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리셉션 / 2011_102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월~금_10:00am~06:30pm / 토_10:30am~06:00pm / 일요일 휴관
카이스 갤러리 CAIS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7-16번지 Tel. +82.2.518.0668 www.caisgallery.com
하지훈 ● 일상화된 과거 하지훈은 내가 상하이 Bund18 크리에이티브센터 디렉터로 있을 때 전시에 초대할 작가로 처음 만났다. 5년쯤 전의 일이다. 꽤 규모 있는 그의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달 동안이 있어 나는 그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물론 전시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도 전시를 통해 크게 주목을 받으며 상하이뿐만 아니라 중국전지역에까지 단번에 유명세를 떨쳤다. 마침 그때 제작한 작품들의 일부가 이번 전시에도 보여줄 예정이어서 나는 잠시 사적인 추억의 기쁨을 맛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막바지 작업에 한창 분주한 것 같다. 그렇게 분주한 그가 이번 전시에 대해 쓴 글을 그대로 인용하려는 내가 문득 너무 게으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독자들에게는 역시 그의 글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 " 저 나름대로는 이번 주제를 '일상화 된 과거'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해왔던 전통을 소재로 한 작업의 연장선 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전의 작업에서는 전통에 대한 존중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면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작품들은 좀 더 저의 자아 반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이번의 전시 준비 과정에서는 기능과 형태의 디자인적 접근에서 좀 더 발상의 자유를 모색해 보고 있는 시간 같습니다" 그의 작품 경향과 함께 전시작품들을 살펴보자.
먼저 그가 앞서 말한 한국 전통을 소재로 삼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이다.'자리','반시리즈' 등 다수의 가구들은 전통이 지니고 있는 미학적 요소, 또는 재료나 기능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을 최대한 살려 그가 현대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재탄생시켜온 작품이다. 그렇게 탄생된 그의 가구는 현대인의 생활과 입맛에 잘 맞아 높은 평가를 받아왔는데 더욱이 최근 작품들은 현대의 입식생활에 맞추어 다리를 높이거나 비례를 바꾼다든지 하여 과감하게 변형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전통을 답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추어 새로운 전통을 개척하는데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전통 반닫이 형태의 수납장은 이전보다 한층 진화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본래 가로로 긴 반닫이를 세로로 세워 양쪽으로 여는 문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형하였고, 또한 본래 반닫이 문에 붙어있던 장석을 실제 장석이 아닌 두꺼운 나무를 깍아 조각하는 방식으로 형태만 따온 것이다. 앞서 그가 말한 기능과 형태의 디자인적 접근에서 좀 더 발상의 자유를 모색한다는 것과 과히 관련지어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서구적 모던한 감각을 보여주는 일련의 가구들이다. 'OX chair', '스텔스체어', '픽셀벤치', '지브라체어' '등' 등에서 그는 그만의 재료를 다루는 특별한 감각과 함께 단순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재료사용과 단순미는 아마도 그가 덴마크 유학을 통해 체득했다고 생각되는데, 의미 없는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고 가장 핵심적인 것 만이 남게 되어 실용적이면서도 견고한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스칸디나비아 가구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들 작품들에서는 특히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직선 또는 곡선과 같은 기본요소를 반복하여 리듬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것 그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 취향 그 무엇이 있는데 하지훈의 스타일은 군더더기 없이 매우 정제된 디자인, 억지스러움이 없고 편안하게 어울리게 하는 것이다. ● 그밖에 콜라보레이션 작업도 그가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특정한 예술작품이나 다른 분야의 디자이너 또는 장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만든 모티브를 가구에 적용하기도하고 그 동안 수 차례 예술가와 장인들과 함께 협업을 해왔다. 중요무형문화재 나주 소반장 김춘식, 자개장 김영준, 현대미술가 이수경, 섬유디자이너 장응복 등과 협동작업을 통하여 그의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전통소반', '채상', '버블테이블' 등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 한편 이번 전시작품들 가운데는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획기적인 디자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이들 작품들은 나를 즐겁고 흥분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노출시켜본 적이 없는 비밀스러운 그의 악마적인 면모, 우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인 본성이 이들 작품에서 살짝 드러나기 때문이다. 명작속에서 악마적인 요소가 예술을 깊고 풍부하게 해주듯이, 그러한 요소는 지금까지 비교적 차갑고 엄격한 하지훈 디자인스타일을 자유롭고 뜨거운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면 가능성은 무한히 커진다. 자신을 가두던 틀을 깨고 나오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 예술과 디자인을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지만 좋은 디자인은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하지훈은 예술과 실용성 사이의 많은 탐구을 해왔다. 그러한 탐구의 결과물로서의 이번 작업은 확실히 하지훈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작품은 값싼 이케야가구 제품을 구입해서 그 표면에 마치 명품의 대명사로 알려진 LV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사방연속문양들을 가득 채워 넣는 기발한 작업이다. 그러니까 그가 한 일은 가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입한 가구표면에 문양을 그려 넣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의 유머러스한 풍자가 보는 이를 통쾌하게 만든다. (중략)
내가 하지훈이 좋은 디자이너라는 생각하는 이유는 가구를 잘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지 손재주만으로 좋은 디자이너라고 할 수 없다. 디자이너에게는 재료의 선택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약 하지훈이 재료사용과 물성에 대한 탁월한 안목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시시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그와 함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갖추고 좋은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지훈이 바로 그런 디자이너인 것이다. 그런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난 좋은 디자인 좋은 느낌의 가구. 그의 잘 만들어진 가구를 사용해보면 생활이 훨씬 즐거워지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의 가구는 사용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감동을 준다. 홀로 두어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의 정신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품이 그렇듯이, 그의 가구는 시대를 막론하고 오래오래 변함없이 아름다운 빛을 발할 것이다.
