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훈_이윤展   2011_0919 ▶ 2011_1106

박승훈_TEXTUS 017_디지털 C 프린트_100×125cm_2009

초대일시 / 2011_0929_목요일_12:00pm

주최 / 카이스트 경영대학 기획 / 이현서울갤러리 www.leehyungallery.com

관람시간 / 09:00am~10:00pm

카이스트_리서치 앤 아트 KAIST_Research & Art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2동 207-43번지 KAIST 테크노 경영대학원 SUPEX Hall 2층 Tel. +82.2.958.3223 www.kaistgsm.ac.kr

박승훈·이윤 2인전-'매체를 대하는 유연한 태도(Flexible Attitude towards Medium)' ● 현대미술의 여러 특징들을 열거할 때 새로운 재료 그리고 형식의 탐구와 함께 전통 미술형식에 대한 실험적 변형을 들 수 있다. 특히 젊은 작가들이 갖고 있는 주제 및 형식에 대한 실험 정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는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전해 준다. 이번 카이스트 2011년 여섯 번째 전시작가인 박승훈, 이윤 두 작가 역시 전통적 매체인 사진과 캔버스를 기존의 방식 그대로 사용하기 보다는 그들 자신이 갖고 있는 미학적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 독창적으로 변형시켜 나간다. ● 박승훈은 2008년부터 16mm 영화용 필름을 사용한 '텍스투스(textus)' 시리즈를 통해 씨줄과 날줄이 엮인 독특한 이미지의 작품을 선보인다. 직물을 뜻하는 제목처럼 작가는 가로, 세로로 엮은 영화용 필름으로 사물을 조각나게 여러 번 촬영하고, 그것을 다시 잘라 엮는 오랜 작업과정을 거친다. 분할된 하나의 대상은 다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여러 층의 시간과 공간의 흔적이 중첩된 결과물로 탄생한다. 기본적으로 사진이란 매체는 사각형의 틀에 포착된 정지된 이미지를 담는다. 그러나 박승훈은 이 전통적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지각된 대상에 담겨진 많은 이야기들을 엮어내어 또 하나의 단단한 조직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기억의 편린들이 합쳐져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미지가 남아 있듯이 모자이크처럼 작은 정사각형의 이미지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풍경과 대상들은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 캔버스를 고정된 하나의 평면 매체로 이해하기보다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통해 캔버스에 색을 입히고 잘라내어 그것을 다시 꿰매는 입체적 회화를 선보이는 이윤 역시 미술형식에 대한 실험적 자세를 견지한 작가다. 이윤의 작품을 언뜻 보면 미국의 대표적 추상표현주의자인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같은 즉흥적이면서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 이윤의 작업은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바느질과 같은 오랜 시간의 수공예적인 노동력을 요구한다. 물감이 어떤 강한 힘에 의해 캔버스 위로 떨어진 것 같은 역동적 이미지들을 그대로 오려서 부피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른 캔버스 위에 새롭게 재구성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대중에게 어떤 철학적이거나 개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시각적 결과물 그 자체를 대면한 대중들이 그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각자의 이야기를 찾아가기를 희망한다. 색과 형태, 그리고 그들이 서로 화합하여 만들어내는 음악적 리듬, 상상의 내러티브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대중을 기다린다. ● 철학자 아서 단토는 그의 저서 '예술의 종말 이후'(1984)에서 앤디 워홀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지각적 차원의 대상이 아닌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변화하였음을 지적하며 예술사의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여전히 예술은 작품 그 자체로 지각되고 논의되며, 작가들은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적 사유와 함께 예술형식에 대한 실험적 여정 역시 중단하지 않고 있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승훈, 이윤 두 젊은 작가가 지닌 창의성과 실험정신은 동시대 미술이 지닌 여전한 미적 가능성을 예견하게 한다. ■ 카이스트_리서치 앤 아트

