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YAP2011:스펙타클의 사회

2011_0916 ▶ 2011_1006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916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 강원제_강주현_김신혜_김여운_김정향_김현준 배윤환_신기혁_이지영_정치구_하명은_하지훈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B,C공간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Ⅰ. 1. 현대사회는 철저하게 자본의 축적을 목표로 운영되는 사회이다. 더불어, 사회는 교묘하게 이미지의 정치학을 이용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누군가의 자본 축적에 동원되는 노동자이며, 사회나 집단, 혹은 자본가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열광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소비자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와는 상관없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청중의 심리상태를 갖는다. ● 2. 스펙타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 동시에 그것의 위력은 자본의 음영이 드리워지는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쳐 발휘된다. 자본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스펙타클이라는 거대한 축적물로 귀결된다. 스펙타클은 특정 대상이나 독립된 이미지이기 보다는 사회의 이미지들에 의해 조작되어 형성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그것은 이미 관념적 이미지의 범주를 넘어섰고, 정치, 미디어, 문화, 철학을 지배한다. 동시에 개인의 사회활동과 대인관계는 물론 삶의 목표와 세계관까지도 설정해 준다. 우리들은 스스로 자아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단 두 가지 수식어로 자신을 손쉽게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자 이거나 혹은 소비자. 중간은 없는 것이다. 실로 숨막히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삶의 목표나 방향은 없다. 오직 많이 쓸 수 있도록 많이 버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이다. ● 3. 21세기의 대한민국은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닌 소비하기 위한 생산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 버렸다. 잉여 된 생산은 대상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필요 여부를 되돌아 볼 시간을 주기도 전에 재빨리 소비 욕구를 먼저 자극한다. 물론, 소비한 것을 집에 돌아와 포장을 뜯어 확인하며 후회하기도 전에 또 다른 소비의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소비에 의해 행복하게 통합되어 있는 사회라는 이미지 속에서, 진정한 분열은 다음 번 소비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보류될 뿐 이다.(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현실문화연구) ● 4. 이처럼 스펙타클은 모든 현대인을 프로레타리아화 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부득이하게 우리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임금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동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없다. 모든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차이점은 얼마나 더 받느냐, 덜 받느냐 일 뿐이다. 달리 말해, 자본가의 재산을 많이 불려 주느냐, 적게 불려 주느냐의 차이이다. ● 5.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든 행위, 이를 테면 밥을 먹거나 공부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는 따위의 그야말로 일련의 모든 행위들은 소비가 주를 이루며, 간헐적인 생산 행위 마저도 사실은 또 다른 소비를 위한 생산에 불과하다. 더 이상 우리들은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주어지는 것들에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 ● 6. 여자답다, 잘생겼다, 밝은 색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값 싼, 청렴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공명한, 활발한, 좌파, 모성애를 느끼다, 학생 답지 못한, 똑똑하다, 고급스럽다, 청담동 며느리, 허니문, 밝은 미래… 등등의 수식어들을 조심해야 한다. 모두 스펙타클이 만들어 낸 이미지의 허상이므로. ● 7. 욕망과 결핍은 뚜렷한 근거 없이 찾아온다. 심지어 그것들은 대부분 복사된 이미지를 통해서 허상으로 다가온다.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 이다.(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한길사) 진실을 알려고 하는 행동이나 욕구는 마치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 ● 8. 보고 듣고 느끼는 바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초라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리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내 것으로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가열차게 노동하고 생산한다.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지 못하고 도리어 현실을 철학화한다. 우리는 – 모든 노동자는 – 스펙타클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이상적 삶'이라는 뜬구름을 잡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그렇게 죽어간다. ● 9. 스펙타클의 사회는 스스로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매체를 사용한다. 매체는 사회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우뚝 서있다. 자본가와 정치가와 언론은 매체를 이용해 그들의 영역을 영속시킨다. 그들의 프로파간다에 의하면, 유토피아는 분명 존재하고 내가 앞장서고 여러분이 열심히 노동을 해주면 멀지 않은 시일 내에 그 유토피아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그들의 가면놀이에 속아 넘어간다. 그들은 항상 우리보다 영특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다짐을 하건만 역시 매번 속아 넘어간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테제는 민주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 양쪽에서 모두 관찰된다. ● 10. 그렇다. 우리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스펙타클은 너무도 거대하고, 우리는 상대적으로매우 작은 존재이다. 이 짤막한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에게는 컴퓨터, 인터넷, 웹사이트, 문서 작성 프로그램, 서적, 에스프레소, 담배, 에어컨 이라는 수십, 수백 가지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낳은 산물들을 옆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펙타클을 알고 인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삶의 방향과 진실, 그리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매우 명확하다. 매트릭스 안에 갇혀 사는 우리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존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우리 자신만이 찾을 수 있다.