허은경 ● 우연히 허은경의 개인전을 인상 깊게 보고 작가에 대해 궁금해하던 차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며 누군가를 소개했다. 그 사람이 바로 허은경이었는데, 그녀와의 만남을 나는 인연이라고 여긴다. 그때가 불과 2년 전이고 보면 허은경을 그리 긴 시간 알아온 것도 아니지만,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그녀의 작업을 지켜볼 수 있었다. ● 내가 처음 본 작품은 평면 작업인 나무 패널 연작과 두어 점의 입체 조각 작품이었다. 'Ancient Future', 'Base Station', 'Micro Macro' 등의 제목으로 독립적이거나 또는 시리즈로 제작한 다수의 패널 작업과 'Mapping' 같은 조각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허은경의 작품은 평면, 조각을 불문하고 모두 나전(우리말로는 자개, 영어로는 mother-of-pearl)과 옻칠이라는 재료를 사용한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는 기하학적 형상의 작품 시리즈와 기하학적 표현과는 대조적으로 민화적 표현을 취한 일군의 작품이 어떻게 서로 맞닿아 있는지 호기심을 자아냈다. 또 키치적이기도 하고 팝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상적이기도 하고, 치밀하게 계획해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우연성을 접목한 것 같기도 하고… 여러 요소가 뒤섞인 허은경의 작품 세계가 내게는 마치 미궁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는 놀이처럼 흥미로웠다. 허은경의 이번 전시 작품도 전과 마찬가지로 나무 패널 작품과 조각, 드로잉 작품으로 구성했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전 작품보다 한층 발전하고 확장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주제가 훨씬 심화되면서 작품의 형식이나 표현법이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나전과 옻칠을 사용하는 법도 크게 달라졌다. 나전보다 금분을 많이 사용하거나 나전과 금분을 함께 사용하기도 하고, 수묵 드로잉 작업이 두드러지게 많아졌다. ● 허은경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기 위해선 그녀가 선택한 표현 재료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허은경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허은경이 나전에 끌린 것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전의 광택이 빛을 반사하거나 거울처럼 사물을 비추는 것에도 큰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생명체의 껍질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하찮은 미물일지언정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란 것이다. 또 옻칠은 일찍부터 나전에 동반해온 까다롭고 특별한 재료다. 그 두 가지 재료는 나전-동물, 옻-식물로 대변되는데, 작품을 통해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생물의 환생, 진혼곡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무 패널에 바닥칠을 하고 정교하게 자개를 붙인 후 여러 번 덧칠하는 과정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수공예품을 만들던 기법을 빌린 것이다. 칠하고 말릴 때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야 하므로 습실을 이용하는 것이나, 허은경이 적게는 일고여덟 번, 많게는 스무 번까지 덧칠을 하는데 칠이 마를 때마다 매번 샌드페이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입체 조각을 만들 때는 그보다 훨씬 많은 과정을 거친다. 각각 다른 유기적 형태를 성형하는 과정을 더하기 때문이다. 철심으로 뼈대를 만들고 단단히 묶어 고정한 다음 그 위에 소창천을 여러 번 겹쳐 형태를 완성하고, 얇고 부드러운 소창천에서 단단한 나무와 같은 질감이 날 때까지 옻칠을 하고 말리는 과정을 더 많이 반복해 입체 형태를 완성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런 성형을 거친 뒤에야 그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시작된다. 매번 그런 번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허은경에게는 전혀 불만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많은 시간조차 의미를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하나의 작품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자신의 작품에 담는다는 것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허은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 요소인 시간성, 시간에 대한 상념과도 무관하지 않다. "내 작품의 기본 콘셉트는 'was, is, will be'입니다. 과거의 것을 현재의 문제로 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작업입니다"라는 작가의 말은 창작 원천의 영역이 매우 넓게 뻗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그녀의 관심이 시간 여행을 통해 현실을 넘어선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먼 과거는 먼 미래만큼이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사실 과거•현재•미래를 결합하거나 접목하는 것은 매우 모호하고 신비로운 작업인데, 그런 영감에서 허은경의 독창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허은경이 입체 작업의 주요 모티브로 삼는 것도 그렇다. 갑각류나 파충류 또는 식물이나 동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얼핏 보기에도 수억 년의 시간이 집적되어 있는 화석과 같은 느낌을 준다. 화석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인간이 망각한 과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허은경의 작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체성이 불분명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과거와 미래를 섞어놓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실을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으로 상정한 것 같다. 