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118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프랑스 참여작가 / Angelique Lefevre_Barbara Navi_Lily Masson Marine Joatton_Sophie Sainrapt_Sylvie Tual_Younmi BYUN(변연미) 한국 참여작가 / 강부언_김남수_김순임_김주연 박형렬_빈우혁_설기효_정호상_조인호_차기율
주최 / 쿤스트독(서울) 주관 / 갤러리89(파리)_쿤스트독(서울) 기획/진행 / 일레아나 코르네아(Illeana Cornea)_김숙경(Kim, Sook-Kyung)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파리 은화
갤러리89 Galerie 89(Viaduc des Arts) 89 Av.Daumesnil. 75012 Paris France Tel. +06.0809.9033
프로젝트『Seoul-Paris, What do You think about Nature?』는 국제미술계와의 상호연계를 통한 한국미술의 스펙트럼 확장에 그 목적이 있다. 이는 쿤스트독이 내부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국제 네트워크의 활성화와 맞닿아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미술의 진행반경에 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실천적 방안이다. 국제미술계에서 경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사이버 네트워크의 확장과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발전에 의해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갖는 제약이나 불편은 상당히 감소되었고 정보의 이동 역시 시간차가 미미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만 통용되던 문화주의가 세대와 지역을 넘나드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서는 여전히 패권은 작용하며 그 예를 국제규모의 전시구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수구적 패권에 대한 상쇄적 태도에 관한 고찰이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 즉 미술은 여전히 선택적 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선택적 영역을 능동적으로 확장하고, 한국미술이 국제미술계의 보편적 기호로써의 미술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좀 더 일상적인 범주 속에서 드러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제미술계와의 빈번한 접촉, 교류를 통한 네트워크의 확장과, 공동의 관점에 의한 동시대, 동 영역의 미술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내야하며 이러한 실천이 한국의 미술이 국제미술계에서 일정한 역할과 성과를 얻는 효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 자연과 정체성 ● 프로젝트 주제제안: Ileana Cornea (프랑스/ 미술비평가) 2012년은 세계 자연의 해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관성 있는 계획이 될 전시 하나를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연은 지리적으로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유럽과 한국의 문화 사이에서 공통점을 제기합니다. : 공자가 썼듯이, «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형제들이 되지만, 교육을 통해서는 이방인들로 남을 뿐입니다. » ● 자연은 문화적으로 구축되는가? ● 동양과 서구의 조형예술가들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쿤스트독은 개관 이후부터 국제교류활성화에 집중해 왔다. 현재 독일 뒤셀도르프에 소재하고 있는 비영리 전시관인 Plan-d, 그리고 라이프치히의 공공전시관인 Universal Cube와 정례적인 프로그램 및 전시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교류 프로젝트는 전시기획자이자 미술평론가인 Ileana Cornea와 협력해 한국과 프랑스의 동시대미술의 현황을 제시하는 표본적 사례가 될 것이다. ■ 홍순환