박승훈_TEXTUS 024_디지털 C 프린트_100×125cm_2009

TEXTUS (직물-woven fabrics) (2008~2011) ● 텍스투스는 text의 어원이 되는 textus(직물)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직물의 씨줄과 날줄이 합쳐져 옷감이 되듯 'TEXTUS'는 대상을 얇은 영화용 필름으로 조각나게 촬영하여 해체하고 이를 다시 물리적으로 필름을 엮어 재구성한다. 텍스투스는 직접 경험하거나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해 온 기억의 대상을 찾아가 촬영하는 방식을 취한다. 기억 속 영화 장면이나 신화화 된 대상들은 16mm영화용 필름 에 여러 시공간으로 엮여 서로 간섭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작품은 기억의 조각을 찾아가는 여행일지와 같은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따뜻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여정을 함께 공유하고픈 의지를 가지고 있다. ■ 박승훈 회화가 '첨벙!' 하고 떨어졌다. Splash! ■ 이윤

박승훈_TEXTUS 038-1_디지털 C 프린트_125×100cm_2010

'강박적 '자기 치유(self-healing)'의 즐거움' "우리는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즉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믿던 때를 모두 잊은 것 같다." (에드거 앨렌 포) ● "아름다움은 발작적일 뿐만 아니라 강박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 (할 포스터) ● 니체는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처음 낙타가 되고, 낙타에서 사자, 마침내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의 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사자가 되고, 어린아이가 되는가? 특히 예술가는 정신이 어떻게 어린아이가 될 것인가에 주목하게 된다. ● 니체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도덕적 존재이기도 하다. 사자의 적수였던 용은 어린아이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사자에게 힘든 전투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물론 어린아이는 무기는 웃음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굴러가는 수레바퀴인데,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이처럼 창조의 놀이에는 아이와 같은 신성한 긍정이 필요한 것이다. ● 여기 어린아이의 세계에 심취해 있는 젊은 작가 이윤의 작업이 있다. 이윤은 진정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처럼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일까? 아니면 퇴행으로 자기의 강박적 욕구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 선회하고 진화할 것인가?

이윤_Splash!_Blu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62.5×261×11cm_2011

즉흥의 내적 차원: 퇴행과 승화 ● 이윤 작업의 기본 모티프는 드로잉, 추상적인 형상, 색채, 재단, 봉합, 배열과 조합 등이다. 먼저 작업은 두 가지 측면의 드로잉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째,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마음 혹은 손이 가는대로, 점, 선, 면, 색채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두 번째, 어떠한 주제를 갖고 그것이 연상시키는 형태들을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즉흥성'을 근간으로 한다. 하나는 어떤 지시도 없는 무의식의 자동기술적 드로잉이고, 다른 하나는 연상에 의한 자동기술적 드로잉이다. ● 즉흥성의 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즉흥작업은 예술과 삶 사이의 인위적 장면을 무너뜨린다. 이 때 작가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되는데, 그 자유는 유쾌하면서도 구체적이다. 더군다나 즉흥적으로 스케치를 하고 드로잉을 하는 시간만큼 창조에 몰입되는 순간은 없다. 어쩌면 모든 예술은 즉흥적이다. 즉흥은 창조의 열쇠인 것이다. 그렇다면 즉흥성의 심리학적, 정신분석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로의 퇴행이 아닐까! 니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술가는 자신 안의 어린아이와 논다. 즉흥작업은 우리 내면의 어린아이의 마음, 원시의 심성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 회복을 가리켜 심리분석가들은 '에고가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퇴행'이라고 부른다. 위대한 예술의 창조는 잘 훈련 받은 성인 예술가가 어린아이의 순수한 놀이의식으로 돌아갈 때 얻어진다. 이러한 놀이 의식이 안겨주는 독특한 느낌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 다음 단계는 이런 즉흥성과 자발성에 근간한 드로잉을 가지고 입체로 제작한다. 즉흥적인 드로잉이 지난한 과정의 자르기, 칠하기, 꿰매기를 거쳐 하나의 입체적 오브제로 탄생하게 되면, 다시 이것이 하나의 유니트가 되어 더 큰 캔버스 위에 배열과 조합을 거쳐 구성된다. 캔버스 위의 오브제들은 이차원의 드로잉이 삼차원의 입체로 바뀌는 까닭에 예기치 못했던 조형상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불투명하고 예측할 수 없는 캔버스 위에서의 작업은 더 치밀한 계산과 구성이 요구된다. 무질서하게 보이나 질서가 있고, 비유기적으로 보이나 나름의 유기적 메커니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 이윤이 이러한 작업을 선호하고 천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술사의 대가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만남은 자신의 무의식의 취향과 대면하는 일이다. 언젠가 작가를 크게 감동시켰던 앙리 마티스, 프랭크 스텔라,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은 자신의 작업에 동기부여와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특별히 작가는 후기 마티스와 후기 스텔라의 영향을 자신의 작품에 인용한다. 예컨대 천진난만하고 명쾌한 마티스의 '종이 자르기' 작업과,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보여준 스텔라의 다이나믹한 '모비딕 연작' 등이 그것이다. ● 무엇보다 이윤이 이런 입체작업을 선호하고 천착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술의 공감각적인 측면을 노정하여 관자로 하여금 다른 상상력과 영감의 세계를 환기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이 작품이 단순히 시각적이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윤의 작업은 일단 시선을 평면에 가두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들쑥날쑥 깊이와 넓이를 따라 유동하게 되며, 마치 눈으로 쓰다듬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즉 메를로-퐁티 식의 '촉각하는 시선'이라는 눈의 메커니즘을 마음껏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음악적이길 원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작품이 즉흥환상곡(혹은 교향곡)처럼 리듬과 운율을 느끼게 하는 장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눈으로 듣는 노래라고나 할까! 어디 그뿐이겠는가? 우리가 이윤의 작품에서 소리뿐만 아니라 향기까지 맛볼 수도 있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그다지 머지않은 일은 아닐까!

