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OCI YOUNG ARTIST

정소영_조태광展   2011_0928 ▶ 2011_1018 / 월요일 휴관

정소영_waterway_birch_가변크기_2011

초대일시 / 2011_0928_수요일_05:00pm

정소영展 / 『On the ground floor of the Geology Building』 조태광展 / 『그날 이후』

후원/협찬/주최/기획 / OCI미술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songamfoundation.org

정소영의 지오스케이프(Geo-scape) ●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 의사, 과학자, 나아가 철학자 등 이른바 예술가인 동시에 학자로 대접받거나 대접받기를 원했던 '작가'와 '시절'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르네상스시대 작가들이 그러했고 그들이 그토록 닮고자 했던, 철학적/조형적 전거(典據)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 작가들이 그러했다. 헤르메스상이나 헤라클레스상 등을 남긴 고대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이자 이론가,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도 그중 하나다. 그가 남긴 '비례론(Canon)'을 비롯하여 당시 작가들이 관심을 갖고 정리, 적용한 '원근이론', '색채론' 등과 같은 조형이론들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자연에 대한 예술가들의 철학적, 과학적 관심으로부터 비롯한 학문적 결과물이었다. ● 예술가들의 이러한 철학적 관심과 과학적 실천은 신비스럽고 다소 혼란스러운 자연과 현상의 베일을 하나둘 벗겨내고 이들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등 나름의 분명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왔다. 각 시대마다 예술가들은 각각의 시각과 논리로 자연 현상이 지닌 무질서와 질서에 대해 인공적 질서 체계와 탈질서 체계를 부여해왔다. 그러나 20세기 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과 과학이 명확히 구분되고 사회와 학문이 세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예술가들이 전과 같이, 뚜렷한 예술적/과학적 성과를 동시에 거두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과학적인 관심과 예술과 과학의 태생적 역학 관계가 개입된 작업들은 지금도 꾸준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격인 장 팅겔리(Jean Tinguely)의 실험이라든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백남준과 그 후예들의 영상작업, 홀로그램 기법을 도입한 알렉산더의 작업, CG, VR, 3D 작업 등 동시대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작업으로 이어져오는 전위적 조형실험들이 그것이라 하겠다. 이들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혼돈과 질서를 균형 있게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새로운 시각질서와 예술의 과학적 발전가능성을 꾸준하게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이 과거처럼 과학적으로 정리되거나 새로운 학설로 학계의 인정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예술에 과학적 방법을 원용하거나 도입, 확장시킨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통섭, 이른바 융복합의 시대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예술가들의 이러한 철학적/과학적 관심과 학문적 성취, 조형적 실천은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가능한 것일까. 본격 과학문명의 시대,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테크놀로지의 도입으로만 가능할 것인가?

정소영_chronology of construction_세라믹, 메탈_114×56×50cm / 220×185×190cm_2011
정소영_크리스탈, 나무, 돌, 체인_가변설치_2011