자연 정체성: 계보와 후손들 ● 1895년, 노르웨이에서 모네는 그의 의붓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이곳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찾았단다. 급류 속에 놓인 작은 섬들, 눈으로 뒤덮인 풍경 뒤로 보이는 산 ... 마치 후지산을 연상케 하는구나.』 그는 호쿠사이의 나라에 가본적은 없지만, 일본 판화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극동이란 무엇일까? 『 부유하는 세계 』? 그곳에서는 자연을 다른 시선으로 보는가? 그렇다면 시선은 문화적 차이일까? ● 선 ● Joatton의 그림은 자연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화폭을 누리며 압도하는 야생성, 그 자체다. 작가는 종이를 채우지 않은 채 재빠르게 표기하고 휘갈긴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계속 작업을 이어간다. 투명한 파랑은 물이 주는 신선함을, 초록은 땅 위에 자라는 풀을, 노랑은 태양의 광선을 환기시키지만, 어느 곳에서도 바다나 풀밭, 태양은 볼 수 없다. 원초적인 색상과 풍부한 선들 사이에서 생존본능으로 달아오른 동물과 그 파편들이 서로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고 토해낸다. 웅덩이처럼 고인 색상과 유동적 존재들은 어두운 선을 만나 조심스럽게 혹은 솔직하게 자유를 품고, 발산한다. 여기서 낡은 야수파적 감성은 과거일 뿐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은 타협하지 않는 맑은 정신으로 남고자 하는 법이다. 존재의 내면을 상징하던 야수파적 색체는 그저 데생을 보완해주는 회화적인 격렬함의 표현으로 변모하였다. 마티스가 원했던 것처럼, 한때는 호의적이고 표면적이었던 자연에 대한 보완적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Joatton은 마티스의 제멋대로인 증손녀쯤 되겠다. ● 얼룩 ● 또 한 명의 자연주의-예술가인 Sylvie Tual의 작품을 살펴보자. 그녀의 작품은 앞선 자연주의 동료와 비슷한 색채를 공유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는 다른 시도들을 모색한다. 그녀는 얼룩을 정돈하고, 옮기고, 인간의 형태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위에 점을 찍고, 쉼표를 찍고, 이야기를 만든다. 앞선 동료보다는 여유 있는 리듬으로, 분노하기보다는 의심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점묘법을 사용하는 그녀에게 형상은 발견되거나 자연스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천에서 귀나 코의 형상들을 발견하는 그녀의 모습은 니콜라이 고골를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즐기며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그녀는, 로마인과 브르타뉴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이 주는 예언적 메시지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풍경 ● Lily Masson의 작업을 보면 그녀가 막스 에른스트와 조르주 상드를 친부모로 둔 것이 아닐까 싶다. 에른스트와 상드 모두 풍경화를 좋아하여 심지어 그들만의 새로운 그리기 기술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서로 자신만의 독특한 테크닉을 사용하였는데, 에른스트는 그림의 바탕이 되는 소재(素材)를 문질러 자연을 캔버스 안으로 불러들였다. 한편 상드는 얼룩을 고쳐 그리는 작업하였는데,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수상(樹狀)돌기' 혹은 '밀어내기를 통한 수채화'라 명명하였다. Lily Masson은 콜라주를 하던 어느 날, 젖은 종이 위에 놓인 투명한 판이 흥미로운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판과 물기가 자아내는 대리석 무늬를 활용하여 모랫바닥 같은 건조한 효과를 내었고, 기이하게도 새를 닮은 돌의 형상, 문장(紋章) 속 인물들과 함께 그리스의 바닷가 풍경 등의 형상이 그 뒤를 이어 더해졌다. 동굴과 폭포, 달로 가득 찬 그림은 하나의 초현실적인 꿈이다. ● 화면 ● 컴퓨터나 텔레비전 브라운관 같은 카메라 렌즈를 투과한 자연은 수많은 작은 조각들로 흩뿌려진다. Barbara Navi는 이런 수많은 작은 풍경들 속 마을과 사람들에서 작업의 재료를 얻는다. 그녀는 캔버스 위에 추억을 가늠하고, 경험을 형상화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을 실현시키며, 긴장과 불안의 감정을 재현해내는 열린 공간을 만든다. 환각적인 이미지와 형상화된 작은 아이디어의 조각들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발견하게 되고, 상대적인크기의 척도 또한 끊임없이 뒤바뀌는 그녀의 그림 속 풍경은 정신적인 모습의 자연이다.