이윤_Splash!_Yell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30.3×162.2×11cm_2011

봉합 그리고 반복강박 ● 예술은 강박관념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통상, 강박증은 존재하지 않는 실체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본다. 역설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불안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에 대한 일종의 거부 혹은 반란일 수도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반란은 궁극적으로 강박증자 자신을 향하여 의무-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라는 강제노역에 복무하게 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강박증을 '의무의 감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 이윤의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느질 즉 봉합이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무용했던 물건을 매우 유용한 것으로 변모시키고, 파괴된 것을 다시 이어 새로이 만들어주는 '바늘의 관용'을 매우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에게 바느질은 곧 치유의 행위를 뜻하고,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인물상들은 화해와 회복을 상징했던 것이다. 이윤 역시 부르주아처럼 카르마를 벗고 해탈을 꿈꾸는 것일까? 이윤은 왜 강박적으로 바느질에 천착하는가? 바느질이 주는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봉합의 심리적․ 미학적 의미를 정교하게 들여다보는 일만이 그의 작업의 근간을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 먼저 바느질의 메커니즘을 보면, 그것은 잇기 위해 뚫는다는 이율배반적이며 모순적인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처를 내면서 상처를 감싸는 것이다. 심리학, 미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상처의 치유이고, 인내의 시간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디스틱한 행위가 스스로를 향해 있다는 측면에서 오토-마조히즘(auto-masochism)적이기도 하다. ● 봉합은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동일한 것의 반복을 강박이라고 부른다. 이런 강박적 행동은 어떻게 하여 생겨나는가? 다소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모든 강박적 행동에는 일정 부분의 트라우마의 귀환과 관련되어 있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든 기억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사후에 트라우마가 된 기억만이 억압된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억압된 것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는 언제나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그것은 반복될 때마다 불쾌하거나 충격으로 다가온다. 억압된 것으로써의 트라우마는 항상 강박적으로 반복하게 되어있다. 반복은 트라우마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유년기의 상처들은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기억되지 못한 채 단지 환상이나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반복되곤 한다. ● 주지하듯 바느질은 반복강박인데, 이때의 반복은 늘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 그러니 강박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반복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반복 그 자체이다. 이윤이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보다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반복강박을 '강박적인 반복충동(compulsion to repeti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의 충동은 일반적인 충동과는 달리, 좀 더 긍정적인 심리적 에너지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이윤의 작업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봉합은 트라우마의 회귀를 대면하는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잠재된 고통스런 기억을 끄집어내 형상화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고 삶의 통제력도 되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또한 봉합은 보편적으로 몰입과 집중이라는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빠져드는 몰입은 퇴행의 시간이다. 몰입은 집중하는 주체와 대상이 뒤섞이는 상태다. 몰입은 에너지를 응집하는 동시에 방출하는 것이며, 긴장인 동시에 이완인 것이다. 더불어 몰입은 자아를 완전하게 방기할 수 없다는 면에서 무의식적이기도 하고 의식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영원한 긴장 상태인 동시에 긴장 해소의 순간의 맞물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입이 개입되는 봉합이야말로 놀이인 동시에 노동이 되는 것이다.