젊은 작가 정소영의 작업은 우주,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심, 이른바 지구과학(EDPS)적 관심에서 비롯했다. 특히 지질학적 관심(geological interest)이 두드러진다. 자연에 존재하는, 혹은 세상에서 경험하고 채집한,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떠낸 사물들의 물리적/심리적 부스러기, 각질, 지층, 껍질 등을 마치 지표조사 결과를 보고하듯 전시장에 부려놓는다. 그들을 통해 사물의 존재와 그것이 지녔던 본래 질서를 거꾸로 유추하고 강조하며 증명한다. 지표면과 단층, 분출 용암의 흐름 등을 매개로 자연 질서와 인공 질서 사이에서의 길항작용을 시각화한 최근 작업 역시 정소영의 그러한 지적 관심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작가의 이러한 관심은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세상과 자연의 질서에 대한 지구과학적 관심과 지질학적 호기심으로부터 비롯했다. 과학자를 배출한 집안 분위기도 그러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경험한 일련의 치명적 자연재해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발생한 우면산 산사태와 가까운 일본 및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예측할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 쓰나미 등과 같은 자연재해는 세상만사에 대한 작가의 지질학적 관심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작가에게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충격이었다. 평소 지구과학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캐스팅을 하듯 그것을 입체, 설치작업으로 떠내고 풀어온 정소영은 태고부터 지구의 지표면 아래, 깊숙한 그 어디를 도도하게 흐르듯 꿈틀거리고 있는, 이른바 대륙판과 맨틀 등과 같은 평소 눈에 보이지 않는 가공할 힘을 가진 존재를 생각하게 했다. ● 이러한 정소영의 관심은 인간이 현대, 문명, 과학의 시대를 거치면서 부여해온 세상의 모든 인공적 질서와 오래 전부터 그저 묵묵히 그리고 서서히 이어져 내려온 자연 질서에 대한 상대적 의문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해외 여러 곳에서의 생활과 각기 다른 저마다의 자연 지형에 대한 지구과학적 관심은 가변적인 것과 불변하는 가치에 대한 생활 속 관심으로 이어졌다. 자연이 인공 질서에 의해 부분적으로 제한되어 존재를 드러내거나 감추어지는 현상들, 자연 질서가 파괴되고 인공이 존중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다양한 형식의 작업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흙과 세라믹을 이용한 성형작업은 원시의 방식대로 초벌구이한 상태로 제시된다. 고온에서 구어지고 먹(墨)이 살짝 더해진, 모노톤으로 탈색된 정소영의 심리적 지층 단편(斷片)은 마치 오래된 화석처럼 일정한 경도와 표면질감을 획득한다. 높고 낮은 이런저런 지형들은 일종의 심리적 등고선으로 실제 자연지형도 물리적 인공지형도 아닌 우리네 마음속에 존재하는 정신적 지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풍파와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화강암의 표면과도 같이 부드러운 듯 거친 표정을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에 의해 쓸려 내려간 흔적이 드러나는 등 유기적인 흐름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정소영의 작업은 지구 내부에 상존하고 있는 굉장한 힘, 지층, 레이어 등에 대한 관심을 직간접으로 드러낸다. 정소영은 서서히 그리고 도도히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력과 공간에 주목했다. 현대도시는 일정한 계획 하에 구획되고 인공적으로 조성된다. 대부분 그리드나 변형된 격자, 방사형태 등으로 만들어진다. 두 공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작가 정소영은 이러한 공간들의 생성과 구성 그리고 진화과정에 대한 차이와 다름을 면밀하게 탐색하며 개입시켜나고 있는 것이다. ● 지구과학적인 지층과 지형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 나아가 사회의 현실적 지형에 대한 인식과 접목은 정소영작업의 주요 모티프다. 한마디로 정소영의 작업은 인공에 자연을 대입, 접목시키는 작업이다. 오랜 과거의 현실에 미래적 현재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지하 깊숙이 잠복된 지층율(律)에 지상의 현실을 교차시킨다. 