몸 ● 한낮의 햇빛 아래 놓인 투명한 두개골과 정물화는 Angelique Lefevre의 조각 작품, 바니타스 시리즈를 한층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가벼운 한숨 또는 금새 사라져버리는 증기처럼 그녀의 조각들은 공간 속의 그림 같다. 작업의 주재료는 얇은 모슬린 천으로 굉장히 얇은 면 섬유의 하나이다. 이렇게 조각과 만난 오뜨 꾸뛰르의 기술은 공간을 자유로이 다루며 봉재선을 따라 비어있음과 채워짐, 삶과 죽음을 표현해 낸다.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꽃 또는 끔찍한 바이러스 등 재현된 조각들은 특유의 가상적, 비물질적인 특성으로 공간을 홀린다. 표면 넘어 보여지는 비어있는 내부의 모습에선 오싹함마저 느낀다. 작품은 전통적인 유럽의 바니타스 모양새를 띄고 있지만, 인간의 비 영속성에 대한 암시적 상징들의 뿌리는 현대미술 안에 자리하고 있다. 영혼은 그 육체적 껍데기로부터 도망쳤고, 신은 자신의 신전과 교회를 저버렸다. 해골 무늬를 티셔츠와 가방, 장신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그들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있다. ● 전설 ● 암소 하토르는 커다란 유방을 드러내 보이고, 재칼의 머리를 한 아누비스는 으스대며 지상의 기쁨을 누린다. 여기서 그들의 모델이자 조상인 이집트 신에게 느낄 수 있는 위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살아있는 색상, 넘치는 유머와 성적인 표현으로 가득 한 이들의 의인화된 몸은 Sophie Sainrapt 특유의 검은 선 사이로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녀의 '신화 속 동물들'은 시간의 구석진 곳으로부터 탄생한다. 이들과 함께 고대 우화는 그들의 진실과 거짓을 지적한다. 사람과 동물 모두 성스러운 의식의 참여자였던 현대 문명의 고대 신앙적 바탕 속 잔해들은 우리를 귀찮게 할 뿐이지만, 예술가들은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열심히 진실을 파헤친다. ● 자연 그리고 정체성? ● 자연과 정체성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변연미의 검은 숲은 존경과 동시에 관조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하나의 묶음으로 뭉쳐진 이파리들, 화면 가득 확대된 디테일과 화면 뒤편에서 등장하는 갑작스런 빛의 출현, 역동적인 선 등은 극동의 미술, 또는 고흐, 모네, 나비 파, 보들레르 등을 현혹시킨 일본 판화에서 찾을 수 특징들이다. 이런 동양적 전통을 이어받은 변연미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터무니없이 크게 그리거나, 색다른 재료의 사용, 또는 모델의 극적인 묘사를 하는 등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 가운데 흐리고 있는 우울한 정서에서 서방의 영향이 느껴진다. ■ Ileana Cornea
우리는 왜 자연을 이야기하는가?-한국의 자연관 ● "자연"은 한국의 정신과 생활문화 기반에 깊숙이 자리한 총체적 개념이다. 이는 자연의 생태학적 원리와 이치가 인간의 삶과 근원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자연은 인간이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 세계의 윤리를 지시하는 범-철학적, 문화적 성격을 갖는다. 자연의 구조와 생명력은 인간을 훈육(訓育)하는 지표로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규범인 것이다. 중국의 현대미학자 장파(張法)는 자연을 "끈임 없이 변화하며 동시에 변화하는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생명의 영혼과 힘을 지닌 자연은 사물을 생성하며, 생멸과 순환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사물은 치유와 자생력을 가지며, 새로운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이어진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이러한- 시간 속에 존재하며 인간 역시 그러하다."라는 논지를 통해 세계를 지지하는 생명적 에너지의 근원이 자연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장파의 견해에서 주지할 점은 자연개념이 철학과 종교의 형이상학적 범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방식과 문화유형을 포괄하는 인간의 구체적 현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국, 한국, 일본 및 아시아 전역의 자연주의는 첨단의 과학기술과 상업자본주의가 삶의 형식을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관념적 특성을 지닌다. ● 자연과의 조화(調和)와 삶의 치유 ● 일반적으로 서양의 예술론이 모방, 상상, 직관을 핵심으로 하는 세 가지의 상이한 창작과정을 통해 발전하였다면 동양은 '자연의 조화를 본받는다'는 보편적 원칙 아래 그 조화를 표현해내는 창작론으로 일괄한다. 