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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주말, 공휴일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산갤러리 서울 DOOSAN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 두산아트센터 1층 Tel. +82.2.708.5050 www.doosangallery.com
모두 다, 또는 아무것도 아닌 모두 다, 또는 아무것도 아닌 ● 백현진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잘 하는, 반쯤은 행운에 싸인 인물이다. 그러나 대중적 유명세를 치르는, 잘 하고 있는 것에 편승해서 다른 것도 어부지리로 얻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는 하루에 10시간 넘게, 어떤 화가보다 열심히 그린다. 홍대보다는 홍대 앞과 더 친숙했던 그는 미술계나 학교라는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이란 것을 해왔으며, 학교와의 거리가 독특한 작품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이지만, 회화의 기본문법을 벗어나 아이가 처음 필기구를 쥐고는 마음대로 그려대는 분위기가 있다. 굳이 미술사에서 전범을 찾는다면 자동기술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 '61분의 1(1/61)'처럼, 가는 샤프 펜슬로 지진계 같이 몸과 마음의 운동을 베껴낸 형식의 작품은 오래 전부터 해왔던 그의 스타일이다. 그는 빈 캔버스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어떤 것을 그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계획도 목적도 없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과정들에 몸을 싣는다. ● 유화물감과 오브제 등으로 이루어진, 거칠 것 없이 그려진 것들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확정할 수 없는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연과 불연속, 그리고 도약의 장, 요컨대 난장(亂場)이 된다. 이러한 무질서한 과정 속의 선과 색, 그리고 첨가된 사물들이 일정 정도의 시공간적 간격을 띄고 보면, 꼭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한 느낌도 신기하다. 그의 작업에서 복잡함과 단순함, 그리기와 지우기, 모두 다와 아무것도 아닌, 이끔과 이끌림 같은 대립 항은 모순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연은 필연으로, 허구는 사실임직함으로 끝없이 전환 또는 변경되며, 그 역도 성립된다. 자유로운 화풍 속에 작품을 이루는 정조는 사소함부터 비장함까지 다양한 계열을 이룬다. 스스로를 검열하지는 않지만, 그의 청년기 작품들을 온통 물들였던 분노와 냉소만큼은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가 진선미의 조화 같은 것으로 회귀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요즘 작품은 그가 여러 시간을 통과한 흔적임과 동시에, 예술이란 것이 결국은 부정이 아닌, 긍정적 태도로부터 생성된다는 기본적인 사실로부터 온다. 작품들은 명확한 형상과 형식을 갖추지 않았지만, 어떤 캐릭터와 현상 주변을 맴돈다. 작품제목은 그림을 다 그린 후, 생각나는 대로 짓되, 따로 적어놓지 않아도 까먹지 않을 만큼 형상과 밀착성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13개의 작품(그는 work이 아닌 piece 임을 강조한다)과 바닥에 던져놓은 작은 작품을 보너스처럼 덧붙였다. 전시장 한 켠의 작은 공간에는 '0/61먹구름'과 '1/61'처럼 작고 흐릿한 작품들을 모았다.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정방형의 캔버스에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화면 중앙에 박혀있는 일종의 초상이다. 그런데 그가 초상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현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셀카'라는 것에서 왔다. ● 현대의 대중은 누구나 거울을 보듯이 흔해 빠진 카메라를 본다. 이 캐릭터들은 아이가 그린 것 같은, 눈 코 입을 표시하는 간단한 선과 색들로 이루어져 있고, 자화상도 그 누구의 초상도 아니지만, 현대적인 인물상이라 할 만한 특징과 요소를 가진다. 대부분이 도시인인 현대인은 수많은 얼굴을 만난다. 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지만, 사회적 생존을 위해 타인의 얼굴을 잘 살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백현진이 본 대도시 사람들은 많이 찌들어있다. 가로 10터가 넘는 대작 '수련자(water lillies people)'에는 그가 스쳐 지나가면서 본 군상들이 집결되어 있다. 처음부터 대작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 독립되어 그려진 몇 개의 조각(piece)들이 결합된 것이다. 작가는 지금 같은 혼성의 시대에 캔버스 몇 개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 자체가 혼성적이다.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남동은 오른쪽으로 고급 주택가의 변두리이며, 왼쪽으로 '문화의 거리'의 변두리이다. 