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물감으로 그린 하늘·땅·욕망

2011_1007 ▶ 2011_1027 / 월요일 휴관

최은경_관청리 덤불_캔버스에 유채_각 130×162cm_2010 해주항아리 한은선_The Same and Not the Same_한지에 채색, 물_각 260×196cm_2008

초대일시 / 2011_1007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일용_한은선_정세라_최은경 배윤환_해주항아리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1411번지 제1,2전시장 Tel. +82.43.236.6622 www.spacemom.org

1. 해주 항아리 ● 해주 항아리는 당당하고 그 쓰임은 다채롭다. 미백의 바탕색은 기품이 있고, 푸른 코발트 안료로 그린 그림은 머뭇거린 흔적 없이 호쾌하다. 해주 산 항아리에는 전통 산수화가 그려지거나 부귀 양명의 길상의 문양으로 채워지는데 그 그림은 대범하고 더없이 자유로워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격식에 맞추느라 몸을 사리는 기색도 없었다. 청화백자의 혼성모방품이라고 할까. 기형과 코발트 채색은 왕가와 사대부들의 청화백자의 정신적 이상에 기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그려진 모란의 부귀장춘의 소원과 물고기의 다산의 축원은 다분히 통속적인 것이 흥미롭다. 왕실과 사대부 계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자사의 전통에서 본다면 19세기, 근대로의 이양기에 나타난 이 해주 항아리는 청화백자의 퇴조현상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과 근대가 급물살을 이루며 뒤섞이는 와중에 중앙의 통제를 받는 관요의 전통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해주의 항아리는 그 만큼 당대의 하늘, 땅, 욕망을 오롯이 담기에 자유로운 용기였다. ● 해주 항아리는 한국 도자사의 흐름에서 맨 마지막에 나타났다는 것 이외의 계통적 분류나 역사적 자리매김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참조할 만한 한국 도자사 문헌에서도 '해주 항아리'라는 명칭을 발견할 수 없다. 해주 항아리 이야기는 오히려 식민지 시대 조선 민예품을 종교처럼 사랑했던 야나기 무네요시, 아사카와 노리다카 등의 일본 애호가들이 식민지시대 쓴 글에서 그나마 전할 뿐이다. 그 중에서 하마구치 요시미츠는 1936년 일본의 잡지『공예』에 황해도 지역의 몇 곳의 가마터와 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황해도 해주군 검단면에서는 치졸한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송화군 조양면에서는 푸른빛을 띤 백자와 모란 문양의 청화백자 항아리가 생산된다. 황해도 봉산군 흥서 부근은 부드럽고 물이 많은 흙이 특징인데, 여기서는 청화백자의 커다란 항아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조선의 도자 공예는 대개 이상과 같은 상태이다. 우수한 옛 수법을 되돌아보지 않고 헛되이 값싼 수법을 모방하여 조선의 특색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보아 넘기기 힘들다. 그러나 이것도 첫째는 사용자의 취향에 따른 것이므로 어디에 죄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화려하고 정교한 청화백자의 역사로 보자면 쇠퇴였으나 새로운 계층의 필요에 부응한 생활자기로서의 자기 몫을 한 것이니, 해주의 항아리는 유용지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일 것이다.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생산된 해주 항아리가 청화백자의 쇠퇴기 양식인 것은 분명 하지만 동시에 근대적 신흥 생활 공예품의 건강한 미의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 본래 페르시아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최고급 코발트 안료로 푸른색 문양을 최고의 솜씨로 그려 넣은 조선시대 청화백자는 사대부가와 왕가의 애용품이었다. 깨끗한 백색의 유질만이 강조되는 백자 자기나 장인들이 그 문양을 넣는 분청사기와는 달리 화원들의 솜씨로 장식된 것이 특징으로, 산수와 당초문양, 용문과 포도그림과 같은 일급품 회화로 장식되었다. 그 화려함이 갈수록 더해지나 정조 임금은 사치품으로 청화백자의 사용을 금하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런고로 고급 청화백자의 모방품인 해주지역의 항아리 역시 제법 운치를 아는 지방의 부유한 유력가의 집에서 사용 되었음직하다. ● 항아리의 기면에는 주로 모란과 물고기가 그려졌는데, 이것들은 부귀영화와 다복을 상징하는 민간의 길상 문양이다. 출세와 물질의 풍요를 바라는 범인들의 염원을 가감 없이 담을 요량으로 도공들은 정교한 기교를 애써 부리지 않았다.