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01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이병욱의 '그림자 상형시(象形詩)'와 '통관적(通觀的) 시야'로 나아감 - 1. '그림자 상형시(象形詩)'와 탈장르적 사유 ● "쇠라여/너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켰지만/나는/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가운 가옥과/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커다란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조고마한 물방울로/그려보려 하는데/차라리 어떠할까" ● 이병욱의 '그림자 상형시'에 영감의 출처가 되어 주기도 했던, 김수영의 시 「거리 1」의 한 단락이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가 점으로 그려냈던 세계를 시인은 따가운 가옥, 사람들의 음성, 거리의 소리들을 재료 삼아 그려 보겠다 한다.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고마한 물방울'로 한 점의 회화를 완성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소리로 그려진 회화, 시간으로 칠해진 그림, 향기를 깎아 만든 조각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물론 그것은 가능하고도 또 가능하다. 존 케이지(John Cage)는 주의 깊게 듣는다면 거리의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알 수 있을 거라 했다. 무음조 음악이요, 세상으로 만들어진 음악인 셈이다. 음악이 제도적 질서가 규정해놓은 음가(音價)로만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은 바싹 마른 교양과 과도한 문명화의 탓일 뿐이다.
그림이 붓과 안료로만 그려지는 게 아닌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생선 굽는 냄새 가득한 골목, 왁자지껄한 분위기, '오랫동안 비워둔 방', '방안 가득한 달빛'은 모두 그 자체로 탁월한 걸작 회화다. 시(詩)인 동시에 회화인 것이다. 원한다면, 조각이거나 영화이기도 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소재거리로만 대하는 태도가 큰 탈을 일으킨다. 그것들 모두가 언어요 개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만 대상화하면서 멀리 밀쳐내기 때문이다. ● "모든 것들은 언어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의 말이다. 인간의 언어사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적, 심적 능력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언어의 의미를 마음, 정신, 의도를 통해 설명하려드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언어의 의미를 '정신의 기호적 표현'으로 제한하는 오류에 가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묻는다. "우리 정신이 어떤 상태일 때 비언어적인가?" 모든 상태에서 인간의 정신은 이미 언어적이고 개념적이다. 우리가 건축적 구조를 추론할 때, 사물을 시각적으로 표상화할 때, 도시를 구성하는 시각의 온갖 단위들, 색, 형태, 리듬, 역동성, 구성적 복잡성이나 단순성, 부드러움이나 예리함, 재현, 추상을 다룰 때, 우리는 이미 언어를 사용하고 개념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들과 존재하는 다른 유형의 언어와 개념들 사이에 경계란 없다. 그것들은 자유로이 만나고, 교류하고, 교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존재와 세상과 우주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가란 자고로 팔레트와 화학적 안료를 담은 튜브형 용기로만 자신의 영토을 제한해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 역시 과도한 제도교육과 관례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화가건, 조각가건, 시인이건, 소설가건 자신을 범주화하는 규범들에 유폐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이런 면에서 지난 한 세기 간 서구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어 온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파피에 꼴레(Papier colle)에서 팝 아트(Pop art)를 거쳐 웹 아트(Web art)에 이르기까지, 키네틱 아트(Kinetic art)에서 비디오 아트(Video art)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것들에 그토록 분주하게 명칭을 부여하면서 그것들을 대단한 경계 위반이나 전복으로 간주해 왔던 것인데, 사실 경계란 그리 명료한 것이 아니며,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반면, 그것들 모두가 같은 언어의 영지요, 개념의 나라에 속해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이런 맥락에서 이병욱의 '그림자 상형시'를 보자. 그것은 분명 경계 뛰어넘기요, 탈장르의 의미 있는 실험이라고 명명할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작가가 그것을 대단한 혁명인양 내세우지 않는 장르적 사유를 이미 가지고 있어, 그것이 불필요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병욱의 '그림자 상형시'는 회화와 시(詩), 이미지와 언어의 혼합경작이요 이모작이요 이종교배다. 여기서 이미지는 시 쓰기에 의해 구성되거나, 아예 그것으로 대체된다. 시는 그려지고 이미지는 쓰여진다. 그런데 시는 이미지의 헛헛함을 촘촘히 하고, 이미지는 시의 추상적 기술에 집을 제공한다. 이미지의 질료로는 채색안료들 대신, 용어와 구문과 문장들이 동원된다. 시는 추상적이고 기호적으로 배열되는 대신, 정확하게 '그림자 나무'의 윤곽을 생성한다. 그럼으로써 시는 형태를 얻고, 이미지는 의미의 배열을 소유하게 된다. 언어와 형상, 문자와 이미지는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한다.
