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105_토요일_05: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경기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 휴관
아트스페이스 휴 Art Space Hue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출판문화정보단지 516-2번지 성지문화사 3층 302호 Tel. +82.31.955.1595 www.artspacehue.com
바람 불어 좋은날 미술관을 가자! ● 1. 바람에 얼굴은 흔들리고 옷 주름이 물결친다. 마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듯. 거칠고 비정형적으로 절단된 신체가 바람을 표현하는데, 우리는 오래전 큐비스트들의 그림이나 스페인의 기괴한 상상력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분할했던 여체를 떠올린다. 달리가 변형한 여체는 미의 상징이니 전통적인 미를 해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폭력적인 절단면은 미국의 황량한 죽음의 사막(Death Valley)의 계곡들이 만들어내는 기괴한 물결무늬를 연상시킨다. ● 작가의 인물들은 그 곳을 바람을 가르며 걸어가거나 버티고 있다. 무채색의 사람은 현실의 존재라기보다는 비현실,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체적인 감각과 행위를 마친 후 또는 그 사이 사이 정지해있는 것이다. 시간은 멈추었고 우리의 호흡도 멈춘다. 조각은 삽화나 장식이 아닌 형이상학과 상징의 비약이 된다. 조형의 시작과 끝은 평면이던 입체이던 결국 전통적인 예술의 기능인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의미의 드러냄의 연장선에 있다. ● 한편 그의 인물은 안전한 집안이 아닌 집밖으로 외출한다. 역으로 바람을 맞는 인물의 출현은 전시장을 실내가 아닌 실외로 바꿔버린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동시에 전시장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바람은 어디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지 않은가? 마치 미술관은 더 이상 실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또는 미술관 제도와 문화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오늘날 욕망의 장소는 시각이고 눈이니 모든 것이 눈으로 모여드는 곳, 당연히 미술관은 욕망의 최종 집결지인 것이다. 그 장소가 그 상징이 변하고 있다. 미술관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그 사이를 욕망이 바람처럼 오고간다. ● 시인 유하는 시 '바람이 불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 수많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들이 내달리는 자본주의 현실을 풍자하는데, 이 시집에서도 '바람'은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다. 유하는 시의 말미에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로 주문을 건다. 마치 바람이 불든 불지 않던, 변화가 있던 있지 않던 욕망의 장소로 오라고 권한다. ●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분출하는 욕망과 정염으로 가득하다는 통찰은 아주 오래된 형이상학적 관습이다. 그것들은 무한히 운동하고 변화한다. 바람은 곧 변화이다. 고대 철인의 생각에 꼭 동의하지 않더라도 만물이 변하는 현상을 바람의 운동에서 본다. 자연계에서 변하지 않는 사물이 없듯 인간 사회는 물론 당연히 한 개인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작가 최경우는 이런 오랜 문화적 상징과 정서적 관습을 따른다. 요컨대 작가가 작업을 통해 집중하는 것은 인물이 아닌 '바람'이다.
2. 바람의 메타포는 또 얼마나 보편적인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끌로드 모네가 아내를 모델로 그린 '파라솔을 든 여인'은 바람이 부는 정말 푸른 언덕의 여인이 모호한 형태로 해체된 채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녀는 빛의 안개처럼 부서지고 있다. ●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감독의 '라쇼몽'에서는 한줄기 바람으로 인해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바람의 장난에 말을 탄 여인의 치마가 흔들리며 살짝 발목이 드러난다. 그리고는 그것을 목격한 남자는 욕정에 살인을 저지른다. 한편 그저 그런 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황야의 무법자'의 마지막 결투장면에서도 바람이 훅 불어 죽음의 결투를 앞둔 이들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과장한다. ● 미국의 빌리 와일더 감독의 '7년만의 외출'에서도 바람은 문화적 관습과 전설을 만든다. 지하철 통풍구로 솟아오르는 바람은 마릴린 먼로를 우리시대의 미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얀 치마가 팔랑팔랑 거리면 바람도 치마도 아닌 바로 사람의 마음이 팔랑거린다. 바람을 타고 우리가 일상 속에 지나쳐버린 쌉싸름한 삶을, 시간과 사건을 아련하게 유동한다. ●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전시 제목 역시 1980년 이장호 감독의 영화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는 경제개발시기 우리나라의 현실을 구조하는 시대를 살아내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얽히면 진행되는데, 바람이 분다는 메타포는 바로 사람과 정신과 관계와 우리 사회전체가, 문화적 상징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감각이 들어있지 않은가? ● 바람은 시각적이지 않다. 촉각적이다. 작가에게 바람의 촉각은 시각으로 은유된다. 분명 실체가 있으나 공교롭게도 시각예술의 그 시각으로는 직접 감지할 수 없다. 바람에 의해 발생하는 운동, 형태, 사물의 모습에서 바람을 감각하는 것이다. 바람은 또한 자연과학의 실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정서적이며 문화적인 것이다.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꽃의 향기를 날아드는 나비로 표현하듯 바람은 보이지 않는 실재(reality)를 보이게 한다.
3. 참으로 바람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바람의 나라'니 '바람이 전하는 말'이니. 바람을 키워드로 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거기에 짧지만 강렬한 시각성을 하나 얹히는 데, 그의 전시는 바람의 문화사이고 바람의 미학이 된다. ● 작가는 오랜 기간 회화와 벽화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전형적인 조소작업으로 연출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평면작업과 함께 입체적이고 조소적인 작업을 병행해온 자연스런 결과이다. 기존의 다소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가의 행위가 평면 위에 지속적으로 쌓여나가는 작업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제목이 시사하듯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경쾌한 분위기의 이미지와 형태를 바람의 문화적 메타포로 섞어 연출했다. ● 그의 표현기법은 어떤 면에서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조형언어를 채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습적으로 형태를 변형하는 것은 단지 물질적 변형이 아니라, 관객의 시각과 심리의 변형을 의미한다. 비구상과 추상의 시대를 관통한 시대감각은 모든 조형예술을 개념과 아이디어의 문제로 환원해 버렸다. ● '바람'과 '변화'의 모티브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듯 모든 형상은 상징이자 메시지이며 기표이자 기의인 것이다. 이 비밀스런 감각과 의미의 복합체들의 운동이 오늘 현대미술의 풍경이기도 하다. 전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바람이 단지 기체나 대기의 운동과 변화가 아닌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담는 미적 담지체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재확인한다. 바람 부는 날이면 미술관을 가자. ■ 김노암
Vol.20111105f | 최경우展 / CHOIKYUNGWOO / 崔慶雨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