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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월~목요일_10:30am~08:00pm / 금~일요일_10:30am~08:30pm / 10월17일 휴관
롯데갤러리 일산점 LOTTE GALLERY ILSAN STORE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 784번지 롯데백화점 B1 Tel. +82.31.909.2688~9 www.lotteshopping.com
그들이 사는 세상 ● 롯데갤러리에서는 10월을 맞이하여 우화적인 방식을 통하여 인간의 문명과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작가 변대용의 개인전『그들이 사는 세상』을 마련하였습니다. 변대용의 작업은 귀여운 조각이 주는 즐거움과 불편한 감정의 혼재를 통하여 우리가 문명이 양산하는 여러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킵니다.『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우화를 통해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인간 문명의 야만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생태문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기대합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 - 변대용의 세계인식과 조각적 진실 ● 참 부지런한 작가다. 과도한 열정이나 신묘한 재능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부지런이다. 그는 2007년 "갈증이 나다"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치루고 있다. 산업사회 부산물의 생활용기들로 이뤄진 오브제 설치작업은 물론이고 반드시 손작업을 거쳐야하는 조소작품들이 그의 조각형식의 특질이라 할 때 단순히 노동력의 차원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생활용기들처럼 산업적 인공성을 극대화시킨 조각의 매끄러운 표면과 우화적 상상력을 빗대어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파고드는 조각적 주제전략까지 고려한다면 그의 작업은, 작품세계는 만만치 않다. 쉽게 읽히고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시각적 화려함이 조각의 표면이라면, 자본주의의 과도한 풍요와 풍요를 채우고 있는 마른 욕망은 그 속이다. '마른 욕망'은 그의 '갈증'이고, 그런 욕망과 갈증은 우리의 탐욕에 다름 아니다. 탐욕의 시선으로 보면 세계는 온통 육식성 굶주림으로 가득하다. 버리고 남는 것이 뼈다귀 듯이 지구는 자본주의 폐기물로 넘쳐난다. ●「동상이몽-보색」(2007), 「붉은 곰 : 존재와 상징」(2008), 「Nekton&Plankton」(2008), 「장화신은 두루미와 아이스크림 먹는 백곰」(2009), 「빌린 장갑」(2009), 「호기심 많은 인어」(2009), 「그럼에도...꿈을 꾼다」(2010), 「너는 나다. 나는 너다.」(2010) 그리고 이번 전시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주었고 터트렸으며 타전시키는 조각과 언어는 변대용의 세계인식을 판단하는 거대한 모듈이라 생각된다. 나는 각각의 전시와 전시에 선보였던 작품들이 변대용의 조각세계를 분절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환유(幻有)하는 방식으로 구축한 환상성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 환상성 이론을 따졌던 츠베탕 토도로프와 장 베시에르. 토도로프는 카프카의 『변신』을 사례로 들며 고전 환상문학 세계에서는 예외였던 것이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규칙이 된다고 역설하면서 "'너'에 대한 주제는 타부에서 파생했고, '나'에 대한 주제는 광기와 관계가 있다. 타부를 위반한 사람은 정신병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베시에르는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는데, "수긍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게 그것의 본심이다. 여기서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란 현실의 재현을 추구하는 예술이며,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란 현실의 재현으로 볼 수 없는 예술을 뜻한다. 베시에르에 따르면 환상성은 두 이야기의 접점에 상존한다.(토도로프의 『환상문학 입문』(1970)과 베시에르의 『환상 담론』(1974)을 참조할 것.)
자, 그렇다면 이런 환상성이 변대용의 작품에서 어떻게 구현되었고, 되고 있는가. 우리는 우선 두 이론가가 환상성의 실체를 '초자연성'에 두는 듯 하면서도 사실주의 예술(문학)에 경도되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론의 핵심은 예술의 형식이 아니라 '진리의 탐구'에 있었다. 변대용을 비유하자면, 그의 조각적 외연이 보여주는 팝적이라거나 우화적이라거나 하는 외적형식보다는 그가 궁구하는 조각적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변대용의 작품들은 사실 '예화(kasus)'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예화의 재미와 주목을 위해 우화를 차용했고, 우화의 까닭모를 서사를 위해 수수께끼를 심었을 터. 우리는 그의 예화와 수수께끼 풀이를 통해 그가 전하려는 세계인식 또는 조각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미 환상이론에서도 '예화'와 '수수께끼'로 환상성을 추궁한 바 있다. 베시에르는 "환상문학은 결정 형식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의 문제점에 예화의 문제점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예화는 답을 갖지 않아서 제시할 수 없고, 수수께끼는 답을 알고 있으나 비유할 뿐이라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변대용의 작품을 조각적 형식안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면 그 깊이를 쉽게 속단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베시에르가 지적하듯이 수수께끼의 문제점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작가의 소리에 기대버린다면 예화조차도 흔적 없이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순수한 예화의 표정과 수수께끼의 비유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이전의 작업들에서도 이미 예시된 바 있고, 어떤 징후로도 읽혔던 사회의 권력구조, 허(虛)의 페르소나 뒤에 숨은 허약한 실체들, 문명에 속박된 인간의 암울한 공포, 자본욕망의 무한 상승체 도시타워 등이다. 변대용의 '그들이 사는 세상'은 '미키'를 빗대어 재현한 지금 여기의 우리 현실이다.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수긍 가능한 이야기들로 짜여 있으며, 그가 제시하는 예화는 그의 경험담이다. 주지하듯 자본주의는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속 사찰에까지 뻗어있는 강력한 계급구조다. 그런데 그는 소소하고 세부적인 그의 작은 일상들 속에서 세계인식의 서사와 상징을 발굴했다. 생활의 편린들에 묻어 있는 그야말로 잊지 못할 먼지 같은 사건들.
