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밀한 공간과 사소한 흔적에서도 추출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내면적 사유가 몸에 밴 정보영은 그런 점에서 매우 희귀한 젊은 고전주의자이다.
박소영: 발견된 자연, 그 역설적 풍경 ● 수석은 동양식 자연의 소유의 표현이다. 품에 들일 수 없는 산수의 도가적 판타지는 수석으로 채집되었다. 그 형태가 기이하거나 색채가 특이한 것이 수집의 대상이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 외형에 삼라만상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어 보는 이가 굳이 자연을 쫓아다니지 않더라도,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상상 속에서나마 그 자연을 정신으로 온전히 향유할 수 있은 것이다. 그야말로 완상물로서의 자연이다. 발견된 자연(돌)은 모양에 따라 깎은 받침위에 올려 지게 되는데, 적당한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되 손대지 않은 자연의 품격이 드러나는 것이 이러한 면에서 서양에서 픽처레스크 정원과 풍경화의 원리와 흡사하다. ● 18세기 영국의 귀족들은 자연 속에 고전적인 건축물을 가미시켜 고전의 이상이 투영된 정원 양식을 만들었다. 다듬되 인공의 티가 나지 않는 그림 같은 '자연스러운' 풍경. 사람 가까이 불려온 고대의 이상적인 자연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기품 있는 별장의 창틀을 통해 완상되었다. 자연과 인공이 역설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이 픽처레스크 풍경인 것처럼, 수석 역시 동양의 도가적 이상경과 유가적 완상의 욕구가 만나는 장소이다. 풍경화가 그렇듯이, 수석은 자연과 인공의 모순된 양식이라고 할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박소영의 역전된 수석 조각은 풍경화의 본질, 발견된 자연으로서의 풍경화의 본질을 명쾌하게 잡아내고 있다. 박소영은 장난스럽게도 우연히 발견한 수석 받침대를 보고, 그 틀에 따라 원래 있었던 수석의 형태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산수와 풍경이라는 것이 연하게 펼쳐진다고 해도, 그것은 보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이상적이라고 상상한 지도의 좌표 안에 자연을 구성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재현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더군다나 박소영은 실제 돌처럼 색을 입히거나 사실적인 장치를 할 생각 없이 석고로 떠낸 원래 그대로 하얀 수석을 전시하였다. 수석이 인공으로 제작된 자연이라는 형용모순의 상황을 더욱 분명하게 노출시키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자연은 물리적이고 지형적인 본래의 표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상이 자연의 캔버스에 투사되기 때문에 말이다. 이처럼 보는 이의 의지가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것은 자연이 재현되는 필수불가연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박소영이 제작한 석고-자연의 형태는 일견 산의 능선과 계곡을 흉내 내고 있지만, 점차 심상으로 새롭게 생성되는 판톰이자 고스트이다. 자연을 고스트로 만드는 그 상상력을, 박소영은 자연에 투사된 잡(雜) 생각이라고 하였다. 주체의 상상력을 잡(雜) 생각으로 일갈하는 작가의 태도는 너무 솔직하다. ● 유사자연으로서 상상력으로 자연 증식하는 고스트는 유성 형태의 매끄러운 금속 조각에서도 나타난다. 유선형의 이 별은 유기체이기도 하고 광물성 무기물이기도 하다. 전시장에 불시착한 별을 닮은 유성이 알 수 없는 간(間) 생명체의 오브제로 제시되었다면, 벽에 걸린 드로잉은 플라스틱으로 된 모조 이파리로 그 피부가 덮여있다. 자연이 이처럼 별과 녹색 불가사리, 금속과 유기물 사이를 특정한 아이덴티티 없이 넘나드는 것은 수석의 받침대가 그러했듯이 형태를 감싸는 용기로서의 표면, 그 껍질이 규정한 것이다. 회화이거나 조각이거나, 미술은 자연과 풍경을 담아내는 껍질이자 그릇일 뿐이라는 사실을 박소영의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 그러나 박소영의 작품은 논리적 개념의 투사이기에 앞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노동의 윤리적 미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소영은 석고를 떠 갈아내는 일, 형태에 이파리를 수고스럽게 붙여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조각의 매체적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의 본질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시작하나 그 마무리는 결국 작가의 손의 노동으로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노동이 형태를 만들고 형태가 미술을 만드는 일이라고 하였다. 미술은 그래서 그 자체로 삶의 형태가 아니겠는가.
