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025_화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성수_김은주_김지원 도윤희_안창홍_최진욱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5: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로얄 GALLERY ROYAL 서울 강남구 논현동 36-8번지 로얄TOTO빌딩 2층 Tel. +82.2.514.1248 art.royaltoto.co.kr
현대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꽃'은 단지 아름다움일까.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굳어진 대표적인 사물, 꽃. 그 아름다움 뒤쪽 보이지 않는 본질로 접근하는 것이 본 전시의 시작이다. 화려한 이미지에 잠재되어 있는 숨겨진 메시지의 노출을 통해 그 이면의 다른 상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그 의미는 그림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려진 바탕과,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 어떤 사물이 그 자체로의 의미와 당연한 결합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의 삶 근처에서 사물들은 그저 각각의 존재 방식과 생명을 가지고 존재할 따름이다. 사물이 표상하는 모든 의미와 가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게 된다. 친근함과 불길함, 고고함과 예민함 등 그 가치를 의식하거나 또한 그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은 세상을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번안하기 위해 특정 사물이 가지는 특성들을 의인화하여 이해해 왔다. 체험의 구체성에 기반 하여 사물의 특성을 관찰한 결과를 통해, 세상을 낯설고 무의미한 상태에서 의미 표상의 조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 의미를 담은 많은 사물들 가운데 꽃은 그 다양하고 풍부한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 여기 6명의 작가들이 있다. 자신만의 색깔로 회화의 본질에 탐구를 계속해가는 6인의 중진 작가-김성수, 김은주, 김지원, 도윤희, 안창홍, 최진욱-는 작업을 통해 가시적으로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지는 '꽃'의 이미지를 도구로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것은 재현해낸 아름다움을 파괴하기도 하고, 작품의 표면을 둘러싼 환영보다는 잠재된 감각의 지층에 접근한다. ● 전시의 출발은 '꽃' 이라는 이미지에 있는데, 그 의미와 생물학적 속성으로 작가들에게 이미 많은 모티브가 되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새로움'에 대한 물음은 과거의 작가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았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하나의 사물을 통한 6명의 작가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회귀본능, 그리고 꽃과 그것의 내적 속성과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인식을 하나의 공간에 함축 시키는 것, 그것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간주관(間主觀)적 의미를 보다 통합적인 하나의 전망 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중요한 미학적 사유일 것이다.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감흥을 넘어 재현해낸 잠재된 감각으로 진정한 의미의 복수화를 실현하고자 한다. ■ 갤러리로얄
김성수 ● 저 옛날 노발리스의 푸른 꽃은 낭만주의자의 '희망'을 상징했었다. 오늘날 김성수의 형광빛 질린 꽃은 현대인의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초점 없는 인물의 눈동자는, 망연한 표정은, 희망도 기약도 막막한 현실을 넌지시 일러준다. 사람도 사물도 팔리지 않으면, 시장에 등록되지 않으면, 생존의 기회조차 얻기 힘든 조건에서, 한점의 그림과 한 줄의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식의 뻔하디 뻔한 자조가 아닐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살아있고 그래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패배하는 모습을 스스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주체의 마지막 자유를, 쓰고 싶은 자유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를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촌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중략)『Melancholy:자본주의의 푸른 꽃』김성수展 ■ 김상우 김은주 ● 가만히 꽃을 그려본다. 이제껏 일가를 이룬 인체작업이 있었기에, 그녀의 변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체는 그녀에게 자신의 처한 상황과 세상에 대한 저항의 순간이었으며 막힌 현실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영원히 인체만 그릴 것 같던' 작가 김은주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작업의 큰 전환점이 된다. 아버지와 함께한 바다. 그 리듬감과 평온함이 매우 원색적인 물결의 모습으로 화면을 채운다. 어떠한 기교나 계산도 없이 채워진 종이 가득 찬 물결을 보면, 바다가 단순한 풍경으로써가 아닌 내면의 리듬이 그녀를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체라는 소재와 표현적 한계를 뛰어넘어 바다든 꽃이든, 그 본질을 꿰뚫는 진정성의 발견이요 표현인 것이다. 꽃. '지금은 꽃을 그리고 그릴 것이지만, 이것이 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꽃을 그리나 이것이 꽃이 아님을 역설하는 작가의 말처럼 보이는 세계 저편에 한층 성숙한 심연으로 한발 내딛는다. 그리고 그곳으로 우리 역시 이끌고자 조용히 손짓하고 있다. (중략)『가만히 꽃을 그려 보다』김은주展 ■ 성윤진
