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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017_월요일_06:00pm
뮌 mioon 김민선 KIMMIN & 최문선 CHOIMOON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억압 속에서 빛을 발하는 우아함 ● 모든 게 간단하지 않다. Mioon이라는 이름은 우리 식 발음으로 미운/뮨이 될 법한데, 작가 본인은 뮌이라고 한다. 컴퓨터 한글 맞춤법에서 잘못된 표기라며 항상 빨간 밑줄이 따라 붙는 이름의 어려움만큼이나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 또한 난해하다. 이 기획 전시를 준비하며 여러 언론사에 보낸 보도 자료에서 나는 "차가운 전기전자 기술로 구현하는 따뜻한 인간성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뮌의 작품 주제는 정치, 경제, 종교와 같은 사회적 논쟁거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썼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심심했다. 그런 문장은 어떤 평론가들도 흔히 쓴다. '차가운 기술 위에 따뜻한 감성'으로의 접근은 대부분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해당하는 상투적인 레토릭이 아닌가. ● 작품을 좀 더 찬찬히 대하면서, 나는 뮌의 작품 속에서 익숙한 것이라고는 '낯설게 하기 defamilarization 효과'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낯선 게 익숙한 것? 이 말장난 같은 역설 paradox 은 '차가운 기술과 따뜻한 감성'만큼이나 현대 미술에서 보편적인 언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언어 코드는 과거의 신화 형식이 지금 일상 속에 배치된 기호를 풀이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것이 가진 이데올로기를 끄집어 낼 수 있다.
뮌이 영상 이미지로 구현하는 갖가지 상황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 물건이 가지는 전형성으로 포장된 연극적 환경 위에서 이루어진다. 작가는 거기서 피사체가 되는 모델(혹은 배우)들로 하여금 가급적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상투적인 클리셰를 연기하게끔 주문한다. 그 결과, 화면 속에 재현되는 상황은 매우 극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신화를 현대적인 시공간 속에 각색하는 효과로 나타난다. 신화는 애당초 진짜가 아니지만, 그 허구가 너무나도 익숙해졌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존재하는 분명한 사회적 사실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가짜를 보면서 진짜를 깨닫기 때문이다. ● 가짜도 아니고 진짜도 아닌, 혹은 가짜인 동시에 진짜이기도 한 주식 그래프 또한 작가에 의하여 우아하게 빛을 발하는 이미지로 재탄생했다. 사람들은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려 한다. 그런데 실제로 무엇을 관찰한다는 말일까? 실물 경제에 익숙한 경영자, 경제 원리를 미적분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경제학자들조차도 경제라고 하는 사회 제도를 전지적 관점에서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전문가들조차도 그 징후만 볼 뿐이다. 징후란 게 이를테면 주식 시장의 그래프다. 뮌이 주식 시장의 기회와 위험을 예술 언어의 스펙터클로 바꾸어 놓은 작업은 사회 체계와 개인 인지 체계가 접속하는 기호의 한 가지 예일 것이다. 주식 그래프는 공장 굴뚝이나 화폐뭉치처럼 시각화된 경제의 표상이다. 종교가 십자가를, 교육이 펜이나 학사모를, 과학이 플라스크나 현미경을 상징체계로 내세우며 객관적인 정보를 산출하는데, 믠은 여기에 이차적인 조작을 가함으로써 정확한 정보(부를 획득하는데 유용한 정보) 대신 아름다움(예술성을 획득하는데 유용한 정보)을 창조한다.
작가가 관찰한 삶의 유형은 여러 제목이 붙여져 구분되고 따로 보여진다. 그 가운데에 어떤 장면은 스틸 컷으로 고정되어 의미에 무게가 더 실리기까지 한다. 사실 이렇게 파편화된 삶의 집합을 이미지화한 작업은 미디어 아트의 단골 소재이긴 하다. 그 시도들은 예컨대 폐쇄회로 모니터 화면을 통한 판옵티콘의 재해석, 즉 전자감시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거나, 전지적 시점을 동원한 관음증의 쾌락을 대리 체험하는 형식도 있다. 뮌은 조금 다르다. 뮌은 정치적으로도 올바르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보편타당한 현대성에 적응한 아티스트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빅 브라더의 독재에 대한 혐오를 직접 드러내지는 않는다. ● 관객 대부분이 깨달았겠지만, 주제를 이루는 의미는 개인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다. 작가는 여기 모든 상황의 전권을 틀어쥐고 있음에도 뻔뻔하게 순수한 관찰자의 위치인 냥 그 부조리의 공간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작품 속에 연출되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일종의 게마인샤프트로서 단순한 혈연 공동체이거나, 게젤샤프트라 하더라도 직접적인 일대일의 직선적 사회 유형이다. 작품 속에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그것은 남/여, 무대의 예술가/객석의 구경꾼, 주인/노예, 부모/자녀와 같은 양자 간의 소통으로 구성된다.
이 공동체의 의사소통 불능은 가장 극단적으로 죽음에 이르러 고립된 개인의 소외가 절정에 치닫는다. 이것은 양자 간의 사회적 문제인가, 아니면 삶과 죽음이라는 개별자의 존재론적 문제인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밝히고자 했던 정신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의 대립 해소는 '시대정신'이라는 불완전한 심리학적 개념으로 얼버무려진 결과를 낳았지만, 바로 그랬기에 그 문제에 뮌의 작품과 같은 예술이 뛰어들 여지가 생겼다. ● 작품 「Lead Me to Your Door」는 낱낱의 화면 속 상황을 전일적(全一的)인 총체성 속에 가둔다. 이 공간의 논리를 구성하는 장치는 사람의 머리 형상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사실 그 자체가 순수하게 외부에서 발현되고 존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인 우리의 인지 머릿속에서 구성되어 처리되는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 짧은 단편 영화들이 하나의 옴니버스 영화로 완성되는 것처럼, 극적인 삶의 변주로 다루어지는 텍스트 속의 가상현실은 그것이 다소의 과장이 있더라도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기에 충분하다. 예술은 그 정도의 과장은 기꺼이 양해 받을 권리를 사회 체계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 윤규홍
Vol.20111030a | 뮌展 / mioon / video.installation.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