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109_수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of the Arts Council Korea 서울 종로구 원서동 90번지 Tel. +82.2.760.4722 www.arkoartcenter.or.kr
표면의 이면 ● 인사미술 공간 1층, 약간 낮은 천정의 공간에 낑겨 있는 대형 곰돌이 인형 푸(Pooh)는 안팎이 홀딱 뒤집혀 있다. 푸 인형을 잘 가지고 놀던 어린애가 봤다면 울음을 터트릴 법한 기괴한 모습이다. 워낙 커서 안 볼래야 안볼 수 없지만, 모서리에 끼어있는 모습은 사랑과 관심보다는 방치된 장난감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길가에 버려진 인형들이 종종 자아내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캐릭터 인형이 가지는 친숙함은 크기와 안팎의 관계가 변조됨으로서 이중으로 낯설어진다. 인형은 그자체로도 인간의 무의식을 투사하는 기괴한(uncanny) 존재인데, 뒤집기 작업은 이 유사(類似) 인간의 표면 안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안은 정확히 바깥의 안쪽이지, 저 깊은 곳의 내면이나 핵심, 본질, 실체 같은 것이 아니다. 뒤집어진 상태의 인형 안을 채우는 것 역시 재단된 천 쪼가리나 여타의 부산물이다. 존재는 그자체가 표면들의 중층이다. 존재의 표면들은 여기저기에서 연원한 주름들로 인해 더 활성화되어 있다. 이 주름들이 야기하는 감정의 기폭 또한 크다. ● 우리는 핵심과 표면이라는, 너무나 오래되어 친숙한 이원적 모델을 따라 주어진 것을 파악하려 하지만, 진실은 핵심이 아니라 표면 및 표면들 간에 맺어지는 관계성에 의해 구축 또는 해체 된다. 실로 심오한 것은 표면에 산포되어 있다. 해체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철학은 깊이의 강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을 폭로 한다. 정문경의 작업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면에서, 깊이의 모델을 표면의 모델로 전환시킨다. 모델이 된 원래 인형을 뒤집어서 15배로 확대시키는 작업은 조각난 육체들이 짜깁기 하는 장이다. 일일이 수공으로 진행되는 확대 작업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흐릿해진 원본처럼 알게 모르게 변형된다. 관객의 면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시뮬라크르이다. 작업하다 피곤하면 그 위에서 누워 자기도 한다는 거대한 이불 같은 인조털 원단에서, 몸을 이루는 부분과 전체 간의 유기적 관계는 종종 모호해진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한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표면들은 길(방법)을 잃게 한다.
속이 채워지기 전의 껍데기들이 재단되고 봉합되는 현장은 가짜 털을 이루는 나일론 섬유들이 풀풀 날리는 가내 봉제 공장 같은 분위기지만, 육신이 부위 별로 해체되고 포장되는 육가공 공장 같은 모습 또한 연상된다. 거기에는 유기적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범람하고 흐르는 살 비슷한 것이 주는 공포가 있다. 낯설게 하기는 낯익음을 전제로 한다. 충격은 그것이 낯익은 것에서 출발한 것일 때 더욱 증폭 된다. 그래서 작가는 푸,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키티 등 잘 알려진 디즈니 캐릭터들을 사용했다. 그것들은 전시부제인 'known'이란 말 그대로, 잘 알려진 인형들이다. 전시는 알려진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 것들로 전이되는 장이다. 작품들은 기존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예술의 기본에 충실하다. 작품 제목 또한 글자를 거꾸로 배열하는데, 발음자체가 안 되는 것도 많다. 작품 「Hoop」에서 뒤집어진 푸 인형은 플라스틱 나사 형태의 눈알이 튀어나와 있다. ● 예기치 못한 형태는 부드러움 속에 내재된 날카로움을 강조한다. 평화로움은 공격성으로 전환된다. 삶 바로 아래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작품 「Yekcim」는 미키 마우스 뒤집은 것인데, 너덜거리는 시접 때문에 큰 귀가 더 커 보인다. 작품 「Yfoog」은 모서리에 앉아 있는 색 빠진 구피가 툭 튀어나온 눈 때문에 더욱 의기소침해 보인다. 그 외에 아기 사자와 코끼리, 고양이 인형 등이 뒤집혀 있다. 캐릭터의 형태와 속성을 결정하는 부위인 눈과 코는 원재료가 드러나는 이물감으로 인해, 원래의 인형에 있는 귀여움은 그로테스크하게 변모한다. 뒤집어진 부분에서 눈의 반전이 가장 충격적이다. 그러나 정문경의 작품은 애초의 원본 인형들 역시 소비자의 욕망에 의해 실재가 변형된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실상은 인형 자체가 괴물이고, 작품은 괴물화 과정을 다시 보여주거나 가속화시킨 것일 뿐이다. 뒤집힌 도날드 덕과 정상적 인 도날드 덕을 위아래로 그림자처럼 마주해 놓은 작품 「Donald Duck Dlanod」은 비정상적인 모습이 더 활기차다. 낯설게 하기는 낯익은 것의 자동성을 불연속적인 도약으로 만든다.