임성수: 조작 가능한 위상학, 유쾌한 나의 동네 ● 임성수의 풍경, 아니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순환적 생활계이다. 고양이의 눈을 가진 고깔모자의 소년, 고양이, 개, 그리고 아이 등등,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펫들이 이뤄가는공학적 세계이다. 이전에 파편적으로 등장하였던 임성수의 식구들은 점차 가족을 이루고 하나의 생활계를 만들며 진화해나가고 있다. 만화적 도상으로 도해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리얼한 현실계의 투시도라 할 수 있다. ● 사실 이번에 출품한 임성수의 풍경은, 과거의 악몽과 같은 잔혹사나 그로테스크한 환상적 판타지의 세계와는 조금 다르다. 자족하는 생태계로서의 마을 시리즈는,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어두운 잔혹사를 보여주었던 2007년 Heartless Heart 전시의 밝은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캐니한 잔혹사는 기존의 재현질서를 거부하는 이질적이고 반항적인 몸짓으로 읽혀졌다. 기계사회와 산업화에 의한 불안한 삶의 일상사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까. 그렇다면 이번에 지향하는 것은 미래적 희망인가? ● 페미니티스 이론가 다나 헤러웨이(Donna Haraway, 1944- )는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에서 새로운 기계적 생명체가 인종과 계급, 혈연과 사회의 낡은 근본에 대한 집착에 대항하는 대안적 유토피아의 존재라고 환호하였다. 임성수의 고깔모자를 쓴 주인공은 유기체이자 몸이 자가변신하여 작동하는 자동 기계인간이다. 그의 캐릭터들은 동물과 식물과 무기물로 자유자재 변신하는 변종이며, 그가 상상하는 생활계는 동물의 다리에서 뿌리가 돋아나고 몸이 고목으로 변화하는 트랜스포머의 세계이다. 사실 이러한 변종의 세계는 보통의 성인의 상상력에서는 디스토피아의 악몽이다. 어쩌면 유전자 조작으로 다가올 끔직한 재앙을 상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 매뉴얼」시리즈에서 보듯 이 모든 변종과 종족적 경계 넘기의 만화적 세계는 임성수가 꿈꾸는 자족한 세계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 개별 작품속의 다이어그램은 전체 안에서 더 정교한 세계로 맞물리는데, 매운 고추의 열기로 떠오르는 기구와, 심장의 순환기구로 작동되는 배는 유기체의 완벽한 기계로의 전환한다. 비록 만화적이지만! 그리고 그들이 여행하는 공간은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제3의 자연, 공학과 자연의 중간지대인 테크-네이처의 스페이스이다. 그곳이 작가가 생성해가고 있는 사이버 생태계이다. 그런 점에서 임성수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한 다나 헤러웨이의 버전을 동화적으로 재해석한 쿨한 감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일정한 스토리 라인도 가능하다. 캐릭터에 성격도 부여할 수 있는데, 곰돌이와 고양이, 새는 그의 한 식구이자 때로 동형이명처럼 한 몸과 같은 피붙이들이다. 그의 이야기를 만드는 주연과 조역들의 세계는 어쩌면 세계의 축소판이자 자연의 모형이기도 하다. 이 모든 미니어처 공간의 구축은 임성수가 "비지니스 아트"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굳이 미술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나눈다면 임성수의 작품은 대중 브랜드 이미지이다. 그것은 작가가 애초에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임성수는 대학시절 전업 작가로서 비전을 갖지 못했던 때, 작가는 "고급미술로서의 회화의 영역에 이미 회의어린 시선을 보내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 그렇다면 임성수가 추구하는 것이 팩토리형 아트 비즈니스인가? 그것은 기대되는 바이다. 임성수가 펼쳐놓은 세계가 아직은 폐쇄된 순환계라 그 서사적 스토리가 펼쳐질 충분히 여백이 있는지 염려되기는 하지만, 그의 악마적 혹은 유토피아의 세상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도전장을 던질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한석현: 기념비적 상추, 자연에 대한 진혼곡. ● 한석현의 상추는 신선(新鮮)하다. 