II. 올 해로 4회째를 맞이하는 IYAP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가 매 해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역량 있는 작가들을 선별하여 소개하는 연례 기획전이다. 과거의 경우 포트폴리오 공모와 미술계 관계자의 추천, 그리고 자체 선별 등을 통해 모집하였으나 2010년부터는 온전히 인터알리아가 자체적으로 선택한 작가들만을 선별했다. 그런 이유로 참여 작가의 인원이나 장르의 다양성 등은 확실히 예년에 비해 다소 축소되었다. 대신 좀 더 함축적이고 견고해졌으며 명확하게 작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IYAP은 참여 작가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나 혹은 사회와 미술계가 동시대 아티스트를 바라보는 시선 등에 대한 다소 중의적 관점에서의 논지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금번 『IYAP 2011 – 스펙타클의 사회』는 자본 우선 사회 속에서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항해하며 젊은이들이 마주치게 되는 삶의 편린들을 나열해 본다는 명확한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매 순간 스펙타클이 쏟아내는 파편들을 최전방에서 맞으며 살아가는 젊은 예술가들은 과연 어떠한 감정으로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또한, 그러한 경험과 관점을 통해 불사른 예술혼은 어떤 방식으로 작품으로 표출되고 있는가. ● 해석과 판단은 물론 관람자의 몫이다. 다만, 앞서 꼭 주지하고자 하는 바는, 이번에 인터알리아가 선택한 12인의 작가들은 공통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섣불리 작가들의 이념이 스펙타클인가 反스펙타클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상황은 괄목할 만하다. 이들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거나, 혹은 그 반대편에 그대로 안주해 있지 않고 정확하게 접점에서 양쪽을 모두 주시하고 있다.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 스스로가 선택하여 발을 내디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야 말로 기 드보르가 그토록 원했던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 정체성을 찾는 행위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들이 소비를 목적으로 작품을 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고, 사회적 현상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철학을 대중에게 설파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충분히 포스트 상황주의자(1957년 기 드보르를 중심으로 유럽의 지식인과 전위 예술가들이 설립한 집단으로 수동적인 소비문화를 비판했다. 상황주의자들은 예술 자체를 스펙타클의 사회가 낳은 산물로 여기며 지배계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노동행위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물의 유통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예술의 생산 목적과 과정은 간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겠다.

강원제_Keith Haring-icons_캔버스에 유채_80×91cm_2011

III. 강원제 소비 사회가 배출해낸 부스러기들의 무덤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동심의 이미지. 강원제는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의 그늘에 가려져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순수한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용도를 상실한 대량 생산품들이 생경한 이미지로 다가오고, 심지어는 그것들이 한데 모여 예상치 못한 결과물로 구현된다. 이러한 강원제의 작업은 회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일루젼을 통해 관람자의 눈을 속이는 방식에 충실하게 부합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완전히 숙지하고 있다 여겨 함부로 결론 내린 대상에 대한 일방적 판단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접근일 수도 있다는 교훈이며 나아가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편협하고 고정적인 관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줄 수 있음을 피력한다. 이미지를 찾아내려 자세히 보면 볼수록 현기증과 함께 이내 시선의 끈을 놓쳐 버리게 되는 그의 작품은 마치 척박한 삶 속에서 본질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시사하는 듯 하다.

강주현_Counter blow_PVC, Resin, 디지털 프린트_65×91cm_2011

강주현 ● 강주현의 작업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표현의 한계를 극복한다. 그는 우선 평면성을 무너뜨리고, 더불어 그것에 운동감을 더한다. 이러한 운동감은 촬영하는 순간 과거의 장면이 되어버리는 사진의 한계에 일종의 시간성을 부여한다는 측면도 있다. 더불어, 존재하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대상을 구현해 내기도 한다. 기존 사진 체계의 탈피를 꾀하는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진을, 그리고 평면예술을 통상적 범주 밖으로 끄집어 내어 시각 활동을 통한 촉각을 경험하게 한다. 신체와 의복이 하나가 되는 형태는 대상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결국 그것과 하나가 되고, 이는 마치 껍데기에 불과한 겉모습이 당사자의 본질이라도 되는 듯 인식하는 세태를 풍자한다. 단편적으로는 상대방의 옷차림 만을 보고 그 사람 자체를 함부로 판단해 버리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겠으나, 확장된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대상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감싸고 있는 껍데기에만 열광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김신혜_관홍매도_장지에 피그먼트_73×61cm_2011