요즘 작가는 인형 뿐 아니라, 가구 같은 것도 뒤집고 있다. 최종적으로 전시장을 방 하나처럼 꾸며서 그곳을 채우는 모든 것들을 뒤집어 보겠다는 계획도 있다. 안팎 뒤집기라는 작업에서, 표면으로의 경도는 이 전시의 또 다른 작품군인 가면들에서도 이어진다. 정문경의 작품에서 표면은 또한 가면으로 간주된다. 인형 뒤집기가 봉제선의 노출로 부드러운 표면을 거칠거칠한 껍질로 만든다면, 가면은 실제의 안면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가면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러나 현대인의 속성을 잘 잡아내어 만화 같은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가면들은 역시 그 뒤의 실체들을 의문시한다. 과연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 자체가 가면들 아닐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자아낸다. 실상을 말하자면, 현시대는 무엇이 얼굴인지 무엇이 가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 작품 「BLINKER」는 주변의 시야가 가려진 기능이 있는 경주용 말 가면과 작가가 그것 쓰고 돌아다니는 영상이며, 작품 「SLEEP WALKING」은 베개 가면 쓰고 도심을 돌아다니는 영상이다. ● 이 두 작품에서 가면의 역할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거나 거대한 표면 위에서 길을 잃은 모습, 즉 맹목이나 백일몽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품 「tin girl」은 양동이 가면 쓴 여자를, 작품 「탑」은 옷 가면 쓴 여자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물화에 내재된 수수께끼가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 미학을 계승한다. 이전 작품에서 얼굴의 모든 것이 삭제된 채 웃는 입만 강조된 가면인 「SMILE」, 자신의 이름 라벨로 얼굴과 몸을 미라처럼 똘똘 말아버린 「UNTITLED」, 창문이 눈구멍 문이 입인 포장 박스로 만든 집 가면 「Home」은 부분을 전체로 간주하는 물신적 단편들이다. 이전 작품에서 과자 봉지들이나 영수증, 태그들은 잔뜩 수집하여 만든 것들은 현대 미술에서 예술의 상대편에 놓여 지곤 하는 사물의 면모를 드러낸다. 사물은 예술이 갖추어야 할 핵심이 부재하여, 덧없는 표면들을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 캔버스 천으로 만들고 있는 실물 크기의 기린은 가면이 꼭 인형일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물신주의를 조장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과 인형, 동물은 도구적으로 다루어진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정문경의 뒤집어진 인형이나 가면들은 차이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차이를 어떻게 감식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동일성과 타자, 실재와 해체, 몸과 무의식 등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정문경의 인형이나 가면들은 원래의 형태를 참조하여 그에 못지않은 꼼꼼한 재단과 봉합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실재처럼 응집시키는 자연스러움은 소격된다. 실재는 그 견고함을 잃고 너덜거리는 조각 잇기의 산물임이 밝혀진다. 작품들은 실재가 동질성 대신에 차이적 관계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차이는 해체주의의 중심적 범주로, 해체의 주된 대상은 형이상학이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해체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최초의 근거 및 궁극적 요인으로, 초월적 관념이나 물질적 실체, 혹은 주관적 동일성, 직관적 의식, 선 역사적 본질, 현존으로서의 존재 등을 상정하는데, 이것들로부터 다양한 존재들이 연역되고 설명되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늘 세계를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우월한 이항대립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둘째 항은 첫째항이 보증하는 가치를 흔들리게 하는 요소를 포함한다. 둘째 항은 이런 확실하고 유력한 가치를 와해시키는 항목들, 즉 차이, 부재, 변화성, 역사, 반복, 대체, 미결정성 등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논리 그 자체를 펼치는 태도, 즉 어떤 존재의 자기동일성에 조화되는 훌륭한 분별력을 펼치는 태도이다. 형이상학에서 실체는 존재이며, 외부의 것은 외부에 존재하고 내부의 것은 내부에 존재한다. 정문경이 시도하는 안팎 뒤집기는 형이상학의 기본 전략인 대립과 우선권을 무화시키려 한다. 가령, 풀려나가는 가장자리, 마무리 지어 지지 않은 실밥, 내부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닌 밖에서부터 강제로 쑤셔 넣은 눈깔은 본질적 요소를 침식하는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요소를 대변한다. 이 배제되고 가려진 것들의 전면화는 순수한 동일성의 밑바탕을 이루는 잡다함을 강조한다.