그러나 자연을 모방하는 자신의 행위 역시 인공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정부분 받아들이고 고백한다. 아마추어 과학자 또는 지질학자, 예술가로서 자연과 현상에 대한 본질을 규명해보려는 정소영의 태도, 혹은 지적 관심은 자연을 모방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지난 미술 역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정소영_geo-construction_글레이즈 세라믹, 클레이, 시멘트_가변설치_2011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이 있다면 신비스런 자연 현상 속에서 또다른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다. 질서와 혼돈이 아름답게 공존하고 혼재되어 있는 자연은 인공적, 인위적 질서에 의해 존재 가치를 억압당하는 한편, 예술가와 과학자로부터 아름다운 질서를 부여 받기도 한다. 예술과 과학은 분명 가는 길이 다르다. 이를 테면 예술이 어떤 현상이나 본질에 대해 감성적으로 접근한다면, 과학은 분석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러한 상반된 방식과 태도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여전히 예술은 과학과 상조(相助)하고 있고 작가들은 때때로 과학적인 태도와 방법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도한다. 그러나 이들의 성과는 전술한 지난 시절 작가들의 지적 성취만큼은 아닐 것이다. ● 정소영은 이번 전시의 콘셉트인 지질학적 상상력을, 한편으론, 전시 공간이 일층, 즉 지층 레벨인 것에서 착안하기도 했다. 그가 소개하고 만들어낸 그라운드(ground) 개념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고 형성되는 지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지형(building geology)이거나 그 결과를 보여주는 구조적 지형(geological building)이다. 이들 지형은 자연지형과 인공지형을 포괄한다. 그의 작업에서는 이들 질서가 이른바 길항작용을 하며 각각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은 인공을 비집고 자연의 힘이 드러나는 형국이거나 인공의 질서를 통해 자연의 표정을 드러내는 방식 등이다. 이들의 조합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정소영은 이번 전시에서 인공의 질서 또는 새로운 지형을 통해 자연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감추는, 자연/인공 지형이 강조된 작업들을 소개하고 있다. ● 주지하다시피, 자연의 질서, 자연지형의 형성은 대단히 느리게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다. 반면 인공지형은 계획적이고 일방적인 동시에 빠르게 진행된다. 정소영은 이러한 빠른 흐름 속에 묻혀버린 가려진 자연의 지형, 질서, 표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인공 질서와 정해진 좌표에 의해 드러나는 자연의 어색한, 혹은 자연스런 표정과 인공의 질서에 의해 짓눌린 자연의 힘과 생성된 질서를 유추하는 수고가 필요한 이유다. 물길은 물이 흐른 길이다. 정소영은 현대도시 건설의 주요 패턴인 그리드 속을 유영하듯 헤집으며 흐르는 자연의 물길을 드러낸다. 나무, 자작나무로 떠낸 표정은 산업화된 인공의 지표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물이라는 존재의 흐름을 담았다. 그 어느 곳에도 흡수되지 못하며 겉도는, 잠복되어 있던 기운, 지상으로 밀고 올라온 기운이다. 물을 전혀 다른 질료인 섬유결로 치환하여 생명질을 연상하게 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라운드 레벨에 놓아두면 바닥의 문양처럼 보일,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벽에 부착된다. 역시 인공적 행위이기는 하지만, 자작나무의 결을 살리는 작업, 즉 사포를 사용하여 존재의 결을 살리는 과정도 주목된다. 인공과 자연의 상호개입과 길항, 인공의 선을 따라서 변형을 이루어온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연 존재의 모든 것은 어쩌면 인공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연의 모든 것을 다 따라할 수는 없지만, 정소영은 그것이 지닌 내적 규칙성을 따라 들어가는, 현대문명사회의 규율, 그리드를 따라 추체험하는 생활 속의 자연/인공 지형도를 그려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규칙, 틀, 규준, 질서 속에 자리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정소영_urban geology-concrete_C프린트_55×170cm_2011
정소영_flow I_C프린트_76×113cm_2011