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조금씩 짧아지는 선을 빠르게 반복하고, 모란의 만개한 꽃을 빙 둘러 잎들이 그려진다. 그렸다기보다는 붓으로 찍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때로 산수화나 대나무 그림이 거리낌 없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문기는 없지만 휘갈린 선은 호탕한 맛이 있어 좋다. 대범하게 그린 그림은 항아리의 앞 뒤 면에 큼직하게 채워져 여백과 비례감은 떨어지나 민간의 부귀와 영화, 신분의 상승을 바라는 욕구는 솔직 담백하다. 그런 점에서 해주 항아리는 조선시대 고급문화에 대한 말기의 혼성모방적 참조 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이후 해주 항아리는 19세기 해주를 시작으로 점차 확산되어 마포나루를 통해 서울 부유층에게까지 확산되었다고 하는데, 옹기들과 섞이지 않고 대청마루나 방안에 놓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세계관이, 신분사회가 유동하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계층을 넘어 아래로 전이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2. 불. 공기. 물. 흙 그리고 푸른색의 질료적 상상력 ● 해주 항아리의 유용지물로서의 실용성은 무엇보다 그 도기의 형태에서 나온다. 입구는 넓고 속은 널찍하여 그 안엔 곡식과 양념들과 갖은 먹거리가 담겼다. 중간 크기의 항아리에는 된장을 담아두고,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과 장아찌, 젓갈류를 담았다. 입이 넓어서 볕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경질자기가 아니어서 실용적이었다. 장독과 정지를 벗어나 대청에 놓인 도기의 코발트 빛은 범인들의 삶에 색깔을 입히고, 모란과 물고기의 자유로운 놀림은 일상에 상상력과 생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주 항아리들이 쓰임을 떠나 하나의 미학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의 원천은 기실, 그 기형과 문양이 아니라 질료에서 나오는 것이다. ●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시도한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상상력은 대상을 형태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서 파악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촛불의 예를 든다. "촛불을 바라보는 사람은 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명상에 잠겨드는 것이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명상에서 몽상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주관성이야말로 인간정신의 원천이며 창조력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오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천천히 발효되는 의식너머의 세계이다. 이제 쓰임새를 넘어 해주 항아리의 질료에서 몽상의 상상력을 발동시켜본다. 실재계를 상상계로 전환시키는 우리의 몽상은 도기의 물성,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푸른 안료의 질료적 속성에서부터 흘러나온다. ●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근대 자연철학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인 물질은 불 · 공기 · 물 · 흙 이었다. 이 4원소는 자연을 만드는 뼈이자 살이며, 서로 싫어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만물을 생성시킨다. 동양의 오행설과도 흡사한 이러한 물질적 상상력의 세계는 그 원소들이 근원적인 만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도 무궁무진하다. 흙은 땅이고, 색은 하늘이고, 그것을 소성해 내는 불은 정염의 욕망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흙에 물을 넣어 빚고, 공기를 불어 넣어 소성하는 도자기는 원초적이며 몽상적인 상상력의 결정체가 아니겠는가. 도자기에는 이처럼 태생적으로 하늘과 땅과 욕망이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땅이 옴팡진 생명의 진토라면, 흙은 한 움큼의 삶이고, 껄끄러운 알갱이들을 다 골라내고 물로 다진 백토는 찰진 몸의 속살이다. 도자기가 뿜어내는 상상력이 몸에 이르고 보면, 고래부터 많은 이들이 항아리를 여인의 몸에 비유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김일용_The Resemblance of Body_합성수지_34.5×29×10cm_2007 배윤환_Black_종이에 혼합재료_각100×71cm

