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담은 지도-강남대로 4년간의 기록

정희우展 / JEONGHEEWOO / 鄭希宇 / painting   2011_1109 ▶ 2011_1118

정희우_신사역사거리_장지에 수묵채색_138×167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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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우 홈페이지_www.jeongheewoo.com

초대일시 / 2011_1109_수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공간의 기억, 몸의 기억 ● 인간과 공간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도시에 종속된 채 매일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현대인으로 불리는 인간에게 도시란 집단적 상상의 결과물이자 사회적 삶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공간으로, 그리고 수직으로 혹은 수평으로 공간을 구성하려는 욕망의 결정체로 다가온다. 건축가 장 누벨에 따르면 도시 공간에서 건축은 자신의 기준 속에서, 자신의 합목적성 속에서, 자신의 용도 속에서, 자신의 양식 속에서, 자신의 방식 속에서, 자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다른 것 속에서, 혹은 자신의 목적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다른 것 속에서 한계를 실험한다. 그 한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진술, 도시는 그렇게 만들어져왔고, 지금 이 순간도 변화하고 있다.

정희우_논현동_장지에 수묵채색_138×167cm_2011

건축이 도시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 단순히 건축적 미학뿐만은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건축의 실재는 그것들이 '표현'하는 세계에서 더욱 진하게 표출된다. 우리가 건축 '안'에서 영위한다는 건 그것을 통해 (도시)공간을 겪는다는 것이며, 세계를 우리의 감각과 인식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건축은 인간과 아무런 사소한 관련이 없는, 인간이 디딜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포개어지지 않는 물질체에 불과한 양상을 종종 드러낸다. 언제부턴가 도시 공간을 구성하고 채우는 건축에서 자유로운 공간감을 만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비물질적'인 건축 대신 정해진 시간과 예산 속에서 물질의 한계에 갇힌 건축이 우리를 저릿하게 한다.

정희우_양재역사거리_장지에 수묵채색_138×167cm_2011
정희우_양재역주차장_장지에 수묵채색_138×167cm_2011_부분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의 강남대로라는 '공간'을 화폭에 담는 정희우는 물질적 공간을 비물질적 공간으로 치환시키는, 남다른 재주를 지닌 작가이다. 그는 후기자본주의의 한 지점을 가열차게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보유한 강남이라는 특정 공간이 생산하는 인식의 체제 너머에 자리한 또 하나의 세계를 그린다. 동양화적 감각의 증표를 확인할 수 있는 작가의 그림 속 공간은 서구적인 수직의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의 그림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림의 색채와 선들이 현실의 사물들을 사실적으로 환기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강남'이라는 현실 세계를 적확히 재현해내는 데 있다. "시각 체험의 조직 원리나 특징이 결국 삶의 원리에서 연역된다"는 영문학자 김우창의 말처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 거리를 걷고, 이 공간을 호흡한 작가의 현실적인 경험이 감각적인 경험으로 이어진 까닭이리라. ● 강남! 유하 감독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폭력'이라는 화두로 이 공간을 묘사했듯이, 본래 이곳은 논밭이 우거진 서울의 끝자락이었다가 짧은 시간에 '스펙터클'한 부(富)를 일군 흔치 않은 공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집과 집들이 수평으로 아로새긴 동네에서 모든 집들이 수직으로 재편된 대치동 아파트로 건너와 스물다섯 해를 살게 된 작가에게 강남은 늘 '임시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몇 차례 세대를 견뎌야 모습을 바꾸는 여느 공간과 달리, 강남은 작가가 머문 시간 동안 유년기에서 곧바로 장년기로 압축 성장하는 탁월한 성장판을 지녔다. 그 결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강남은 다른 곳과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렸고, 그 안의 사람들 역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혹은 본인이 원하는 삶의 풍경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