"예화1 : 키티와 미키 부산 아트팩토리에 있었다. 말 그대로 공장이고 800평이나 되는 곳. 여러 작가들이 먹고 자면서 작업했다. 음식물 있는 곳에 쥐가 나타나기 마련. 하루는 작가들이 식당에 모였는데 느낌이 이상해 돌아보니 큰 쥐가 있다. 눈이 마주쳤다. 모두가 놀랐다. 쥐와 한바탕 전쟁에 들었다. 밀걸레며 빗자루며 다들 붙잡기는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거대한 쥐는 우사인 볼트보다 빨랐다. 쥐가 달려들면 다들 어디든 올라가려고 난리쳤고,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웠다. 쥐가 징그럽다. 왜 그럴까. 의문이 든다. 하루는 작업하다 뒤통수가 간지러워 돌아보니 한쪽 벽에서 나를 보며 기어간다. 순간,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이다. 무엇이 내 의식을 뒤집은 걸까? 크기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키티와 미키는 공장에서 쥐를 만났을 때의 상황인지 모르겠다. 미키 탈을 쓴 쥐가 귀여운 키티 탈을 쓴 고양이를 만났을 때의 상황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작가의 긴 에피소드를 축약한 것.) ● 공장에서 부딪힌 쥐와 나는 타부와 광기의 관계다. 그것은 또한 '때려잡자'로 떠들썩해지는 권력구조다. 작가는 쥐를 잡기 위한 이 웃지 못 할 싸움에서 사회의 모순을 간파한다. 쥐와 인간의 권력구조가 타부에 대한 광기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때려잡기의 구조라면, 사회적 약자와 강자로 비유되는 이 장면의 예화적 진실은 배려와 환대다. 예화적 진실을 위반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 마땅한다. 타부를 위반한 사람이 사회로부터 처벌을 받듯이.
"예화2 : 미키타워 작가로서 한참 갈증이 날 때 떠난 인도여행에서 보았던 인도 사원의 탑. 탑이 그렇듯 타워는 기념비적인 것이다. 어느 국가나 도시에도 하늘 높이 솟은 상징적 타워들이 있다. 부산타워, 남산타워, 에펠타워, 성경의 바벨탑까지. 세계는 최고의 타워를 쌓기 위해 경쟁하는 듯이 보인다."(작가의 에피소드를 축약한 것.) ● 이번 전시에서 '미키'는 최고를 지향하는 그야말로 '최고'의 결정체이자 상징물이다. 가장 적절한 예시가 「미키타워」다. 그는 이 작품에서 번민도 해탈도 없이 그저 익숙하게 규정된, 이미 그렇게 확정되어 버린, 공허하고 때로는 유쾌한 '웃는 미키'의 머리 탑을 표현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 탑인데, 미키 타워는 미키의 사리는커녕 미키의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다. 타워는 허상에 불과하다. 「킁킁.. 수상한 미키월드」는 그런 미키들의 세계다. 있으나 보이지 않고 보이지만 실체 없는 것들. 작품은 붉은 귀를 한 기념비적인 미키 두상을 중심으로 색색의 작은 미키들이 속닥거리며 웅성거리는 모습들이고, 그것은 사뭇 수상하고 불쾌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두상 뒤로 잔인하게 살육된 쥐들도 엿보이고, 큰 검은 코를 연상케 하는 물체 앞에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두하는 쥐도 있다. 불안과 공포와 시기와 질투와 음모와 배신이 들끓는 것 같다. 그러나 '수상한 미키월드'는 언제나 늘 그렇듯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기념비적 미키 두상에 의해 그런 단어들은 은폐되는 듯하다.
변대용의 조각들은 예화로 가득하고 그 가득함의 그늘에 세계를 이해하는 수수께끼의 단서들이 깔려있다. 생각보다 예화와 수수께끼의 진실은 어렵지 않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가 타전하는 진실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그의 진실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상실했거나 혹은 감추어 두었던 어두운 그림자를 닮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실상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낱낱이고 그 낱낱의 풍경들이다. 우리는 쥐가 판치는 세상을 살았다. 미키의 탈을 쓴 쥐의 신념 속에서 우리는 행복했고 꿈꾸었다. 빙하는 녹아서 강을 부풀리고, 강이 없는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곰의 재주를 상상하며, 말도 안 되는 세계의 세월을 견디었다. 그러니 잊지 말자. "'너'에 대한 주제는 타부에서 파생했고, '나'에 대한 주제는 광기와 관계가 있다. 타부를 위반한 사람은 정신병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 김종길
Vol.20111016h | 변대용展 / BYUNDAEYONG / 卞大龍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