이윤_Drawing Sh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0×15cm_2011

의식(ritual): 놀이와 노동의 경계? ● 강박적으로 되풀이 되는 반복적인 작업은 놀이와 노동 사이를 오간다. 노동과 놀이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상상력의 차이다. 상상할 때 정신은 노동을 하지 않고 놀이를 하게 된다. 상상력이 개입된 놀이 안에서 모든 규율과 정의는 길을 잃고, 도덕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아무리 힘든 노동이라도 즐기는 마음으로 하면 놀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놀이에는 의식(ritual)의 진지함도 포함되어 있다. ● 작가에게 작업과정은 어느새 혼탁한 마음, 혼란스러운 상태를 잠재우는 의식과 같은 것이 되었다. 바느질뿐 만 아니라, 작가의 모든 작업의 과정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포기하게 하며, 자신의 불완전함을 잊게 해주는 의식이 된 것이다. 이 때 의식은 감각과 사고를 하나의 행동으로 집약시킨다. 이때만이 의식이 명상이 되며, 이 명상의 상태는 예술로 승화된다. 예술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성한 창조성의 순간, 즉 즐거움, 자기발견, 내적인지라는 능력이 부여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로써 사람은 사라지고 예술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 사실, 창조성은 발견된 결과보다 탐색과정에서 더 많이 존재한다. 이윤 역시 열정적인 반복, 연습에서 쾌락을 얻는다. 물론 이런 반복적 행위에도 나름의 목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놀이는 그 자체로 만족감을 주는 것이지 다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조건이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은 노동보다는 놀이의 주체가 되어 현실과는 다른 공간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그 공간의 신성한 지배자인 어린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 어쩌면 작업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곧 의식이 되는 경지라면, 이윤이라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조력자일 뿐이다. 어떤 진정한 작품들은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이윤 역시 그런 경지를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으니까, 일정부분 자신의 작품의 생명과 순리를 돕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이윤은 자신의 작업 속에서 영적 공감의 시간, 즉 마법 같은 의식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그곳의 여사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 좀 더 낯설고 낯설기를!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과 일치한다. 적어도 나는 예술은 마치 진리가 드러나듯이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믿고 싶다. 바로 진리의 그리스어인 '알레테이아(aletheia)'의 원래 뜻이 '탈은폐' 혹은 '비은폐'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술이 이런 방식으로 드러날 때, 니체가 말한 '천개의 길, 천개의 눈'이라는 해석의 경지가 열리는 것이다. 예컨대 작품이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어, 볼 때 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나는 경지 말이다. 물론 그런 상태는 모든 예술가들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신의 경지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윤의 작업에 나타난 노동의 그림자를 보면서 대견스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모순된 경험을 하게 된다. 노동집약적이고 성실함이 기본이 되는 작품을 보고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결함은 작업이 주는 메시지와 철학이 간과되고, 그저 형식만이 노출되어 단순한 노작(勞作)으로만 치부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수잔 손탁의 말처럼, 예술에서 의미를 찾지 말고, 예술을 그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는 점은 절대적으로 수긍이 간다. 그러나 수잔 손탁의 아포리즘을 조형예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예술에서 의미를 찾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술의 형식 그 자체가 그대로 예술가의 철학과 메시지를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총체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더불어 이윤에게는 현대미술의 기본적인 '낯설게 만들기'라는 기법의 구사에도 좀 더 진화된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니까 작가는 좀 더 내면의 억압된 것들을 마음대로 끄집어내고, 상처내고, 요리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때만 작품은 좀 더 생생하게 날 것의 감각으로 관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과 공감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 가장 절실하다.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 자기에의 배려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배려의 메커니즘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의 발견이 행운처럼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사실, 예술은 자신의 결여를 미학적으로 봉합하는 일이다. 이제 이윤은 낯익은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낯선 것들과 대면해 보는 시간, 자신의 감정을 정교하게 발산할 수 있는 좀 더 성숙한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더불어 감각과 사유가 따로 놀지 않고, 경계에서 춤을 추듯 작품이 되어가는 단계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과 실험이 개진될 것으로 보인다. 이윤은 앞서 말한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진지하고 영리한 작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의 진지한 열망은 이미 진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유경희

Vol.20110925i | 박승훈_이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