김지원 ● 꽤 오랜 시간 맨드라미를 그렸다. 어떤 사람은 그냥 꽃그림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맨드라미 초상화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동물적이고 식물적인 것이 혼재하는 이중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나는 맨드라미 그림 속에 혁명하나 맨드라미 그림 속에 연정하나 맨드라미 그림 속에 독사 한 마리 맨드라미 그림 속에 욕망한 덩어리 로 읽혀지길 바란다. ■ 김지원
도윤희 ● ...도윤희는 세상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잠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거니와 그는 이 잠정적인 시선의 그물이 길러 올린 풍경들이 사물의 실체와 동일하지도 않고, 또 세상의 어떤 현상의 지표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의 매력적인 화면들이 구원(久遠)을 향한 치열한 투혼의 결과라는 사실은 해서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그의 화면에는 인간이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초 문명의 기호는 부재할 뿐더러 풍경을 이루는 나뭇잎이나 씨눈 같은 이미지들은 자연에서 연유한듯하지만 기실 그 어떤 식물과도 닮지 않았다. 뿌리도 기원도 없이 화면을 부유하거나 잠시 정박할 뿐인 이들은 해서 한없이 고요하다. 원근법적 깊이를 포기한 화면공간과 자신이 만든 소수의 이미지들만으로 세계를 한정하고 끝없이 분열하며 반복되는 삶과 형체 없는 시간의 형상을 옮겨놓는 그의 작업은 그 포괄하는 시간의 깊이 때문에, 그리고 그 침묵의 무게 때문에 백년의 고독에 가닿는다. 그린다는 것은 침묵을 지키며 말하는 방식이며, 고독이란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떠도는,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의 분주함"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매 순간은 '백년'을 관통하는 덧없고도 끈질긴 삶의 단편들인 것이다. -『도윤희의 투망작업, 깊고도 아득한』도윤희展 ■ 강태희
안창홍 ● ...그가 오랜 기간을 단독자로 생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패배하지 않기 위해, 자기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작업에 전념하는 것 못지않게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불편한 사회적 관계에서 누적된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돌파구이기도 하다. 화려하면서 퇴폐적이고, 도발적으로 변태적이면서 우아한 그림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모난, 그러나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과도하게 발육한 자기애적 성격에 기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를 에고이스트로 보아서는 안 된다. 퇴원 후 작업실에서 요양과 작업을 병행하며 기록해 놓은 작업노트를 보면 그의 예민한 감각이 자기 내면으로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향해 열려있음을 확인하게 만든다. 초록빛 눈물과 초록빛 아픔, 초록빛 절망과 초록빛 희망, 초록빛 사랑과 초록빛 이별, 초록빛 연민과 초록빛 회환, 초록빛 증오와 초록빛 용서. 모나고 찢긴 모든 갈등들이 한데 녹아드는 안식의 빛깔, 초록. (2007년 5월 26일 작업노트) 이 글은 큰 병을 겪고 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의 기복을 잘 드러낸다. 잦아드는 정서적 긴장과 그것을 이완시켜가는 과정을 압축한 이 글을 통해 그의 작품이 지닌 성격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녹음이 짙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적었을 이 글은 아픔, 절망, 증오를 이겨내는 희망, 연민,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공격적인 난폭함의 대단원이 파국적 파멸이 아니라 수용과 화해를 위해 거쳐야 하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폭로이자 고백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중략)『시대의 초상』展中 익명의 개인에게 바치는 오마주/우울하면서 따뜻한 사랑) ■ 최태만
최진욱 ● 미술에서 (착시가 아니라)착각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유희만큼 중요하다. 미술에서 착각은 인문학의 영역이다. 영원회귀의 곤두박질이고, 자가발전이다. (유희와)착각을 부인하면서, 예술에서 뭔가 실체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 자체로 자아도취이다. 자아도취의 악취는 꽃을 시들게 한다. ■ 최진욱
Vol.20111030b | Visible. Invisible. 보이는. 보이지 않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