정희우_스포타임_장지에 수묵채색_138×167cm_2011_부분
정희우_엘타워

정희우가 그려낸 강남 풍경은 단순히 행정구역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남의 '지금 여기'를 기록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작가가 '시간을 담은 지도- 강남대로 4년간의 기록'으로 명명한 '몸'으로 실측해서 얻어낸 일련의 작품들은 마치 '지도'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집요함이 느껴진다.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의 겉과 속을 '기록'한 까닭이다. 작가는 길게 뻗은 강남대로를 따라 걸으며 이 도시를 기록했다고 말한다. 거리 양쪽의 건물을 정면으로 관찰하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거리 사진을 찍고, 건물의 폭과 건물 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보폭으로 측량한 것이다. 이는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어서, 어떤 건물은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막혀 있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소실점은 끊어져 있었으며, 해가 건물 뒤로 물러날 때면 도시는 희미해지고 건물은 까맣게 그을렸다. 하지만 작가가 잉태한 색채와 형체는 강남을 강남이게 하는 분명한 사물로서의 건축을 사실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이 공간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환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희우의 '강남대로'가 머리와 마음으로 사생한 한 폭의 그림을 넘어 작가의 '몸'이 일구어낸 21세기형 '풍속화'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정희우의 그림은 도시 공간을 바라보는 '예술적 기억'의 소산이기도 하다. 1899년 9월 18일, 인천 제물포와 서울 노량진을 잇는 33.2킬로미터를 달린 경인선의 경적이 일깨워주었듯이, 건축은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몸으로 실감하게 만드는 인덱스(index)로 기능한다. 한 건물이 세워지고 변화하고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변하면서 대두하는 기억의 문제를 어루만진다. 이는 공공적 건축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어서, 사적(私的) 기억의 소멸과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측면까지 이어진다. 우리 집, 우리 동네, 내 방, 내가 나온 학교는 물질적인 공간을 넘어 비물질적인 공간, 즉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해체되고 조작된다. 그 순간, 건축은 이미지의 영역으로 잠입해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정희우의 '강남대로'는 일반적인 기억을 넘어 예술적인 기억, 나아가 역사적인 기억으로 그 폭을 확장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여기에는 주의사항이 있는데, 역사적 기억은 공적이고 정당화된 기억으로, 예술적 기억은 사적이고 공인되지 않은 내면의 기억이라고 공식화시키는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가 그것이다).

정희우_신사역횡단보도_장지에 수묵채색_138×167cm_2011_부분

예술에서 기억의 서술은 "개인의 특수한 기억이자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기억을 넘어 개인의 상상력에 의존한 기억"(변학수)이다. 기억 혹은 마음을 통해 삶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우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오감(五感)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글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이해하는, 즉 몸으로 받아들이는"(김훈) 유추적 사고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종종 예술적 기억을 사적인 기억으로만 한정시키는 것도 '몸'과의 접촉 없이 오직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결국 머리로만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이 『무미예찬』에서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즉 무미(無味)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물과 공기처럼 질리지 않는 감미로운 담(淡)의 미학이 예술의 근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스펙터클의 폭력으로 물드는 지금 치우침 없는 중용 혹은 중립과 균형, 초탈했으되 세상과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고요히 평정을 찾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초월적인 자연스러움은 더더욱 찬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무미'의 가치가 예술가의 머릿속에만 머무른다면, 그리하여 마음의 풍경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모든 예술적 기억은 사적 기억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예술가의 마음을 넘어 몸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 참된 마음의 풍경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최근 국내 화단에 '서양화 같은 동양화, 동양화 같은 서양화'(이건수)를 주목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앙드레 말로의 어법으로 해석을 덧붙이자면, 회화가 찬미하거나 표현해야 할 가치들에 종속되지 않는 그림, 통용되는 어떤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그림, 오직 회화만을 위한 본질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을 담은 듯하다. 다행히 우리는 인간과 풍경의 고정된 법칙을 허물고, 동양과 서양의 풍경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는 정희우의 그림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공간이 비움이 아닌 채움에 의해, 건축이 비물질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 것에 의해, 예술이 일상적인 것에 자리를 내어주는 시대에 정희우는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관찰을 겸비해 '본다는 것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그의 그림 덕분에 우리는 강남이라는 특정 공간을 일정하게 조직화하려는 편협한 시각체험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 '중첩'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사물은 물론 시간과 공간마저 복제되는 현실의 풍경 속에서 공간의 근원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정희우의 경험적 관찰이 반가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형식들과 장르들이 더 이상 진정한 의미가 없고, 무엇이 예술에 속하느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소용없는 시대에 예술의 본질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자와의 만남은 늘 반가운 법이다. ■ 윤동희

Vol.20111109i | 정희우展 / JEONGHEEWOO / 鄭希宇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