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015_토요일_06:00pm
참여작가 / 김규형_황영_허정우 with 김창원, 홍준호, 라인석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작은공간 이소 대구시 남구 대명3동 1891-3번지 B1 Tel. +82.10.2232.4674 cafe.naver.com/withiso
『회사원』展 ● 딱딱한 틀 안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회사원, 틀을 벗어나 이상을 말하는 예술가. 우리는 대개 둘을 이같이 상반된 입장으로 바라본다. 그런 생각들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예술가도 생계를 위해 현실을 벗어날 수 없으며, 예술계라는 또 다른 그들만의 틀이 존재한다. 예술가가 내뱉고자 하는 것은 이상, 혹은 의미 있는 이야기 일까. 혹시 그 틀 안에서 성공을 담보로 한 기술은 아닐지... 예술가가 가지는 욕망이 회사원이 가지는 욕망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욕망이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또한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 안에서 바라본다면 두 입장을 이분화 하여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예술가와 회사원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단순히 생계와 현실이 예술 행위 밖의 부수적인 배경이나 극복의 대상일까. ● 『회사원』展은 예술가와 회사원이라는 상반된 두 입장을 동시에 가지는 작가들을 통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 사유를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두 입장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추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또는 그 갈등 안에서 역설적으로 예술가의 위치와 역할, 의미에 대해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결과를 설정하지 않고, 상황만으로 엮여진 막연한 프로젝트이다. 그 막연함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진행하게 된 이유라면 기획의 단초가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의 삶, 일상, 경험, 상황이었기 때문이며, 두 입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루를 아무리 알차게 쪼개어도 회사원의 생활과 예술가의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쉽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거나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며, 두 입장 모두 포기할 수 없다면 둘 사이에서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하던지 이 기획전이 각자의 방향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나, 적어도 도움이 되는 점검과 과정들이 되길 바라였고, 그 과정에서 결국 예술가는 무엇이며 회사원은 무엇인지, 왜 두 입장을 병행하고 있는지, 예술을 왜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등의 방향과 이유들이 구체적인 경험과 서로 다른 입장들 사이에서 고민되고 언급될 거라 생각하였다. 정리되지는 않더라도 그 이야기를 늘어놓고 드러내는 것이 이 전시의 방향쯤 될 것이며, 이야기의 다양성을 위해서 서로 조금씩 다른 상황에 놓인 작가를 섭외하였다. (이를 테면 연령대, 결혼의 유무, 전공 유무 등. 성별의 차이를 포함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실 전시를 통해서 해결되거나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기에 어쨌든 또 질문만이 남았다. 다만 그 질문들이 결국 예술가를 예술가이게끔 한다는 정도는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 작은공간 이소
인간의 역사에서 부지런함과 신속함은 오래토록 칭송되어져 오던 미덕이다. 여기에 세월이 쌓여 만만찮은 두께를 쌓는다(積)면 그 무시할 수 없는 층위를 가볍게 여기기 힘들다. '자아실현'과 '호구지책'이라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회사'와 그곳에 노동을 투입하여 위의 두 가지를 얻어가는 회사원. ●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기저에는 회사와 그 구성원인 회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회사원이 주는 보편적인 의미에는 월급과 결혼, 자동차, 보통 사람들, 스트레스, 가족, 회식 등의 숱한 단어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음을 안다. ● '하시는 일이?'라는 물음에는 그 사람의 직장과 실력, 재력과 타인과 비교되는 그 사람만의 위치를 파악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던져지는 이 물음의 의미에서 비켜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상대에게 건네주는 정보는 '사진작가'다. ● '작가'가 주는 숱한 함축적 의미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평일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원으로서의 내가 아닌 '작가'로서의 나를 알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일말의 독특함이나 특권은 없다. 직장인에게 휴가가 주는 느낌처럼 나에게 '작가'라는 단어는 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 '작가'와 '회사원'이라는,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회사원으로서 작가활동을 한다는 것이 그것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작품의 질적인 측면과 비겁함, 부지런하지 않은 회사원, 회사에 대한 충성심 따위의 복잡다단한 것들은 다 미뤄두자. 