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1017_월요일_05:30pm
에이블 파인아트 갤러리 서울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에이블 파인 아트 엔와이 갤러리 서울 ABLE FINE ART NY GALLERY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1층 Tel. +82.2.546.3057 www.ablefineartny.com
몽상 (Daydream) ● 일곱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라상덕은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음을 고백한다. 최근 몇 년간 그의 작업의 소재는 빨갛게 달아오른 잉걸불(숯불 혹은 ingle)과 숯가루이다. 직접 산에서 채취한 나무토막들을 말린 후 화로에 넣고 불을 붙여 타는 과정을 관찰하고 숯불이 되었을 때 사진을 찍어 대형 캔버스에 그려내는 작업이다. 작업은 여기서 마무리 되지 않는다. 작가는 잿더미 속의 잉걸불에 입김을 불어가며 불씨를 살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곤 하지만, 그것은 절정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일 뿐 찰나를 붙잡아 두고픈 허무한 바람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 다음의 단계를 기다리는데, 불씨가 사그라지고 남은 검은 숯덩이마저도 가루로 빻아 캔버스에 바르는 것으로써 작업을 완성한다. 녹녹치 않은 일련의 과정과 열정이 함께 녹아 든 결과는 충분히 뜨겁게 느껴진다.
라상덕의 근작은 그의 불에 대한 아주 오래 전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아궁이 속의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불의 요사스러운 마력에 휩싸이곤 했다. 그것은 자주 모습을 바꾸는 일종의 마술인데, 이를테면 온기와 금기, 위안과 공포, 생명과 파괴, 생성과 소멸 같은 서로 상반된 의미들의 결합으로서 '불' 만이 갖는 양면성들이다. 불 앞에서 인간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따스함과 평온함에 녹아내리기도 하고, 모든 것을 삼킬듯 한 붉은 혀의 날름거림에 온몸이 굳어버리기도 한다. 작가는 때로 현실 속 고민들을 태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꽃을 마주했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동안 불꽃을 응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화되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때는 빨간 잉걸불이 설탕보다도 몇 십 배 더 달콤한 과자처럼 보였다"고 할 정도로 그의 몽상(daydream)은 깊어졌고 상상력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작가의 이러한 경험과 기억은 과거에서 현재로, 아궁이에서 작업실, 혹은 캔버스로 시간과 장소의 이동이 일어난 이후에도 생생하게 재생된다. 작은 나무토막들이 타는 모습을 보며 섬세한 붓질로 불꽃을 그려가는 동안에도 그 이상한 흥분과 무아지경의 상태를 거쳐 몇 시간이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그의 근작들은 과거 불꽃 앞에서의 몽상 중에 생성된 작은 불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가슴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불씨가 강한 생명력을 얻어 활활 타오르게 된 것은 그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촛불의 미학'을 접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불의 정신분석'을 출발점으로 '불의 시학'을 쓰기까지, 일련의 저작들에서 불과 인간의 존재론적 대화와 몽상, 상상력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 바슐라르와의 만남은 작가 라상덕의 마음속에서 명멸하듯 흔들리고 있던 불씨에 닿은 기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의 불은 지펴져 작가는 다시 몽상을 시작했고 그 몽상은 이미지가 되었다.
불을 소재로 작업한 초기에는 따뜻하고 온화하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뜨겁고 무섭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금지의 의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흰 색의 바탕을 사용했다. 그러나 바슐라르도 언급했던 불 앞에서의 인간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적 욕망이 그의 마음속에서도 꿈틀댄 것일까. 라상덕은 아궁이 속의 불을 다시 쑤석거리듯, 또 그가 이미 잿더미 속의 잉걸불에 입김을 부는 행위를 해왔던 것처럼, 캔버스 화면 위로 더 뜨겁고 더 강렬한 빛을 머금은 불을 등장시키기기 위해 배경을 검게 표현하기에 이르렀고, 이 때 물감을 통한 색으로서의 검음이 아닌 검음 그 자체인 숯을 선택하게 된다. 숯가루를 칠한 바탕의 두터운 질감으로 인해 회화적으로 표현한 불의 이미지가 자칫 가볍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작가는 불이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만큼 무거운 존재로 표현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한다. 비록 불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수없이 많은 붓질이 가해지지만 밀도를 높이고자 함은 아니다.
라상덕의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가 단지 감상자들을 압도하는 시각적인 강렬함 뿐일까. 작가는 불꽃을 응시하고 불꽃이 빛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 빛은 찰나에 멈추지 않고 다시 어둠과 싸운다. 그의 작품은 어둠과 빛이 싸우는 소용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재료들이 가지는 속성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오히려 대립이 아닌 순환의 구조 속에 놓여있다. 즉, 흙에서 자라난 나무는 불에 의해 타오르고 숯이 된다. 자연 속에서 그것은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라상덕의 작품 속에서 숯은 가루 내어져 그림의 재료가 된다. 다시 말해, 나무와 불, 그리고 그 둘이 만나 타고 남은 재인 숯가루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작품 속에서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라상덕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반복적이고도 고된 과정을 몽상으로 승화시키면서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은유(metaphor)'는 없다. 즉, '몽상의 불'이 아니라 '몽상하게 하는 불'일 따름이다. "불꽃은 모든 초월을 깨닫게 한다"는 바슐라르의 언급처럼 우리도 라상덕의 잉걸불 이미지 앞에서 잡념들이 불에 타 사라지고 어느새 불꽃너머의 피안의 세계에 다다르게 됨을 느낀다. 그 지점이 바로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요 상상력이 춤을 추는 무대가 된다. 이는 또한 현실을 초월하는 경험이요 존재가 해방되는 경험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작가 라상덕은 감상자들에게 어떠한 은유나 상징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려 하거나 사유를 강요하는 대신 불 앞에서의 관조와 몽상에 참여하기를 권한다.
라상덕은 수년 전에 보았던 불꽃이 지금의 작업으로 나타났듯이 현재 꿈꾸고 있는 상상은 훗날 어떻게 실현될까 생각하면 흥미진진하다며 다시금 흥분에 젖는다. 불꽃처럼 뜨거운 열정과 타오르는 의지를 내보이는 만큼 그의 상상의 불씨도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의 몽상은 계속될 것이기에... ■ 임지영
Vol.20111017b | 라상덕展 / LASANGDUK / 羅相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