혹은 신성(神聖)하다. 기념비적으로 확대된 견고한 상추의 초상은, 쉬 사그라지는 연약한 '그린(green)'에 대한 장난스러운 패러디이자 애도의 메모리알이다. 사실 우리에게 자연은 보는 대상도 아니고 사유의 공간도 아니며, 접신의 원초도 아니다. 그냥 먹고 싸는 생태 순환의 한 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먹고 잘 살자는, 말 그대로, '그린(green)' 모토가 어떤 ● 정치적 이념보다 선동적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무공해 건강식품에서 유기농 상품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그린"의 물신에는 자본주의적 망상들이 파고들고 있다. 이것이 젊은 작가 한석현이 플라스틱으로, 혹은 알루미늄으로 이렇게 저렇게 상추를 진혼하는 제사를 계속 지내야하는 이유이다. ● 한석현은 2010년 경기창작센터 오픈 스튜디오에서 녹색 물건들을 내놓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도시 건물들 사이에서만 살아온 나는 이렇게 풍경이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볼 기회가 없었다. 경치를 빌려와 스튜디오와 연계된 정원을 만들어 손님을 초대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녹색 물건들은 자연을 치환하는 대리물이다. 이를 통해 녹색을 물신화하는 현대사회를 우습게 비꼴 작정이었다. 그의 작전에 따르면 그가 파고들 지점은 바로 물신화된 가짜 녹색의 아우라를 깨트리는 일이었다. ● 그린의 아우라는 정말 대단해서, 알루미늄과 합성수지의 가벼운, 언뜻 버라이어티한 색채의 평성과 재질감이 색다른 세련미를 주기도 한다. 사실 그가 사진으로 포착한 초록빛 플라스틱 용품들은 제법 그 품격마저 느껴진다. 그린 생활용품들은 짐짓 품위 있는 정물의 형태로 배열되었다. 고전적인 느낌의 바로크 정물화의 구성과 배치를 그대로 따른 그린 플라스틱 정물들은, 원전과는 아주 다른 의미의 아우라를 발현한다. 역설의 아우라, 인생은 덧없으나 플라스틱은 영원하다! 그 영구성은 금색의 번쩍이는 사진의 틀에 의해 다시 한 번 시니컬하게 강조된다. ● 썩어 사멸하는 생명의 세계보다도 영생의 반열에 놓인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위장된 디스토피아지만, 이 플라스틱 생태계는 이미 우리의 자연의 양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래 생태계에 대한 끔직한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은 우리를 그린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건강과 위생, 의학의 과학적 형태를 띠고 우리를 전방위로 압박한다. 녹색 물신의 위세는 점차 커질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머니를 털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근대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떠나오면서 풍경을 발견했듯이,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들은 생태계를 파헤친 이후에야 초록색의 신성을 새삼 발견하고 그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 정치적으로도 녹색당이 진보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그린'은 이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빛이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그린 상품들이 자연의 가짜 성전이 되었다면, 순교한 에콜로지는 알루미늄 상추로 환생한다. 그리고 한석현은 그 자연의 소멸의 진혼가를 짐짓 유쾌하게 반복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물신화된 그린 이미지가 사이비-네이처라는 사실이다. 한석현이 가볍게? 제시하는 자연은 바로 이러한 무거운! 경제·생태학의 현실계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리얼리스트이다.
