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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123_수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공아트스페이스Gong ART Space
관람시간 / 11:00am~06:00pm
공아트스페이스 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31번지 Tel. +82.2.735.9938 www.gongartspace.com
우화(寓話)의 반전 놀이 ● 구두를 신은 코끼리들이 사막을 연상시키는 공간 속에서 이동하고 있다. 길도 없고 표지판도 없고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지만 코끼리들은 계속 이동한다. 길고 긴 여정이기에 일부는 무리에서 낙오되고 일부는 스스로 이탈한다. 홀로 남은 코끼리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편안하지 않은 모습이며 지쳐서 울고 있다. 먹먹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면 선글라스(sunglass)를 쓴 코끼리가 낙하산에 의지해 하늘을 날고 있다. 사막을 벗어나 자유롭게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즐기는 코끼리는 예상하지 못한 반전(reversal)이다. 활공비행하는 코끼리는 힘겹게 이동하는 땅 위의 코끼리들과 대비되며 허탈한 웃음을 유발한다. 구두를 신은 채 걷거나 하늘을 나는 코끼리를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정윤이 만들어내는 우화(寓話, fable)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결과물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이번 전시에서 이정윤은 코끼리와 구두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구두를 신은 의인화(anthropomorphism)된 코끼리들이 등장하는 드로잉(drawing) 연작과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된 거대한 공기조형물은 현대 도시인들의 복잡다단한 삶과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 구두를 신은 코끼리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와 규범에 동조(conformity)하는 평범한 현대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코끼리는 실제로 강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복잡한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을 은유하는 훌륭한 표상(表象)이 된다. 한 곳에 정주(定住)하지 않는 코끼리의 속성 역시 이동을 넘어 노마디즘(nomadism)이 부상하는 현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과 닮아있다. 한편 구두는 독립되어 브론즈(bronze)로도 만들어졌는데 무게 때문에 신고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한 구두들은 인간을 옭아매는 사회적 관례를 상징한다. 이정윤이 소재로 즐겨 사용하는 하이힐은 뾰족한 기둥이 몸체를 지지(支持)해주는 형태로 날카로운 압정 혹은 못과 닮아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공격성을 갖는다. 이것은 자본과 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상징하기에 유용하다.
정치, 경제, 과학, 철학, 문화, 예술 등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인간에게 정신적 ·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제공한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들을 충실히 수행하며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energy)를 소모한다. 희생하면 할수록 더 큰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과 환상은 슈퍼맨(superman), 슈퍼우먼(superwoman)이 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약속된 이상향(理想鄕)에 가까워질수록 공허만이 가득하며 종국에는 무의미한 소모와 욕망의 쳇바퀴만 반복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방향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정윤의 드로잉 속 코끼리들이 목적지도 모른 채 힘든 여정을 지속하는 것처럼 표류(漂流)한다. 엉덩이에 슈퍼맨의 마크(mark)가 새겨진 채 울고 있거나 화장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코끼리들은 영화 속의 영웅처럼 되기를 강요받는 슬프고 지친 길을 잃은 범인(凡人)의 모습 그대로이다. ● 이정윤은 이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화 형식을 선택했다. 구두를 신은 코끼리의 모습은 관객에게 유쾌함과 익살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그 낯선 조합은 설레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첫인상 때문에 이정윤의 작품은 애니메이션(animation)이나 동화를 차용한 팝 아트(pop art)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친근한 이솝 우화(Aesop's Fables)가 인간의 삶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리한 칼날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이정윤의 작품은 삶의 갈피를 찾지 못하고 우주미아(宇宙迷兒)처럼 부유(浮遊)하는 현대인의 아픈 현실을 들춰낸다.