그는 이 혼성성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수련자'라는 제목은 순수미술로서의 모더니즘을 시작한 모네의 정원에 대해, 혼성적인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자의식을 드러낸다. 근대와 탈근대의 관계가 그렇듯이, 단순함과 복잡함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순수함과 더러움을 가르는 경계 또한 절대적이지 않다. 모네의 수련이 진흙탕에서 자란 것이듯, 지금 여기의 진흙탕 속에서도 어떤 순수가 솟아날지, 또는 건져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작가란 이 경계들을 위반함으로써, 사회를 이루는 상징적 질서의 근간을 되묻는 존재이다. 하나의 조각을 이루는 정사각형은 바둑판이나 음반 자켓 같은 형식에 일반적이며, 그가 선호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듈이 되어 군집을 이루고 증식한다. '수련자'는 가운데 두 인물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두 명씩 배치된다. 어떤 명확한 모델에 기초하지 않은 동질이상의 인물들은 차이와 반복 속에 행해지는 허상이나 분신 같다. ● 인물상들은 그 내부가 폭발하여 분자적 차원에서 재배열 되고 있으며, 인물 안팎의 선, 얼룩, 덩어리, 사물들이 합세하여 뒤죽박죽 된 모습이다. 화면 아래에 그어진 선만이 중력을 암시하면서 미친 듯이 튕겨 나올 듯한 색과 형들을 잡아준다. 속도감 있는 선은 명확한 형태를 이루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의 인물상은 성 또한 확정 지을 수 없지만, 어떤 것들은 여성임이 확실하다. 편안한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 '수평선(horizon 1-1)'은 지우기의 흔적이 그리기와 일체가 된 바탕 가운데에 난데없이 하얗고 뾰족한 선이 솟아있다. 작품 '지평선(horizon 1-2)' 역시 아래의 지평 선 위로 떠오른 여성이 갑작스런 호출에 깜짝 놀라 돌아보는 듯하다. 그러나 '수평선'과 '지평선'에서의 뾰족한 코는 해부학적인 형태이면서 추상적인 기호, 가령 얼굴 판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벡터 같은 모습이다. 작품 '별똥별(meteor)'에도 초상 위에 기하학적인 선과 원이 그어져 있고, 배경에도 글자와 추상적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작품 '소식(tidings)'에서 인물 아래 그어진 지평선은 목에 가려진 부분조차 투명하게 드러난다.
지평선이나 수평선은 그 아래와 위로 펼쳐질 혼돈을 가늠하는 경계이다. 이 경계면은 카오스에서 솟아나는 코스모스, 또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코스모스가 귀결될 카오스의 거처이다. 정확히 예측 불가능한 자연 현상중의 하나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상이다. 작품 '뭉게구름(cumulus)'은 밝은 바탕에 무엇의 외곽선인지 알 수 없는 선들만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아래의 작은 삼각형은 뭉게구름의 상승 무드를 표시한다. 작품 '0/61 먹구름(dark clouds)'은 신문지 위에 그려진 어두운 덩어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적 언어를 잠식한다. 또는 상징 언어의 연속성에 구멍을 뚫는다. 그의 인물상들은 작품 '장차(by and by)'처럼 단정한 스타일부터 작품 '-량(quantity)'처럼 많은 것을 이고 지고 힘들어 보이는 사람, 작품 '마음, 뇌, 근육(mind, brain, muscle)'처럼 당황한 듯 난처한 듯한 사람 등, 몇 개의 선과 색의 조합만으로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 작품 '프래틀(prattle)'처럼 더러운 걸레로 완전히 지워진 듯한 얼굴조차 표정이 남아 있다. ● 작품 '변경(guns, germs & steel)'은 초상과 거리가 있는 추상으로, 작은 작품이지만 보다 거시적인 비전을 내포한다. 유동적이긴 하지만 잠재적인 대각선 구도에 중심은 비어 있다. 이 비어있는 중심으로부터 변화가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작가는 군상들의 얼굴을 보지만, 얼굴의 중심을 이루는 눈동자는 확실하지 않다. 대개 여러 개로 흩어져 있어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의 중심은 해체되어 있는 것이다. 인물들은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배치를 이룰 뿐이다. 분산되고 비워지고 지워진 얼굴은 미지의 공간들을 예시하고 이 공간 속에서 다양한 유(類)를 가로지르는 연결망이 생성된다. 사물 또는 단편과의 결합, 유기적 통일성의 느슨해짐 또는 와해는 소멸이나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또한 죽음에 가까운 쾌락인 열락이 분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얼굴 또는 바탕에 드리워진 벡터는 부분과 전체뿐 아니라,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힘의 통로를 가리킨다. 구별되는 것들이 함께 섞여 요동치는 거대한 표면으로서의 몸 또는 캔버스는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도 부패는 삶의 실험실이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백현진의 작품은 조직화 대신에 속도와 강렬함이 관통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세 개의 지층을 유기체, 의미생성, 주체화라고 본다. 