김일용의 몸의 푸른 껍질 ● 조각가 김일용은 일관되게 몸에 집중하고 있는 작가이다. 대상을 보고 조각하거나 소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의 몸을 석고로 떠내는 작업으로 일관해 왔다. 1999년 전시된 껍질을 벗겨낸 인체의 이미지는 충격적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욕망과 삶의 격전장으로서의 몸은 정신의 형이상학에 앞선다. 비루하지만 질긴 그 껍질은 살과 체액이 흐트러지지 않게 동여매어 비로소 인간을 하나의 형태로 세운다. 몸은 도망칠 재간이 없게끔 존재를 결정하는 살의 껍질로 이루어진 감옥이다. 심, 신을 간명하게 가릴 수 없는 '몸'의 물질적 숙명은 인간이 살면서 축적하는 의지의 총량보다 무거워 보인다. 조각가 김일용을 매료시키는 몸은 바로 형태로 세워진 몸이 아니라 물질로서의 존재하는 몸이다. ● 그의 몸 시리즈는 거친 껍질에서 욕망의 부분 대상으로, 때로는 아름다운 모델의 몸으로 변주를 거쳐 왔다. 부인할 여지없이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정염의 대상이다. 김일용의 캐스팅된 여자의 몸도 그렇다. 몸이라는 주제가 매혹적인 만큼, 김일용은 몸을 다루는 작가로서는 언제나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몸의 촉각성과 누드의 시각성이 교차하며, 욕망의 기호와 에로티시즘의 대상성 사이를 왕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과정은 일련의 소성된 항아리에서 흙의 질료적인 상상력을 넘어 표면의 형태미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흡사하다. ● 사실 미술의 오랜 역사에서 여성의 누드가 비로소 몸이 된 데에는 1970년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의 시끄러운 퍼포먼스가 있었고, 더러움, 불쾌함, 혐오와 같은 신체의 언캐니가 의식에 앞서는 주체의 리얼한 부분임을 주목한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있었다. 몸과 누드 사이의 밀어내는 자력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김일용이 여자의 몸이 내뿜는 형태의 아우라를 끊임없이 깨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 누드를 선택한 남성작가의 업과도 같아 보인다. 그가 깎거나 덧붙이지 않고 실제 사람의 몸을 직접 떠내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혹적이지만 불편한 몸, 그 언캐니한 진실을 이번에는 푸른 인체 부조로 제시하였다. 매끄러운 표면의 부조는 언뜻 보면 잘 다듬어진 공예품처럼 앙증맞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관객의 상상력은 여성의 몸에 달라붙은 오래된 관습과 작가의 의도 사이에서 진자처럼 왕복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김일용이 선택한 푸른색은 초월의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브 클랭이 비물질적인 색채로 명명했던 푸른색을 상쇄하기 위해 작가가 떠낸 가슴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노출된 복부의 살은 유동적이다. 푸른빛의 매끄러운 신체의 부분 대상은 그래봐야 물질에서 초월적이지 못하는 몸의 우울한 노래인 것이다.