이정윤에게 구두는 우화 형식을 강조하고 현대인들의 힘든 여정을 극대화시키는 중요한 소품이다. 무거운 동물을 대표하는 코끼리가 구두의 얇은 굽에 의지해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모습은 사회 속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는 현대인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구두-신발-은 인간의 가장 미천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발을 가려주는 것이자 타인과 함께 하는 공적(公的) 공간에서의 필수품이다. 특히 작가가 선택한 옥스퍼드 슈즈(o×ford shoes)와 하이힐(high-heeled shoes)은 격식을 차린 복장에 어울리는 것이다. 마치 유니폼(uniform)을 입은 듯, 같은 구두를 신고 같은 방향을 향하는 코끼리 무리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훈육(訓育)되고 통제되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投影)한다. 한편 코끼리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고 불편해 보이는 구두는 전족(纏足)을 연상시킨다. 선천적인 몸의 형태를 고의적으로 변형시키는 전족은 규율과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인간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정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이힐은 결코 매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다. 오늘날 여성들이 즐겨 신는 하이힐은 전족과 자주 비교되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편함과 통증을 유발하고 발의 형태가 변하며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둘의 공통된 부작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의 기준과 유행, 문화 규범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이처럼 작가는 코끼리와 구두의 조합을 통해 사회가 옳다고 정해 놓은 길을 가고 사회가 좋은 것이라 말하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외면에서부터 내면까지 사회적 틀에 끼워 맞추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만약 이정윤의 우화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풍자(satire)와 유머(humor)가 함께 하는 통쾌한 반전, 약자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휴머니즘(humanism)은 우화의 필수 조건이다. 이제 이정윤의 코끼리는 가벼운 풍선이 되어 영화 속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아오르고 무리에서 이탈한다. 사실 코끼리는 결코 무리를 떠나지 않는다. 무리 이탈은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위험한 도전이다. 하늘을 나는 코끼리는 주류도 아니고 보편성을 갖지도 못하지만 그 어떤 코끼리보다 자유를 만끽하며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경험한다. 자신 앞에서 이동하는 코끼리의 뒷모습만 보는 코끼리에게 반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무리를 이탈해 하늘을 나는 코끼리는 자신을 괴롭히던 구두의 통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시야를 확장시킨다. 일반적으로 반전은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미하일 에를러(Michael Erler)가 말했듯 반전이 주는 충격 효과를 통해 인간은 무지(無知)에서 지(知)의 단계로 변천한다. 통념(通念)을 바탕으로 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함으로써 고정관념의 탈피와 의식의 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벼워진 코끼리는 인간의 삶이 한없이 무거운 것이지만 한없이 가볍기도 한 것이라는 역설(逆說)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역설을 통해 이정윤은 '누군가에게는 무겁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가벼운 것이 인생이다. 모두 같은 길을 가야한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생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칙이 어디 있는가?'라는 메시지(message)를 전한다. ● 하늘을 나는 코끼리와 땅 위를 이동하는 코끼리는 각각 노마디즘과 노마디즘을 가장한 이주(移住)를 보여준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동이 쉬워졌고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에 걸맞게 전(全) 지구의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엄밀히 말해 현대인들의 이동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유목이 아니라 사회의 틀과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는 껍질뿐인 유목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이주민(移住民)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다. 노마디즘이 의미하는 이동은 단순히 장소와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사유(思惟)의 자유로운 이동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진정한 유목민(遊牧民)은 국가로 대표되는 억압적인 코드(code)가 인간의 삶을 일정한 방식으로 고정시키고 구속하는 것을 허물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을 제시하는 존재이다. 또한 스스로를 탈영토화(脫領土化)시켜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의무와 권리를 강요하는 권력으로부터 이탈한다. 홀로 활공비행하는 코끼리가 그렇듯 유목민은 자발적으로 무리에서 이탈하여 자유를 누리는 고독을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임을 확인한다.
이정윤은 해피 엔딩(happy ending)이 기대되는 순간에 그것을 신으면 한 걸음도 이동할 수 없는 브론즈 구두를 꺼내놓는다. 또 한 번의 반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코끼리의 이탈을 위해 사용한 도구가 언젠가는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낙하산이라는 데에서 이미 반전은 예고되어 있었다. 또한 코끼리 풍선은 작은 구멍으로도 바람이 빠져 추락할 수 있으며 작은 충격에도 터져서 사라질 수 있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이중 반전은 현대인이 꿈꾸는 노마디즘의 행로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자유와 이탈을 꿈꿔도 사회의 코드들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설령 시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화의 마지막에는 늘 신중한 지혜를 담은 경고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정윤의 우화가 만들어내는 반전 놀이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와 인습에 적응하여 살아간다는 것과 그것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우화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 우리는 어느새 자기 자신에 대해, 인간과 사회에 대해 깊어진 통찰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문정
Vol.20111120e | 이정윤展 / LEEJUNGYOON / 李姃潤 / installation.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