김신혜 ● 매화꽃과 아네모네 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우리들에게 있어, 그것은 단지 허상에 불과한 대상이다. 도리어 눈 앞에 있는 음료 캔과 샴페인 병에 인쇄되어 있는 그것들이 현실이며 실재이다. 가상과 실재가 뒤바뀐 매트릭스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야말로 시뮬라크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자본가들이 꿈꾸는 스펙타클의 사회인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선택할 수 없게 되었고, 오로지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강제 선택을 하게끔 조정 당하게 되었다. 기업과 사회가 구사하는 이러한 '이미지의 정치'는 대중에게 본질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보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작가가 제시하는 일련의 이미지들이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다는 점이다.

김여운_Box no. 61, "Homo homini lupus."-Thomas Hobbes_캔버스에 유채_33×91×16.8cm_2011

김여운 ●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항상 존재해 왔다. 처음 그것의 경계가 단순히 육체의 힘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정도에 의해 구분 지어 졌다면, 시대가 변하면서 그 구분을 짓는 가짓수는 훨씬 다양해 졌다. 대체적으로 돈과 권력이 가장 핵심이 되어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학식, 직업, 외모 까지도 강자와 약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것의 경계나 방식은 다양해 졌으나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공통적으로 폭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작가는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황폐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동물에 비유하여 인간사회의 폭력에 대해 다소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기에 충격은 더욱 크다. 놀라운 것은 김여운이 강자를 질책하거나 약자를 동정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작가는 절망을 눈 앞에 두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조소를 내비치고 있다.

김정향_위로 연극1_장지에 피그먼트_130×161cm_2011

김정향 ● 이국적인 문화양식의 혼재와 다양한 종교적 산물들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김정향의 작품은 마치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인도의 불교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영적인 인상을 준다. 김정향의 작품에는 크게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육체와 정신을 씻어 가며 치유를 받는 공간의 개념인 '환상목욕탕'과 상처받은 영혼들의 아픔에 귀 기울여 주고 위로를 해주는 영매의 개념인 '바리메디온'이 그것이다. 이 개념들은 초기 작품에는 다소 직접적인 형태로 등장했던 것에 비해 근작들은 그것들의 의미는 그대로 가져오되 우회적인 이미지로 구현된다. 이를테면, '환상목욕탕'이 좀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동네나 주택가 안에 있는 '위로극장'으로 장소가 이동하고, '바리메디온'이 공간 속에 적극적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은유적으로 개입하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처음 그녀의 작품들은 자기 위안이나 치료로써 시작된 행위들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상처의 치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따뜻하는 친절한 작품으로 승화하였다.

김현준_SIZE_판지_44×40×13cm_2011

김현준 ●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금전적 기준인가 개인이 느끼는 심리적 상황을 기준으로 하는가. 그것이 만약 금전적 기준에서 기인 한다면 버려진 종이 상자로 제작된 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버려진 종이 상자가 아니라 비싼 돈을 들여 특수 제작한 종이상자로 제작했다면 그것의 가치에는 어떠한 변화가 올 수 있을까. 작품 제작을 위해 견고한 종이 상자를 찾아 헤매는 작가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상자인가, 아니면 그 상자 안에 들어있었을 전기 오븐인가. 자본주의 시장 체제의 사회 안에서 시스템과 제도에 의해 형성된 가치는 절대적 개념도 아닐뿐더러 진리도, 정답도 아니다. 소비위주의 시스템 속에서 더 이상 사물은 필요에 의해 생산되는 방식이 아니라 잉여 된 생산으로 인해 소비하게 되는 기형적 현상을 보인다. 이는 결국 소비자와 생산자 양쪽에게 대상에 대한 정상적인 가치 판단 자체를 불가능 하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무엇이 껍데기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가를 추리하기 위해 버려진 종이 박스의 경로를 쫓고 있다.

배윤환_Half 루시안 프로이드_캔버스에 에너멜_91×116.8cm_2011

배윤환 ● 설명 없이는 읽기 힘든 배윤환의 작품들은 작가의 일상, 경험, 감정, 정보 등이 마치 전기 회로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작가는 사회적 통념이나 정의, 관습 등으로 규정 내려진 대상이나 의미를 철저하게 해체하여 작가만의 사고를 기반으로 재조립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 과정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단시간 안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평소 대상을 바라보거나 인지할 때 보이는 것만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감정의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정형화 된 구도나 소재를 쓰는 것을 피하며, 또한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도 경계 없이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단순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람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폭발하는 에너지를 해소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그날의 경험과 감정을 기록하는 일기로 사용하며, 아티스트로서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를 규정하기 위한 실험대로 활용한다.