정소영의 호기심은 건축과 공간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다만 땅을 매개로 서로 상반된 어프로치로 진행될 따름이다. 서서히 진행되는 자연의 지형과 표정변화 그리고 인공적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배치하는 인스턴트적인 집짓기라는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정소영은 이 두 공간에 사는 우리들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작가에 다름이 없음이다. 이 둘을 서로 대비시키거나 접목시키는 작업이다. 사실 이것도 아이러니다. 따지고 보면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도 인공적인 것이고 나아가 예술도 억지스러운 것이다. 물이라든가 바람 등이 훑고 쓸고 지나간 시간의 물리적 흔적과 퇴적, 궤적도 보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물질을 통한 비물질적 기운, 즉 지표면 하부에 내재된 기운을 반추하게 한다. 지표에 드러난 세월의 흔적과 표정을 강조한다. 들어남과 드러냄, 물리적, 인공적, 심리적 매스를 부여하며 기와를 굽듯 조각편처럼 떠낸다. 기와를 얹어 나가듯 하나하나 차곡차곡 더해나간다. 이런저런 삶의 지형들을 채집해서 특징적인 부분들을 남긴다. 이러한 작업은 사진이라든가 드로잉 등과 같은 평면 작업으로 남기도 하고 입체화되어 제시되기도 한다. 동네 골목의 배관 공사 흔적,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삶의 단면 등 다양하다. 정소영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표정과 기운이다. 때문에 오늘도 그러한 기운을 포착하고 있다. ● 결국 정소영의 작업의 모티프는 일상인 셈이다. 그는 다름 아닌 일상의 지형을 떠내고 있다. 흔히 일상을 소재로 한 작업은 진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류가, 예술이 존재하는 한 부정할 수 없는 영원한 화두는 일상일 것이다. 정소영은 일상에서 건져 올리듯 지층 아래로부터 지표면으로 건져 올린다. 현상적 삶의 표면으로 밀고 올라온 도도한 삶의 기운을 드러내고 담아낸다. 새삼 사소한 것의 힘을 본다. 주의 깊게 관찰하며 얘기를 건넨다. 이들의 지각, 지층, 지형과 구조를 탈각하듯 응고, 성형한다. 흙, 지표, 표면, 표정, 지각, 껍질 등 인류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어 간직한 표정과 닮았다. 작가의 호흡은 표면에 스민 기운과 배어난 표정으로 침투하고 삼투된다. 정소영의 작업은 흙으로 빚어낸 인조석 그리고 물, 바람이라고 하는 물질과 비물질적 기운들이 물 흐르듯 그러나 단단한 표정으로, 오롯이 배어 있는 자연/인공과 나누는 이야기다. 작업에서 읽히는 연성과 경성 그리고 유기적, 무기적 대조가 마냥 흥미롭다. 일상을 캐스팅하듯 떠낸 정소영의 작업을 주목하는 이유다. ■ 박천남