2. '통관적(通觀的) 시야'를 갖는다는 것 ● 이병욱은 시를 분해하여 회화적 구조로 재조립한다. 시를 시어(詩語)의 단위로 분할한 다음, 그것들을 하나의 의미의 구조체를 위한 예약된 블록으로 전유한다. 「그림자 상형시-늙어서야 태어나는 그림자 한 그루」의 예를 들어보자. 그림에 등장하는 3차원의 구조체는 안과 밖, 내부와 외부를 암시하지만,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서로 어긋난 격자 틀의 불규칙한 이음매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개의 어두운 틈들 역시 모호하게 읽힐 뿐이다. 구조체의 정면으로는 분절된 사과의 이미지들이 얹혀 있는, 분절된 갈색의 신사중절모가 돌출되고, 그 반대쪽으론 기능적이지 않은 계단들과 그 끝에 심겨진 한 그루의 나무가 등장한다. 달은 두 개의 입방체로 나누어진 두 개의 밤의 표면을 덮고 있다. 이 구조체는 「그림자 상형시-꿈의 상처 속에 날카롭게 숨어」에선 더 확장되고 복잡성을 띤다. 정면은 모서리가 어긋난 격자형 틀 구조로 되어 있고, 얼핏 들여다보이는 내부에선 기둥과 테이블의 기이한 배치가 보인다. 구조의 오른쪽은 마치 병풍처럼 접혔다 펴졌다를 반복하면서 확장되어 나가는데, 그 마지막은 거대한 달의 접혀진 이미지로 마감된다.
시(詩)의 분신들에 의해 수수께끼 같은 구조를 지닌 그 '상형시적 실체'는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그림자에 의해 역설적이게도 더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그림자는 통상적인 그것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구조체와의 연결 부위로부터 시작되어 길게 늘어진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거리는 시 쓰기가 충분히 배열될만한 시간과 공간을 허용하는 만큼 늘어져 있다. ● 그림자는 그 자체로 모호한 공간으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표현을 따르면 실체의 '집요한 분신(分身)'이요, 사고(思考)의 테제이자 안티테제인 '사고되지 않은 공간'이다. "어둠, 사고를 둘러싸고 있는 부동의 밀집층, 사고 속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의 '사고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실체에 대해서 '타자(l'autre)'다. 그것은 자율적인 방식으로 반성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엔 실체의 실체성, 곧 중추의 반영이다. 보충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것이며, 타자이지만 실체보다 더 실체다운 타자인 것이다. 아마도 푸코라면, 그림자에 대한 이병욱의 각별한 의미부여에서 의례히 그렇게 했듯 '근대적 존재양태'를 지적하기, 곧 사고될 수 없는 것을 사고해야할 근대적 필요성에 가담한 것이라 했을 것이다. 실체에 대한 고조된 의구심과 회의를 해결하기 위해, 즉 반성하고, 장막을 거둬내고,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갈수록 사유되지 않은 영역에 대해 사고해야 하는 요구에 대해 응답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병욱의 그림자 상형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사유될 수 없는 것들을 사유하기 위해, 시를 분해하고 이미지로 재조립해내고, 그리고 특별히 사유되지 않은 공간이자 잠재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것이며 침전된 것인 그림자의 탐구에 나선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하는 것, 곧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사유될 수 없는 것들을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예술의 본질이요 본향이 아니던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라'는 자연과학의 테제다. 그릴 수 있는 것만을 그리는 그림은 기록화나 초상화와 같은 재현미학의 산물들이다. 쓸 수 있는 것만 쓰는 것은 보고서나 논문이다. 이병욱의 그림자 상형시는 그릴 수 없는 것의 그림과 쓸 수 없는 것의 쓰기를 통해, 그릴 수도 쓸 수도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려 할 때 특별히 유효할 터이다.
'그릴 수도 쓸 수도 없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듣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밝히듯,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명백히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한계 지워진 전체'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바로 이 '전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겐 전체에 대한 '통관적(通觀的) 시야'가 부재하며, 이는 우리 몰이해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그릴 수도 쓸 수도 없음은 이미 우리의 결여된 전체와 부재하는 통관적 시야에 대한 고백으로서, 그것으로 나아가는 유력한 길인 것이다. 이병욱은 등단한 시인(詩人)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의 경험은 분명 그가 결여된 전체를 통찰하고, 사물들을 '통관적'으로 보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사물 안에 내재해 있는 언어적, 개념적 질서를 바로 보는 것, 그리고 그 언어적, 개념적 질서를 통해 다른 것들과의 통섭적인 연관을 확인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통관적 시야를 갖는다는 의미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병욱이 이 세계를 더 충실히 진척시켜 나감으로써, 사물과 경계들 사이의 연관에 기초한 참신한 통섭의 담론, 곧 하나의 삶의 방식이기도 한 가능성을 더 긴밀하게 제안해줄 것을 기대한다. ■ 심상용
Vol.20111019h | 이병욱展 / LEEBYUNGWOOK / 李炳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