정세라_외부 없는 집_캔버스에 유채_90.9×60.6cm_2011 해주항아리_38×입지름 17×지름 30cm 정세라_외부 없는 집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정세라의 몽상의 Blue ● 몽상의 미덕을 말한 철학자 질베르 뒤랑은 이미지와 상상력이 결합된 세계를 '상상계' 라고 불렀다. 이 영토는 이성과 합리의 영역 아래 숨어 있지만,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정세라의 몽롱한 백일몽은 바로 이 상상계의 풍경을 들추고 있다. 머리를 흔들어 각성하려하지만 점차 초점은 흐려지고 풍경은 몽상으로 이어진다. 몽상은 깨어 있으면서 꾸는 꿈, 직관과 상상력이 활동하는 흐릿한 안개의 강이다. 그곳은 의식의 밑바닥으로 나른하지만 번쩍이는 직관의 비늘이 은빛으로 퍼덕이는 곳이기도 하다. ● 정세라는 의식을 몽상으로의 전환시키는 촉매로 특별한 공간과 시간을 선택하고 있는데, 먼저 그 매혹은 선명한 푸른색에서 나온다. 정세라는 아주 간혹 붉은색이나 오렌지색이 쓰기도 하지만 주조를 이루는 색은 푸른색이다. 블루는 말 그대로 우울과 몽상의 색이다. 그러나 독일의 미술가 뒤러가 멜랑코리에서 우울한 기질을 예술가의 창조력의 원천으로 해석하였듯이 작가는 푸른색을 현실을 상상계로 전환시키는 환각적 중매자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정세라의 투명한 듯, 뒤틀린 푸른 풍경은 바로 이러한 우울한 몽상이 상상력으로 깨어나는 순간의 포착이었다. ● 한편 색과 함께 정세라가 선택한 공간은 작품에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그녀는 유리로 지어진 구조물에 집중하고 있다. 투명하게 내부가 드러난 '외부 없는 집' 이다. 공간을 통과한 빛은 유리의 매질을 통과하면서 휘어지고 왜곡되었다. 그 공간은 불안하고 신경질적인데, 내부와 이어진 계단, 벽을 분할하고 있는 창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만곡은 화면을 불가사의한 공간의 매트리스로 엮어내고 있다. 한편 늦은 밤 인적이 없는 공원에서 명멸하는 빛은 깊은 밤의 공기 속에서 확산되어 형태를 잃기도 한다.

최은경_한낮에_캔버스에 유채_73×91cm_2010 정세라_self-portait_캔버스에 유채_50.0×72.7cm_2010 정세라_외부 없는 집_캔버스에 유채_145×97cm_2010

사실 유리 건물과 공원이라는 두 공간은, 대상을 타인의 시선들 앞에 투명하게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지니는 장소이다. 19세기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공원과 열린 대로와 유리 아케이드를 건설함으로써 중세적 골목에서 근대적 열린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투명한 유리 구조물은 모더니티에 시각적 스펙타클을 부여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을 생각해보라. 근대적 투명함은 증기와 공기와 인파가 뒤섞여 캔버스에서 혼탁한 물질의 터치가 되지 않았는가. 미신과 불합리를 몰아내고 진리를 빛 속에 드러낸다는 유럽의 계몽의 기획이 얼룩으로 뒤덮인 불투명한 표면으로 생성된 것은 진정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정세라는 투명한 시선의 공간속에서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을 병적 기질의 푸른색으로 되살려냈다. 왕년에 히트한 '깊고 푸른 밤'이라는 제목의 통속 영화에서처럼 표면은 더 없이 고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사건이 어디선가 일어나고야마는 그런 풍경이다. 정세라는 현실과 꿈의 틈, 그 사이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했다. 현대인의 심리적 상태 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전달하겠다는 것이고, 투명한 유리집과 어스름 깊은 밤의 정경은 정세라의 의도를 적절하게 연출하는 매혹적인 미장센인 셈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소기의 목표는 달성된 듯하다. 현장을 투명하게 덮어버리는 매력적인 블루. 그것은 왜곡되어 있지만, 현대의 또 다른 사실경이기 때문이다.