그의 에너지를 어디에 더 많이 투자하고 어느 쪽에 승부를 건다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생각도 접어두자. ● 이른 새벽 알람소리에 졸린 눈을 부비고 아직 어둠을 깔린 새벽길에 출근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퇴근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회사원의 삶과 '오늘도 창작의 한 길'로 매진하는 작가의 삶을 비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회사원과 작가 사이에 층위가 존재하지 않고 그 선택에 있어서 우선과 차선은 없다. ● 작가가 작품을 쌓고 뭉개고 다시 쌓아 올리듯 회사원은 매일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을 뿐이다. 쌓이고 쌓이는 작품과 시간.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선택에 얼마나 충실한가가 문제인 것이다. ● 그리고 그 두 삶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회사원으로서의 작가는 무엇을 쌓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회사원과 작가에게 주워진, 인간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주워진 24시간을 어떻게 쪼개고 배분하는가의 문제가 회사원으로서의 작가에게 남는다. 비록 아직은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였지만, 5년여의 직장생활을 통해 '최적화(最適化)'에서 그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 먼 훗날 누군가 내 삶의 단면을 바라볼 때 비록 회사원과 작가의 단면만큼 일관되고 한결 같은 단면은 아닐지라도 나도 그들처럼 켜켜히 쌓인 시간의 단면 사이로 회사원으로서 작가로서 고뇌하고 노력하였던 층층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오늘도 시간을 보고, 달력을 넘기고 셔터를 누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김규형(www.pickupscale.org)
전시를 준비하면서 예술가와 회사원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사실 예술가라는 타이틀이 부끄러울 정도로 작업양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깊이도 없다.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 더 편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전시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유는 그 많던 고민들의 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지만, 작업의 진정성과 고민의 결과물을 통하여 관객과의 다양한 소통으로 보상받고 싶었다. ■ 황영([email protected])
가지지 못한 것 ● 7-8년 전쯤, 그러니까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때, 그리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때, 1년 학교선배이자 회사 선배인 최모씨의 싸이월드에는 낯선 그림들과 한 줄의 촌평이 올라오곤 했다. 그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이라면 얀 사우덱(Jan Saudek)의 「This is My star」와, 그것에 달린 "소녀의 하얀 둔부보다 완벽한 것이 있을까"라는 짤막한 코멘트였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로 우연히 얀 사우덱의 그 작품을 마주칠 때면 하얀 소녀의 엉덩이에 유독 시선이 모이곤 한다. 그리고 요즘도 최모씨의 페이스 북에는 게하르트 리히터의 「베티」, 훈데르트 바써의 그림 등이 올라오고, 짤막한 촌평이 이어진다. 이젠 나도 "국립 현대에서 할 때 직접 봤지요. 리히터의 손녀라죠.", "오스트리아에서 직접 봤는데, 제 준엄한 예술관으로는 예술적 소질은 그닥 없으신 환경운동가 아저씨" 따위의 댓글을 달긴 하지만, 내가 노력해온 지난 수년의 세월이 과연 내게 그보다 나은 심미적 혜안을 주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며칠 전에도 그는 내게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보며 황홀했던 그때로 돌아가기를 원하노라 이야기 했고, 나는 우리는 이미 타락했기 때문에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대꾸해 주었다. 그런데 ,아마도 나는 그런 시절조차 가지지 못하였구나. 오만한 기획 ● 작업을 구상하며, 회사원이 예술을 하게 되는 조건들을 밝히리라 마음먹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이미 답은 떠오르고 있었다. "먹고 살만하니까", "예술은 무언가 특별하니까".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 문화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부르디외의 이론을 바탕으로 박사과정을 진행 중인 지인에게 나 스스로를 카운셀링 받으면서 회사원의 예술적 욕망이란 (계급)상승의 욕망에서 출발한다는 심증은 점점 확신이 되어갔다. 이제 내가 작업에 끌어들인 회사원 작가들에게서 그들의 감추어진 욕망을 드러내기만 하면 내 기획은 완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욕망에서 예술을 갈망하고 있거나, 혹은 내가 감추어진 그들의 욕망을 이끌어낼 만큼 모질거나 치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국 기획은 완성되지 못했다. 낯 뜨거운 ● 기획은 좌초되었고, 그렇게 진행된 인터뷰는 볼수록 없이 낯 뜨겁고 어색하다. 그 누구의 어떤 대답도, 질문을 준비한 나 스스로의 대답도, 어쩔 줄 모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애초에 질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낯 뜨거운 질문에서 시작한 불안한 발화(發話)가 주체에게 돌아가 무엇을 확정하고 드러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엔-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지만-회사원과 예술가라는 그들의-나의- 굴레는 너무나 흐릿한 까닭이다. ■ 허정우(www.nuguges.com)
Vol.20111030f | 회사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