박계훈: 강박과 관조, 자연의 역설 ● 박계훈은 철 소조에서 바느질로 그리고 종이로 그 재료나 방법을 바꾸어 작업해왔다. 이러한 전환을 여성주의적인 반 모더니즘 양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오독이다. 오히려 한 사유하는 예술가가 물성과 공간을 넘어 주체의 진부함과 우울함, 삶의 노동과 고통의 본질에 맞서보려는 체험의 노정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박계훈의 각기 다른 작업 시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는 '콩나물'이다. 무공해 콩나물, 유명 식품회사의 브랜드가 붙은 다소 고가의 '콩나물'도 있지만, 콩나물은 그냥 콩나물이다. 그러나 박계훈에게 콩나물은 일상성과 대중성을 뛰어넘는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몸과 사유와 감각이 교차하는 화두가 된 놀라운 콩.나.물이다. 시시한 콩나물의 세계의 열쇠가 되었듯, 그 재료도 삼베에서 나무로, 종이로 이어졌다. 그리고 강박적인 노동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시간으로 길러낸 삼베 콩나물과 나무젓가락을 깎아 기른 콩나물들. 수공예의 장인적 반복을 이처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작가는 드물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강박적 압박과 고통을 동반한다. 사실 매달린 콩나물과 기립한 콩나물들은 처형과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날카로운 핀으로 고정시키는 설치는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짧게 찾아드는 통증의 감각은 작품 전체에 스며있는 반복의 늘어진 시간과 무정형의 우울을 극적으로 가시화한 것이었는데, 시간을 자르고, 시간을 꿰매는, 느리게 진행되는 반복의 노동은 우울과 상실의 감정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이제 작가 박계훈은 정지와 휴식의 국면을 맞이한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멜랑콜리를 털어버리기 위한 관조가 요청되었는지도 모른다. 장지에 작은 싹을 오려내면서도 난을 치듯이 콩나물을 치며, 종이에 산수의 풍경을 슬쩍 그려 넣게 되었으니 말이다. 종이 위로 떠오르는 영상은 대개 항아리이거나 나비이거나 시원스런 아름드리나무이다. 몰입적인 작업 가운데 작가의 심상에서 떠오른 정의 풍경들이다. ● 종이를 잘라내되 무심한 반복의 작업으로 힘을 덜어내고, 화면에서 작가의 흔적을 비워낸다. 화면의 밀도는 때로는 성기게 때로는 빽빽하게 무작위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절한다. 무엇보다 강박적으로 보이는 작업을 상쇄시키는 힘은 장지가 가지는 넉넉한 탄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짱짱한 종이에 박계훈은 사군자와 산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공예적인 집착이 유가적 여유로 풀어지는 순간이다. 관객에게 전이된 반복 강박의 밀도를 풀어주는 아량을 베푼다. ● 그러나 미술가가 장인적 노동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성찰적 과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두 예술의 세계를 동시에 다 보여주는 전략을 택한 것 같다. 박계훈은 장인과 예술가의 일을 그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예술가와 장인은 원래 미술과 공예라는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다. 꿰매고 자르는 일이 장인 중인들의 업이었다면, 난을 치고 산수를 풍유하는 세계는 선비 문인들의 특권이었던 것으로 사실 이 구조는 계급적이기까지 하다. 미술사적으로 보더라도 고행적인 몸의 노동과 유유자적하는 정신적 유희의 세계가 한사람의 미술에서 만났던 예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미적 세계에 접근하는 작가의 예술적 포부를 완성시키는 것은 그의 소박한 손이다. 콩나물을 삼베와 나무젓가락으로 깎으며, 매일의 노동에서 질량적인 양의 미술이 쌓여가는 것이 뿌듯하다는 작가는, 동시에 정신적 초월의 풍경을 그려낸다. 손으로 빚어지는 밀도 높은 관조의 풍경. 종이에 돋아난 생명의 싹과 풍경을 음미하며 그 안에 경과 정의 심상을 투사해본다. 고마운 휴식이다. 공간/space, 풍경/landscape, 자연/nature 그리고 나 ● 스페이스몸에서 기획한 야심찬 전시는, 물신으로서의 신(神)수, 산수(山水), 심경(心境)과 기계적 토폴로지(topology), 사회적 에콜로지(ecology)가 골고루 펼쳐진 풍경의 향연이다. 몰입과 관조가 동시에 제시되며, 숭고와 버내큘러(현실적인 시시함)가 교차하고 있다. 풍경이 내면이 되고 무기물이 유기체가 되는 유사 자연의 순환이 미술관 안에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차분하면서도 치열한 공간이다. ■ 김미정
Vol.20111121e | 산수정경 山水情景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