배윤환_Black_종이에 혼합재료_가변설치

배윤환의 이중적 Black ● 낭만주의 문학가 괴테는 엉뚱하게도 색채론이라는 물리학 논문을 발표하였다. 괴테의 색채론에 따르면 태초에 빛으로부터 황색이 생겨난다. 그리고 암흑에서는 원초적 어두움을 담은 푸른색이 발생한다. 괴테가 노란색과 더불어 푸른색을 가장 근원적이며 완벽하게 순수한 색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괴테가 비논리적이며 연금술적이기까지 한 색채론을 굳이 집필한 것은 뉴튼의 자연과학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하니, 몽상의 주관적 세계를 이성 앞에 놓고자 했던 낭만주의 운동의 기수답다. 그런 그가, 빛을 프리즘으로 분해해 과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뉴튼의 광학이 낭만적 상상력에 메스를 들이대는 위협이라고 느꼈던 것은 십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사실 이원론에서 나온 괴테의 색채론은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상상력과 감각의 원천으로서의 색채를 복권시킨 것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대조를 이루는 노랑과 흑색이 폭풍우처럼 섞이며 한 점으로 휘몰아치는 영국의 화가 터너의 광폭한 색채추상은 괴테의 색채론이 아니었다면 그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 태초의 어두움을 담은 파랑색은 공포와 악덕과 나약함을 상징한다. 황색이 빛나는 양의 색이라면 블루는 냉기 도는 음의 세계이며 수축하는 색이다. 배윤환은 이성과 길항하는 암흑의 색으로서의 검은색에 일찍이 주목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검은색은 권력의 색이며 때로는 조력자이다. 사실 블랙은 그의 그림에서 절대적인 요소이다. 그는 작업이 시작하기 전 캔버스에 블랙 아크릴을 전면에 가득 칠한다. 그러나 작품의 전개 도중 시행착오를 겪게 되면 다시 블랙을 전면에 덮어버림으로써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배윤환은 작업의 진행과정 속에서 처음과 되돌림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암흑의 색채에 이미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 해왔다. ● 그러나 배윤환은 블랙의 상징성이 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해 지는 것은 피해가려고 하는 것 같다. 사실 그의 감각은 팝아트적인 데가 있다. 권력자로서의 이중적 블랙을 표현할 때도 그는 배트맨의 캐릭터를 차용한다. 절대적 카리스마를 결여한 반 영웅으로서의 배트맨의 출몰은 심각해 보이는 그림을 우스꽝스러운 우화로 만든다. 자유로운 연상을 건너 뛰어가며 나타나는 인물들은 그리스 고전 비극의 장면을 패러디하기도 하고, 만화적 배치로 웃음을 주기도 한다. 사실 배윤환 그림에서 블랙을 앞세우는 일련의 상황극의 함의는 우스꽝스러운 풍자적 장면의 연출에서 나오는데, 이러한 우화적 통속성은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블랙 페인팅에 힘을 덜어준다. ● 차용을 통한 혼성모방의 기질도 능수능란하지만, 그의 드로잉 역시 자유분방하다. 솔직함의 미덕도 있는데, 배윤환은 자신의 드로잉과 데생의 미숙함을 블랙의 조력으로 이끌어 간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자유분방함과 솔직함, 검은색과 다소 탁한 푸른색의 배합은 해주 항아리의 물고기와 모란을 그릴 때 보여준 도공의 서툴지만 솔직한 붓의 운행을 연상시킨다. 배윤환은 정치사회적 의제를 대중적으로 공인된 도상과 자유 연상법을 통해 풀어가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모호한 이야기의 도약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배윤환의 내레이션은 보는 이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하고 있는 듯하다. 배윤환이 만화와 영화의 캐릭터에서 알레고리를 찾는 차세대 팝 아티스트로서 기대를 모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은선_The Same and Not the Same_한지에 채색, 물_260×196cm_2008