신기혁_Cubescape_캔버스에 패널_116.5×130cm_2009

신기혁 ● 회화의 종말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예견되어 왔다. 카메라의 발명, 뒤샹의 등장과 개념미술, 디지털 기술의 개발과 함께 찾아온 초호화 미디어 아트에 이르기 까지 18세기 이후 회화의 역사는 온통 수난으로 물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여전히 예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장르이며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죽어가는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앞을 보며 달린다. 하지만 신기혁은 되려 과거를 돌아보며 그것의 복권(復權)을 꾀하고 있다. 회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이 되는 기능들, 이를테면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라든가 공간감과 원근법을 이용해 관람자의 눈을 속이는 방식 등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본적인 기법은 유럽의 리얼리즘 회화에 근간을 두고 있고, 분위기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과거의 예술과 현대 예술에 있어서의 미의 기준을 충돌시키는 방식 등은 작가의 철학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현대미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지영_resurrection_잉크젯 프린트_96×120cm_2011

이지영 ●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20대 청년 - 비단 특정 나이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겠으나 - 의 예술가에게 현실의 삶은 더없이 버겁고 숨막히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경제적 고립과 진로에 대한 딜레마는 차치하더라도 대체 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조차 내리기 어려운 코너에 몰린 상황이다. 이지영도 마찬가지로 허덕인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거대한 현대사회에 비해 턱없이 작고 초라한 구석에 쪼그린 자아를 발견한다. 쪼그린 자아는 자신의 꿈을 반영하기도 하고, 상상, 공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심리적 상태나 고민을 표출해 내기도 한다. 마치 연극무대의 장치와도 같은 세트를 작가가 직접 제작한 뒤 진행되는 작업 방식은 작가의 시간성과 노동성이 결과물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더불어 존재하는 것만을 찍을 수 있다는 사진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한계를 극복했다는 사실 또한 이지영 작품의 중요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정치구_광대돌고래_합성수지, 실리콘_55×34×50cm_2011

정치구 ● 생명체가 경험할 수 있는 시련의 최고 지점은 어디일까. 작가가 결론 내린 그 지점은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시점이다. 아프니까 사람이라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삶 속의 고통이란 존재하는 법이고, 대부분은 그러한 시련을 참고 이겨낸다. 하지만 그것의 끝 – 존재가 사라지는 지점 – 에 이르게 되면 대상이 참아내거나 이겨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궁극의 지점에 근접해 있는 대상들, 다시 말해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들을 의인화하여 우리에게도 다가올 수 있을 극한의 시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동물들에게 극한의 시련을 준 대상이 다름아닌 인간들인 것처럼, 스스로의 안위나 이익추구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 다른 누군가 에게는 최고 지점의 시련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행인 것은 그의 작품 속 동물들은 처한 상황을 희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실리콘이라는 재료의 특성처럼 변함없이 영원토록 삶을 지속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오늘도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하명은_A master piece painting MINI series_혼합재료_각 22×15×3.1cm_2011

하명은 ● 언제부터인가 예술을 통해 시각적 아름다움만을 창조하거나 관람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진부하고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소위 지식 예술인들이 지향해야 할 바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 미술계는 온통 특허 신청 직전의 제품들로 즐비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제품들이 이미 백 년도 더 된 진부한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사실에 이제 지루하기 까지 하다. 작가는 과거의 것을 부정하고 온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현재라면 차라리 과거의 이미지를 다시 가져와 작가의 생각과 숨결을 불어 넣는 적극적 차용을 하고 있다. 작가는 현대미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맹점을 보완하고자 하며,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형식의 현대미술이나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훈_Festung7_캔버스에 유채_105×140cm_2011

하지훈 ● 하지훈의 모든 풍경들이 직접 답사나 사생을 통해 제작되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최근의 성(城) 시리즈에 와서는 자연 경관 외의 대상들이 삽입되면서 외국 서적이나 자료들을 참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새로운 형태의 진경산수화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기교를 이용해 풍경의 겉모습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기운이 살아있는 대상의 본질을 표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철저하게 서양회화의 재료를 이용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표현방식에 있어서 동양화식 음영법의 사용이 발견된다는 점, 그리고 이동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 등은 지극히 동양회화적인 접근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동서양의 재료와 기법, 사고가 한 화면에 공존하면서 하지훈만의 생경하고 독특한 풍경으로 재탄생 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가장 진부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풍경화를 소재로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작품이 신선한 주목을 받게 된 이유일 것이다. ■ 윤상훈

Vol.20110916i | IYAP2011:스펙타클의 사회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