조태광_다시 만난 세계_리넨에 아크릴채색_193.9×260.6cm_2011

그날 이후, 신세계의 풍경 ● 비극이다. 조태광의 회화는 인간의 비극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자수나 퀼트의 색색 바느질처럼 화면에 꼼꼼히 한 땀 한 땀 풍경의 세목들을 수놓았다. 가만히 풍경을 응시하노라면 고대 마야의 신전에 새겨진 지구멸망의 예언이나 이집트 파라오의 투탕카멘 부장품,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 예언이 떠오른다. 고대 예언의 화살은 인류멸망이 아니라 지구멸망에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예언은 2012년으로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다. 도래할 예언이 적중할 것인가는 차지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지구멸망이라는 완전한 종말을 예언했단 점이다. 조태광이 새겨 넣은 회화적 예언의 실체는 고대의 예언과 달리 인류멸망을 다루고 있다. 인류멸망이라 하나 멸망의 참혹한 현상이나 공포를 그는 재현하지 않았다. 회화 속 비극의 풍경은 '인간의 부재'에 있다. 그의 회화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은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적(的)'이라는 것은 비현실/초현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단 얘기다. 비현실과 초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그 풍경이 지금 여기의 실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과 초현실이라고 해서 그 풍경이 지금 여기의 실재가 아닌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만이 비극일 뿐인 이 비극을 비극이라 불러야 할지 예언의 징후로 해석해야 할지 멸망의 슬픔을 따져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 '비극'은 인간 중심의 시선이다. 인간의 부재는 오직 인간만의 비극이므로. 인간 밖의 시선으로 보면 이 풍경은 황홀일 수 있다. 인간이 없는 풍경은 자연의 생장이 온전한 것이므로. 인간은 고대로부터 스스로의 부재를 수없이 예언했다. 예언의 실상을 '멸망'으로 몰아붙여 지구에서의 완전한 부재를 떠올린 것은 인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멸망을 예언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의 욕망이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결국 파국적 종말을 불러들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숱한 고대의 예언은 욕망의 비극에 관한 것이다. 인간들은 비극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우주의 거대한 힘의 역능에서도 비롯될 것이라 상상한다. 지구의 온난화와 세계 곳곳의 이상 기후 현상을 비롯해 태양계 행성들에서 발생하는 원인불명의 판독 불가능한 이변들……. 그 외에도 『2012년 지구멸망』에서 제시된 바 있듯이 "2002년 지구를 향해 접근하는 거대 천체를 탐사하는 러시아의 극비 프로젝트 'NORLOK'에 의해 촬영됐다는 '미지의 행성×'와 "지구멸망에 대비해 엄선된 인간만을 타 행성으로 이주한다는 계획을 가진 미국의 '프로젝트 노아'에 관한 이야기"들은 비극 이후의 지구를 황홀하게 떠올린다. 인간은 인간의 부재가 곧 지구의 종말일 것이라 상상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인간의 오만이다. 인간의 부재는 단지 인간의 부재일 따름이다. "인류멸망 그 후-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으로 알려진 「LIFE AFTER PEOPLE」이란 다큐영화를 보면, 하루 한 달 1년, 5년, 10년, 100년, 500년, 10,000년 후의 지구가 어떻게 생존하는지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자연이 자연을 복원해 냄으로써 지구는 인간이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서서히 그러나 힘차게 가꿔낸다. 모든 생명이 부활하듯 살아 올라서 빛이 만발하다. 그 삶이 경이롭고 눈부시다. 영화는 말없이 웅변한다. 인간의 비극은 오직 인간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비극적 파국의 확산이 지금 여기 지구 전체에서 도래할 수도 있음을.