한은선의 현상학적 Blue ● 괴테가 푸른색에 낭만적인 암흑의 의미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푸른색은 이성의 색이며, 냉철함과 순수, 영원함의 상징이다. 한은선의 푸른 화면은 바로 이 초월의 순수를 구현하고 있다.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종이와 물감의 매질에 몰두하고 있는 한은선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물결치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을 통해 푸른색 색면추상 시리즈를 다양하게 변주해 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푸른 풍경에서 태초의 빅뱅이 일어나는 우주적 풍경을 읽어낸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은 이미지의 유사성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고도 푸른 색채의 물질성, 그 자체에서 풍성하게 펼쳐지고 있다. ● 한은선이 출품한 천상의 빛으로 물든 화면은 고요하고, 동요하지 않으며, 감수성 풍부한 감성의 바다이다. 그녀의 파랑을 분류하자면 울트라 마린에 가깝다. 15세기 중국에서 도자기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값비싼 코발트 안료가 사용되었다면, 서양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천상의 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울트라 마린을 찾았다. 청금석, 아프가니스탄의 고산에서 채취되는 청금석은 보석에 버금가는 값비싼 광물이다. 여기서 얻어진 푸른색은 말 그대로 바다 너머의 초월적인 푸른색으로 화가들은 천상의 여인 성모의 복식에만 한정해서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면 비물질적인 푸른색이 주는 종교적 고양감이 철저하게 동방무역의 물질적 토대에서 나왔으며, 서정적인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이 베네치아의 부와 청화안료의 물질성이 만들어낸 지극히 경제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한지에서 우러나오는 푸른빛의 초월적 정서가 그 물질에서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2002년 전시에서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출품된 블루 연작은 이후 '물결치다'에서는 파동과 에너지로 전환하였다. 속도감 있게 빨려 나가는 물, 푸른빛의 파동은 군더더기 없는 찰나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푸른색의 물질감은 에너지로 변하였고, 그 에너지는 음악적인 진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변이는 순차적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하나의 작품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생각해보면 펼쳐진 파랑의 장엄경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이 동시에 작용하는 공감각의 세계인 것을 알 수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잘 알려진『예술 특히 회화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색채란 고양된 정신의 형이상학의 표현이라고 썼다. 한은선 역시 색채의 물성으로 관객에게 정신적 임펙트를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칸딘스키의 순수한 색채의 예술적 감수성을 한은선의 작품에서 새삼 만나는 것은 분진 속에서 빛나는 별을 만나는 것처럼, 세속의 분탕에서 정화수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 그러나 한편으로 한은선은 "숭고함, 성스러움은 동시에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에 숨어 있기도 하다"고 했다. 그래서 "매우 추상적일 수 있는 그 지점을 매질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현현"시키고 싶다고도 한다. 별빛과 불타는 새벽하늘, 일렁이는 파도소리, 눈물, 핏물, 숨결, 펄떡이는 심장은 모두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 끝이 화염처럼 갈라지며 물결치는 파도의 풍경은, 한편으로 삼투압을 일으키는 세포막이나 피와 체액이 교환되는 미세혈관의 전자 현미경적 풍경이기도 하다. 거시와 미시가 만나고, 극한과 극소가 중첩되는 이미지는 이미 구체적 대상성을 넘어섰다. 한은선은 그저 자연을 그린다고 했지만, 그녀는 공감각 속에서 신체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현상학적인 풍경을 연출해왔던 것이다. 그 광경은 정신적이며 동시에 물질적이다. 이미지에 다른 서사가 없더라도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하늘이어도 좋고 꼭 그것이 아니어도 좋다(The Same and Not the Same Sky). 자연이어도 좋고 꼭 자연이 아니어도(The Same and Not the Same Nature)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최은경_미아리 고개_캔버스에 유채_194×130cm / 162×130cm_2009