서로 잘 어우러진다는 조화의 뜻은 예술관에 이르러 '다른 것들마저도 용납한다'는 포용의 강한 의미로 심화된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화해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표현방식의 차이를 보이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예술가의 사고와 미적 판단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음악, 문학, 미술과 같은 예술의 고전적 장르뿐 만아니라 매체 혹은 다원예술 등 토탈 아트의 영역에서도 자연은 동서의 예술관을 구분하는 문화적 개념인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교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번 전시는 자연에 관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해석을 관찰한다. 7인의 프랑스작가와 회화와 사진, 설치와 미디어 분야에서 10명의 한국작가가 그들의 세계가 지닌 자연관을 보여준다. 총체적 자연주의가 본질적 특성인 한국의 전통미술에서 회화는 그 무엇보다도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전제로 한다. 이는 경치를 표현함에 있어 사실적 묘사가 아닌 관찰을 통한 심상을 그리는 것으로, 한국의 산수화는 미술문화의 전통과 현대를 포괄하는 중요한 장르 중의 하나이다. 먹을 주재료로 작업하는 조인호는 한국의 실재 자연풍경을 그린다.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산수화의 이동시점방식은 그의 화면에 이르러 극적인 역동성을 형성하고 자연의 초월적 시간개념을 강한 시각적 에너지로 치환한다. 그의 그림에서 산은 '움직이는' 실체이며, 자연은 살아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생명성은 강부언의 회화에서 삶의 일상을 구현하는 정신적 개념으로 작용한다. 그는 제주도의 자연경관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것을 수묵화를 통해 표현한다. 그의 회화는 자연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맑은 기운'을 형상화하려는 작업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연의 진솔함과 '건강한 현장성'이 간결하면서 힘 있는 수묵의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한국 전통회화의 본질과 아울러 "자연"은 현대미술에서도 많은 예술가의 개성과 미적 태도를 형성하는 초석이 된다. 정치와 자본의 메커니즘이 산출한 허위적 현실과 부조리에 종속된 현대인의 삶과 이에 따른 문제의식은 오늘날 예술가들이 묻는 중요한 주제이다. 신세대 작가 빈우혁, 정호상, 설기효는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사고의 원형을 자연에서 찾는다. 빈우혁과 정호상은 권력의 지배논리 아래 현대사회의 인간관계가 산출하는 사건과 감정의 충돌을 자연의 장소 혹은 자연적 이치에 대입, 그 안에서 삶이 지닌 소외와 모순을 해갈한다. 그들의 회화에서 보여지는 자연적 풍경은 소재로서의 대상이 아닌 사고의 정신작용이 이루어지는 비가시적 추상공간의 의미를 띤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화해관을 통한 삶의 치유방식은 사람의 맥박을 한국전통음악의 5음계로 변환한 설기효의 소리-설치작업에서 작가 개인의 구체적 표현형식으로 전환된다. 인간의 욕망과 현대사회의 속성을 사고함에 있어 김남수와 박형렬은 사진을 매개로 그 역사적 현실과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자연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와 이 과정을 기록한 박형렬의 작업은 인간이 자연과 조우하여 교감하는 것으로, 행위에서 오는 놀이적 성격은 자연을 일상의 범주로 가져오는 유연성을 보인다. 의사전달에 있어 사진매체가 갖는 현실성은 한국의 지석묘인 고인돌과 대도시풍경을 병치시킨 김남수의 작업에서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 놓인 인간의 역사를 극적 상황으로 드러낸다. 자연에 회귀하는 인간의 삶과 사회집단의 주체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문명의 실체를 이미지와 빛의 강한 대비를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예술가들이 주목하는 자연과 문명의 상생관계에 관한 해석은 김주연, 김순임, 차기율의 자연주의적 설치미술이 지닌 미적 개념과 성격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자연의 생명력과 순환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그들의 세계관은 생태학적, 생물학적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구체적 작업방식을 전제로 개별적 특성을 이룬다. 인간의 기억과 회상을 반추하는 선험적 공간으로서 자연의 장소를 선택한 김순임의 작업과 이질적 공간 안에서 식물을 배양하여 문명화된 삶과 인간의 존재성을 질문하는 김주연의 설치, 자연에서 채집된 사물들이 작가의 자의적 조형언어를 통해 재창조되는 차기율의 작업은 현대문명사회에 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의식(意識)이 자연적 원리가 상징하는 화해관에 닿아 있음을 피력하는 것으로, 이는 작가 개인의 심미관과 더불어 자연과 문명의 융화가 예술의 제도적, 문화적 현실영역을 확장해 나간다는 예술가의 대사회적 접근태도와 미래지향적 실천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연"은 자본과 정치권력이 산출한 물질문화에 관한 인간의 사고를 부정이 아닌 삶의 모든 대립과 이질적 현상으로부터 정제된 의식의 차원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 김숙경
Vol.20111119g | Seoul-Paris, What do You think about Nature?-쿤스트독 프로젝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