조태광_그 날 이후_리넨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1
조태광_그 날 이후_리넨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1

조태광의 회화는 '그날 이후'로부터 시작된다. 그날 이후란 비극적 파국이 종료된 날 이후를 뜻한다. 이때 비극적 파국은 물의 대재앙이다. 노아의 대홍수를 기억하듯이 그의 회화는 물의 재앙이후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그의 회화는 물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 물의 상징으로부터 의미를 획득한다. 첫 번째 의미는 종교성이다. 구약에서 대홍수는 신의 심판을 상징한다. 신은 인류의 타락을 물로서 심판했다. 노아는 신의 계시로 120년에 걸쳐 길이 138m, 너비 23m, 높이 13.8m의 방주를 만들었다. 노아의 가족 8명과 한 쌍씩의 동물들이 살아남았으나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전멸했다. 이러한 신의 심판과 노아의 방주는 조태광 회화에서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그 날 이후」 연작 두 점은 물에 잠겼던 세계의 풍경을 단조롭게, 관념적으로 그러나 새싹의 표정을 가진 나무들로 화려하게 그리고 있다. 대지에 박힌 나무기둥 위에 구름과 비둘기를 앉혀 놓은 것은 '언약의 징표'를 구현하기 위함일 터.

조태광_다시 처음으로_리넨에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11

두 번째 물의 의미는 심판에 대한 현존성이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든 자연재해든 끝없는 인류의 욕망에 대한 심판의 현존성. 그런데 그의 회화 전체를 살피면 그 현존성의 실태가 신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개의 풀장」은 물의 징조를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풀장은 호수나 바다가 아니라 인공구조물이다. 이 구조물 위에 붙잡혀 있는 구름은 물을 뿌릴 것이고 풀장은 넘쳐서 세상을 온통 물로 뒤덮을 것이다. 「소리 없이 들리는」에서 대홍수로 물을 쏟아 내리고 있는 호수는 자연이지만 예언의 실현을 위한 예비된 호수일 가능성이 높다. 거대한 물의 심판이 시작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물이 물이 아니라 예언의 실현임을 깨닫는다. 이때 물은 재앙인 것이다. ● 예언의 실현, 그는 왜 구약의 예언을 회화로 실현하고 있는가.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물의 심판이 왜 그의 회화의 주제가 되었는가. 많은 작품들이 물과 관련이 있으나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원자로의 공포를 다루고 있는 작품도 있다. 올해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자로 폭발의 공포를 떠올린다. 그런데 대지진에 의한 쓰나미와 원자로 폭발도 물과 관련이 깊다. 원자로는 대부분 물의 유역에서 물을 다량으로 소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도 물의 재앙을 은유화 한 것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캔버스를 이어서 제작했다. 두 개의 화면에 두 개의 원자로 속을 그렸다. 둥근 원통 모양의 붉은 원자로가 위험을 내재하고 있어서 위험의 촉발이 언제든 가능한 재앙의 시한폭탄이라면, 그 위에는 위험의 크기를 가중시키는 물의 공간들로 그려지고 있다. 원자로의 폭발은 「소리 없이 들리는」과 유사한 물의 호수를 들어 올려서 거대한 물의 쓰나미를 일으킬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모든 작품들은 물의 재앙 즉 심판과 관련이 깊다. 우연일 터이지만,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여름은 유래 없는 물 재앙으로 몸살을 앓았다. 한강이 범람하지는 않았으나 그 수준에 육박함으로써 도시는 거의 마비가 되었고, 많은 도시가 침수되고 토산이 무너져 내렸으며 계곡이 터졌다. 이름난 계곡의 풍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들은 물에 쓸렸고 쓰나미에 덮혔다. 구약의 재앙이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신의 분노였다면, 현대의 재앙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재앙이다.

조태광_소리없이 들리는_리넨에 아크릴채색_162.2×260.6cm_2011

조태광의 회화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탐욕을 문제 삼는 듯이 보인다. 탐욕의 실체 따위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그린 풍경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라는 것은 이런 의혹을 진실에 더 가깝도록 생각하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는 왜 그의 풍경이 '없는 풍경(비현실/초현실)'을 섬세하게 제시하면서 '있는 풍경(현실/지금여기)'을 상상하도록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이해하게 한다. 풍경은 숲이 아닌 나무들의 기립이다. 씨알 같이 생긴, 그래서 모든 나무들의 형상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나무들. 그 나무들로부터 세계는 새로운 탄생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듯하다. 대지와 하늘이 하나로 이어진 곳에 열린 우주 홀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무화시키는 홀이 아니다. 그 홀은 고치와 같고 자궁과 같은 우주다. 생명이 열려서 모든 씨알이 툭툭 터져 나가는 시원의 숲이다. 그 숲에서 나무들은 새 세상을 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풍경 속의 초현실적인 홀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비현실과 초현실의 풍경과 이어진 현실 속의 풍경. 그 현실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될 때, 세상은 새로워 질 수 있을 테니까. ● 「찬란한 영광을 위하여」는 그러나 이 파국적 비극이 끝난 이후의 세상을 보여주는 듯해 우울하다. 아니 이 우울의 실체는 '그날 이후'의 세상이 결코 희망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과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녹색의 거대한 비둘기 동상, 그 앞의 흰 물줄기, 내려앉은 비둘기 몇 마리, 옆으로 수조와 뒤로 울타리 지운 나무들. 비평적 상상을 더하면, 세상을 구원한 비둘기는 비둘기의 독재를 성취한 듯 서 있고, 나무들은 울타리 안에서 자란다. 물은 관리되고 비둘기는 더 이상 날지 않는다. 이 화면에서 '찬란한 영광' 따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이 찬란한가? 비둘기 머리에 박힌 날카로운 압핀처럼 자유나 신세계의 희망은 어지럽고 현기증나는 무엇일지 모른다. 평화는 비둘기의 배 속에서 비만으로 부풀어 오르고 흰 물줄기는 재앙도 심판도 될 수 없는 그저 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세계는 구획되고 조정되며 관리될 뿐이니까. 자유를 관리하고 평화를 관리하고 희망을 관리하는 신세계의 풍경은 과연 찬란한가! ■ 김종길

Vol.20110928j | 2011 OCI YOUNG ARTIST-정소영_조태광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