근대의 모퉁이 풍경: 최은경의 탈색된 Blue ● 최은경은 할 얘기가 많은 것 같다. 그의 그림에서 푸른색은 너무 흐리다. 너무 흐려서 풍경은 탈색된 것처럼 보인다. 초월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공간. 몽상과 추억과 회한이 초현실적으로 뒤섞인 실재의 공간이다. 그러나 끈끈하게 화면에 달라붙지 못하고 멍하게 부유하는 풍경은 그녀가 스스로 의도한 결과이다. 이것이 최은경이 그려낸 풍경의 아이러니이다. 그녀의 풍경은 순수한 블루를 지향하는 한은선의 '고양감'이나, 정세라와 같은 도시적 매혹과 완전히 다르다. 최은경이 선정한 하나의 장소는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최은경은 현재 관청리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그곳의 행정지번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퇴직 후 낙향한 고향이다. 그러나 관청리는 현재의 물리적 장소만은 아니다. 그 곳에는 아버지의 우울한 노스탈지가 투영되는 곳이다. 아버지의 상실의 감각은 최은경에게 전이되고 있는 것 같은데, 끄트머리에 선 폐허의 상상적 공간, 그녀의 흐릿한 풍경의 감수성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 흐트러진 머리와 같은 덤불, 관청리의 벌판은 무너진 구조물 없이 자연 그대로의 폐허경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장소가 하나의 압축된 추상의 '결'로서만 느끼도록 표현하고 싶어 한다. 현실을 구차스럽게 구술하기 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성에 대한 요약 불가능한 총체성"을 시각화하겠다는 것이다. 지표면에 밀착된 채 무게감 없이 휘어진 시선은 그래서 초현실적이다. 한편 유사한 시선은 관청리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미아리의 고개나 이화동의 골목 한 켠, 쌍문동의 모퉁이가 그렇다. 그녀의 시선은 미시적으로 골목이 꺾이는 지점의 불규칙한 노면과 인적 없이 열린 문을 하나의 지형학적인 모습으로 포착한다. 그곳은 완전히 몽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현실적이지도 못하다. 노스탈지와 폐허, 비상해버리거나 몽상에 빠지기에는 현실은 그냥 현실이기 때문이다. ● 최은경의 풍경은 푸르름을 먼 발치에서 쫓고 있다. 아직은 젊은 작가가, 끄트머리에 서서 그것이 인생이라고 허탈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자신의 여정이, 아버지의 삶이 사회적 근대성의 사회사와 연관되어 있음을 영리하게 잘 알고 있는 최은경은 내밀한 개인사를 통해 한 시대의 사회사를 투영시키려고 하고 있다. 변두리 공간의 사회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해주에서 마포로 전국으로 확산되는 해주 항아리의 수용이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서는 것과도 유사하다. 19세기 말, 해주 항아리는 뱃길을 건너 마포 나루터에서 서울로 입성하였다. 이처럼 최은경의 무게감 없는 현실이 건강한 실재로서 현실에 입성하기를 기다려본다. 3. 인+간 사이의 기호, 해주 항아리 ● 동양사상에서 하늘은 원이고, 땅은 사각형이다. 그러면 그 사이의 욕망은 어떤 기호일까. 살고, 상상하고, 때로 초월하는 건강한 욕망의 기호는 분방하게 푸른 염원을 드러낸 해주 항아리와 닮지 않았을까? 격조와 탈속을 동시에 아우르는 푸른색과 선묘에서 자유와 몽상을 발견한다. 이 전시회는 해주 항아리의 푸른색의 땅과 하늘과 욕망을 김일용, 배윤환, 정세라, 최은경, 한은선의 작품에서 하나씩 하나씩 짚어보는 기획이다. 푸른색을 중심으로 이들 작가들의 작품은 교집합과 여집합으로 교차하고 있다. 한은선의 원초적 깨끗함의 색채는 정세라의 멜랑코리한 도시 속 푸른색과 만나 튕기며 일정 거리를 만든다. 김일용의 매끄러운 껍질의 느낌은 배윤환의 시니컬한 블랙의 뉘앙스와 비껴서 중첩한다. 작가들은 자라난 세대도 다르지만 세상을 파고드는 지점도 각기 다르다. 김일용의 인체 부조가 미시적 부분 대상으로서의 몸의 흔적이라면, 배윤환의 드로잉은 배트맨과 같은 대중적 표상이자 기호이다. 한편 최은경의 탈색된 풍경은 근대기 끄트머리 공간이라는 문화지형으로서의 변두리 의식을 반영한다. 푸른 이끼만이 남은 흐린 경치는 현실을 부피감 없이 걸러낸 초현실적 풍경이며, 실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상실의 공간이었다. ● 푸른색은 신비하고 깨끗하며, 몽롱하고, 음울하며, 고독하고, 괴기하다. 첫 새벽의 미광의 색이며, 암흑으로 떨어지는 나락의 색이기도 하다. 일군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이 세상에 눈뜨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색이 바로 파랑이라고 하기도 한다. 푸른색은 낭만적이며 초현실적인가 하면, 고전적이다. 게다가 푸른색은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채이다. 백의민족이라는 오랜 고정관념에도 불구하고 한 조사 결과 나온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푸른색이었다. 그래서 푸른색의 이미지와 상상력은 의식의 억압 아래서도 항상 미래를 향해 뻗어간다. 스페이스 몸에서 초대한 김일용, 배윤환, 정세라, 한은선, 최은경 이들이 각자의 비전으로 그려낸, 그 푸른빛으로 물들인 인간사 만화경에 초조한 현대인의 시선을 적셔본다. ■ 김미정

Vol.20111020c | 푸른 물감으로 그린 하늘·땅·욕망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