해체주의 식으로 표현하자면, 차이는 동일성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차이가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마이클 라이언에 의하면 해체론이 와해시키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적 대립들은 내면성/외면성의 이항대립의 틀에 메여있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내면적인 것은 고유한 자기 자신이며 선하고 일차적이며, 근원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외면적인 것은 타자이고 비본성적이며, 악하고 이차적이고 파생적이고 타락한 것이다. 형식적으로 완전한 도식을 통해 형이상학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른 대립들, 즉 긍정과 부정, 선과 악, 자연과 문화, 진리와 허구, 실재와 인공물,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삶과 죽음, 현존과 재현, 이론과 실천 등이다. 부재는 현존의 외부이고 허구는 진리의 외부이며 죽음은 삶의 외부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차이화 되는 것만큼 그것이 되며, 또한 다른 것을 연기하는 것만큼 그것이 된다. 내부와 외부의 일반적인 공리적 구조가 보류되고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해체론과 변증법』은 모든 철학적 형식의 궁극성, 즉 기초적 공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되는 진리, 자기동일성, 합당성 등의 와해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문경의 작품에서 평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끝없는 계열은 궁극적 요인이나 목적을 와해시킨다. 뒤집혀진 인형들은 동일자의 몸통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억압되고 은폐된 요소를 드러낸다. 그 결과 작품들은 구조보다는 과정을,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정신 보다는 육신을, 유기체보다는 기관 없는 몸체를 전면화한다. 봉합되기 위해 일련번호가 매겨진 채 여기저기 널 부러진 조각난 신체들은 죽음이나 기형 보다는 과정으로서의 몸의 유연성, 또는 가변성을 강조한다. 정상적 형태를 특징 지웠던 단단한 조직화는 기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과정이 된다. 유기적 조직화가 아니라, 표면들의 절단과 연결로 만들어지는 몸이 바로 '기관 없는 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을 페미니즘에 적용시키는 엘리자베츠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기관 없는 몸'은 환상, 이미지, 투사, 재현의 투자가 철회된 몸 개념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 그것은 또한 정신적 내부나 비밀스러운 내부가 없는 몸, 내적인 일관성과 잠재적인 의미화 작용이 없는 몸 개념을 환기시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계층화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되고 위계 질서화에 앞서는 것으로서의 몸을 속도와 강도의 표면으로 거론한다. 어느 것과도 접 붙을 수 있는 표면들은 안팎이 연결된 뫼비우스 띠처럼 이원적 구조를 해체한다. 그로츠에 의하면 이원론이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몸과 마음처럼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이런 것들이 우주라는 보편성과 주체라는 특수성을 구성한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안팎 뒤집기의 목표는 몸의 재형상화를 통해 주체성의 개념에서 마음, 정신, 내부, 의식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치를 바꾸어 놓는다. 정문경의 뒤집힌 인형이나 가면은 진부한 키치적 사물을 떠오르게 하지만, 주체성을 잠재성이나 깊이의 모델로서가 아니라 표면의 모델로 간주하는 현대 언어학, 철학,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등의 담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 이선영
Vol.20111111e | 정문경展 / CHUNGMUNKYUNG / 鄭文景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