저자들의 말대로 유기체를 해체하는 것은 결코 자살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전체적 배치물들을 상정하는 연결 접속들, 회로들, 접합 접속들, 구배들과 문턱들, 강렬함의 이행과 배분, 영토들과 측량사의 기술로 계측된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여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성들, 즉 되기는 역사를, 즉 개인사나 일반사를 대신한다. 존재가 아니라 되기의 와중에 있는 백현진의 작품은 위계화 되지 않은 몸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보여준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몸체는 이미 밸브, 체, 수문, 주발이나 연통관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것은 강렬하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 되지 않은 물질, 강렬한 모체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부정적인 것도 없다. 위계화 된 유기체의 폭발은 죽은 몸이 아니라, 더욱 살아있으며 다수성으로 가득 찬 몸, 즉 '기관 없는 몸체'이다. ● 들뢰즈와 가타리의 여러 공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개념인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몸체가 아니다.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 기관들 노릇을 하는 것들은 브라운 운동을 하면서 분자적 다양체의 형태로 분배된다. 기관 없는 몸체는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 생동하고 북적댄다. 삶의 판에서는 발전이나 분화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문제이다. 기관 없는 몸체는 괴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들뢰즈가 기관 없는 몸체의 예를 든 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다. 베이컨의 그림이 형상의 고립을 통해 추상과 구상이 동시에 근거하는 재현주의를 극복하려 했다면, 21세기의 작가 백현진은 모더니스트들이 쓸어낸 바탕으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구축한다. 물론 구축은 또 다른 해체이기도 하다. 인간은 물론 자신조차도 자명한 것이 아니다. 백현진의 작품에서 무엇으로라도 변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머리통은 알과 같은 잠재태를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많이 나타나는 낙진과 얼룩은 기관 없는 몸체의 증후이자 결과이다. 이러한 경향은 표준적 인간상에 대한 거부이자 그것으로부터의 탈주, 소수자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의식을 보여준다.
유기적 질서의 느슨해짐, 또는 해체의 틈새로 이성에 의해 타자화 된 광기가 분출된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되기이자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백현진의 작품에서 다음에 무엇이 튀어 나올지 모를 속도감 있는 붓질은 조(광)증과, 수평선 아래에서 솟아 난 형상들은 (우)울증과 관련된다. 고정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색과 활달한 필치로 빠르게 명멸하는 환영은 조광증적이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조광증 환자의 경우에는 환상과 상상력이 맹렬한 생각의 영속적 흐름에 휩싸인다고 말한다. 조광증은 하나의 대상에 고정됨 없이, 개념과 관념이 변형되고 이것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되거나 이것들의 표상적 가치가 변질되며, 진실과 사유의 전체적 관계가 훼손된다. 조광증은 극도에 이른 신경섬유의 긴장이고, 줄이 과도하게 팽팽해진 결과로 아무리 멀리 떨어지고 아무리 약한 자극에도 진동하기 시작할 일종의 현악기이다. 조광증적 정신착란은 감성의 연속적 진동에 있다. 그것은 열기를 발산하는 움직임에 의해 전달된다. ● 백현진의 작품과 광기의 연결은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 수(지)평선에서도 발견된다. 인물로 가정된 형상들은 물밑에서 솟아오르고 또 그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편하게 그어진 직선과 달리, 어떤 직선도 그을 수 없는 바다는 현실을 이루는 모든 불확실성의 원천이다. 그래서 광기는 늘 바다와 연결되었다. 『광기의 역사』는 이성에 의해 광인으로 내몰린 이들을 배에 태워 보낸 '바보들의 배'의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광인들은 빠져 나갈 수 없는 배에 갇혀 여러 갈래의 지류가 있는 강, 수많은 항로가 있는 바다, 모든 것이 외부의 이 엄청난 불확실성에 내맡겨진다. 광인은 전형적인 여행자, 다시 말해서 이동공간의 포로이다. 광인들은 견고한 도시들이 있는 견고한 땅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동요하는 바다, 그토록 많은 기이한 지식을 감추고 있는 그 미지의 길들, 그 환상적 평원, 요컨대 세계의 이면에서 온 사람인 것이다. 광기가 가지는 모호한 수성(水性)의 요소는 명석하고 성숙한 정신의 안정성과 대립된다고 여겨진다.