작가의 작업이 아직도 우리 주변 도처에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을 찾고, 현실에서 실마리를 얻어 미래의 세계를 찾는 일임을 말해준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시간 여행 놀이인 셈이다. ● 한편 허은경은 이전의 엄격한 기하학적 표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변화를 꾀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히 규칙적인 구조의 흔적이 엿보인다. 점으로 연결된 선을 다시 삼각뿔, 원형, 타원형, 입방체로 발전시키고 재료나 기법을 달리하며 복합적으로 전개해나간다. 그것은 추상적이기도 하고,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묘사한 구상 같기도 하다. 또 그것은 나에게 만다라 같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밤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내 생각은 단순하지만 아주 엉뚱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허은경의 작품에는 과학적인 동시에 주술적이라는 극단적인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한다. '불의 신장', '별의 신장', '벌레의 신장', '디지털 신장' 등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로봇의 형태 또는 더 이상 미물이 아닌 당당한 힘의 존재로 비치는 곤충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일련의 작품을 살펴보자. ● "로봇은 동양 사상에 뿌리를 둔 것으로 오방신장입니다. 오방신장은 다섯 방위를 관장해 지키는 수호신을 말합니다.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북쪽의 현무, 남쪽의 주작, 중앙의 황룡. 그 의미를 확대해서 불의 신장, 디지털 신장, 음양 창조의 신장, 산의 신장, 벌레의 신장 등 주제별로 어울리는 신장을 만들어냈습니다." ● 이번에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드로잉 시리즈다. 한지에 수묵 또는 옻칠 위에 수묵을 사용해 미세하고 정교한 재현을 보여주는 드로잉의 주요 모티브를 이루는 수상쩍은 형체도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위의 기본 콘셉트가 'was, is, will be'라는 시간적 확대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 물체들은 좀 더 공간적인 접근(in and ou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는 물체 같은 동시에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즉 매크로macro와 마이크로micro의 공간을 한 번에 보여줘서 양쪽 끝의 공간을 이어붙인 것입니다." 마이크로와 매크로 세계가 서로 맞닿아 있고 결국 같은 구조로 나타난다는 허은경의 생각은 얼마 전 알게 된 프랙탈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프랙탈 이론은 만델브로트B. B. Mandelbrot란 수학자가 발견한 것으로, 부분과 전체의 서로 닮은 구조가 반복된다는 수학적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생물체를 포함한 자연물 전반에 걸쳐 비교적 널리 적용된다. 그런데 그 개념이 누군가의 발견이나 주장보다 훨씬 앞선 음양오행 사상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음의 세계와 양의 세계에 대한 이치, 인간은 물론 우주와 자연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닮았다는 원리가 담겨 있다.
'Micro, Macro', 'Star Fish', 'Flowery', 'Scale' 등 드로잉 연작은 모호하나마 생물학적 형태를 연상시킨다. 표피층이 아닌 내부 깊숙한 무의식의 그물망이나 신경세포망 같은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허은경의 어머니가 최근 병마와 투쟁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허은경의 작품에는 섬세한 감성, 생과 사에 대한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물질적인 세계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세계,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 물리적인 것과 인간 지각의 연결, 우주와 삼라만상, 생명체의 역동하는 꿈틀거림, 생성과 소멸, 덧없는 인간의 시간 등 일련의 메시지가 그녀의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허은경은 재료와 형식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의미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이질적인 요소를 아울러 탄탄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의미의 범위를 점점 넓혀간다. 무엇보다 허은경은 의미를 왜곡하거나 의미의 혼동에 빠지지 않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접근하는 법을 안다. 각기 다른 재료와 방식을 사용할 때에도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을 일관성 있게 관철한다. 허은경의 작품이 보는 사람에게 일종의 흥분이나 환상을 전해주는 것은 다소 자극적인 재료, 형태와 색 때문만은 아니다. 표면적인 흥밋거리보다는 인간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인간이 유한한 지식의 경계를 넓혀 무한한 세계로 향하게 하면서 그것을 조금씩 자신의 사유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 종합적으로 볼 때 시간과 존재는 허은경이 줄곧 탐구해온 예술적 과제이며, 진지한 성찰 대상이다. 시간과 존재는 우주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를 기하학적으로 표출하는 작업으로, 인간과 우주의 생명 체계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사유의 폭을 넓혀나간다. 동시에 허은경은 일련의 작업을 통해 우리 시대의 문화•사회 현상을 통찰하고 사유한다. 현대사회의 생명 현상 전반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창조해낸 동식물과 돌연변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작은 바이러스의 존재가 위협적인 현실로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인간은 호기심과 모험심, 욕망을 멈출 수 없고 그에 따른 오류 역시 계속되고 있다. 허은경은 스스로 덫을 놓는 인간의 불안한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반성과 사유를 요구한다. ■ 김선희
Vol.20111017h | 시간의 사원(Time Temple)-하지훈_허은경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