광기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관련된다. 회화라는 형식 자체가 히스테리와 관계를 가진다. 인간이 화면에 중심에 있곤 하지만,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백현진의 작품에서 표면과 깊이 사이, 그리고 안팎의 경계가 와해되어 있는 초상들은 아직 분화되지 않는 원초적인 감성대의 출렁임이 느껴진다. J.D. 나지오는『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서 히스테리 환자의 몸은 실재의 몸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물처럼 밖을 향해 열려있는 순전한 감각 덩어리로, 마치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일종의 아메바와 같이 타인을 향해 뻗어가서 그것을 만지고 강한 감각을 느끼고 먹어치운다. 히스테리화 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의 몸 안에 강한 리비도를 흐르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히스테리의 기원은 무의식의 환상이다. 그는 구체적인 현실을 환상화 된 현실로 변형시킨다. 다시 말해 그는 세계를 히스테리화 한다. ●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현대 회화의 임무를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함으로써, 회화와 히스테리의 긴밀한 관계를 논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미술은 신체 속에서 고통 혹은 신경증 같은 것이다. 그것은 추상이나 구상 같은 방식에 의해 드러날 수 없다. 언제나 뒤늦게 도착하는 재현이 아니라, 생생한 현재함을 추구하는 현대 회화는 히스테리적이다. 그것은 신경 시스템 위에서 직접 작용함으로써 재현이 전제하는 거리를 무화시킨다. 색과 마티에르가 중시되는 백현진의 작품은 회화적이다. 그는 사진이나 영상 등 다른 매체들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복제물을 통한 대리체험이 아닌 실제 관람을 중시한다. 그는 몸으로 하는 것, 가령 운동이나 붓질,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머리만큼이나 근육의 힘을 믿는다. 많은, 그리고 오랜 작업을 통하여 머리와 근육의 연결망을 최대한 단축시킨다. ● 특히 그의 작품 속 곳곳에서 발견되는 돌발적 흔적들은 히스테리의 예이다. 들뢰즈는 회화에서 돌발적인 흔적을, 마치 다른 세계의 솟아남과도 같은 것에 해당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표시들, 이 흔적들은 비합리적이고 비의지적이고 사고(事故)이며, 자유롭고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의 논리』에 의하면 돌발흔적이란 비의미적이고 비재현적인 선들, 지역들, 흔적들, 그리고 얼룩들 전체이다. 돌발흔적은 혼돈이며, 대재난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질서 혹은 리듬의 싹이기도 하다. 돌발흔적 이러한 영역은 광기의 영역으로서, 우연, 우발적인 것, 자동기술, 무의지로서 제시된다. 돌발흔적은 하나의 형에서 다른 형으로 넘어가도록 하는 변형의 대리인이다. 여기에서 신체는 유기체가 아니라, 강도 높은 물질 덩어리이다. 백현진의 작품은 모든 경계와 분리를 넘어서려는 광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물론 낭만주의적 미학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작품을 광기의 증후이자 결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광기는 사회의 지배적 상징체계의 빗장을 풀고 수면 아래의 진실한 현실을 분출시킨다. 그가 화면 아래 편에 그어놓곤 하는 선처럼, 경계 사이의 상호작용은 어느 하나로 환원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예술 언어를 다루는 작가에게 언어의 질서와 광기의 무질서는 평행선을 달리며 상호작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적인 무질서인 광기가 타인들에게 전달될 어떠한 방법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미쳐버리고 싶지만', 완전히 '미쳐버리면 안 되는'(푸코) 절묘한 상황 속에 놓여있다. 또 다른 장르를 통해 '찰라의 기초'를 탐구하는 백현진은 이 짧은 열락의 순간들을 어떻게 포획할 것인가에 몰두한다. 그것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소통이라는 것을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변경시킬 것이다. ■ 이선영
Vol.20111114a | 백현진展 / BEKHYUNJIN / 白鉉眞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