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OCI YOUNG ARTIST

장파_조혜진展   2011_0901 ▶ 2011_0921 / 월요일 휴관

장파_DaDaDaDaDa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92×62cm_2011

초대일시 / 2011_0901_목요일_05:00pm

장파 'The End of the World' 조혜진 '변두리'

후원/협찬/주최/기획 / OCI미술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songamfoundation.org

밀폐 공간의 반복과 괴물의 탄생. 강박장애적 구조주의자의 진술 ● 『세계의 끝』이란 큰 주제 밑으로 매달린 연작들은 대표 도상 하나로 손쉽게 수렴되고 기억될 수 있다. 투시 원근 구도로 유독 강조된 움푹 팬 검은 웅덩이가 『세계의 끝』 전체를 규정짓는 도상이니까. 아니 검은 웅덩이와 그걸 둘러싼 육면체 공간 전체가 도상인 게 맞다. 연작 타이틀 『세계의 끝』이 암시하는 종말론적 이야기를 조형적으로 완성한 양, 예측불허의 활화산이 마치 이 세상을 끝장 낼 기세로 입 벌린 검고 깊은 웅덩이. 『세계의 끝』은 그렇게 인지된다. 『세계의 끝』은 2점 투시법으로 근경의 웅덩이를 1점 투시법으로 원경의 소실점을 제각각 부각시키고 강화한다. 미세하게 변형된 검은 웅덩이의 반복 재현이 세상의 파국을 가시화한 무엇처럼 읽힌다면, 화면 중심 상단에 종심 깊게 자리한 네모진 소실점은 밀실공포로 채워진 화면에서 뭐든 단숨에 빨아들일 공포의 블랙홀처럼 보인다. 1점 투시와 2점 투시가 혼재된 공간 구성이 만든 심리적 불안의 밀도 때문에, 『세계의 끝』은 작품 단 한 점만으로 승부걸기보단 미세한 변형체 연작을 나란히 열거할 때, 전달하려는 내러티브가 온전히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 밀폐된 육면체 내부를 응시하는 시점, 그것이 『세계의 끝』 도상의 구도다. 그 도상은 지나간 작업 연보 속에 이미 소리 없는 흔적을 수차례 남긴 바 있다. 「저지선」(2009)과 「경계가 없어진 소리」(2008)는 단일 작업의 얼굴을 하고 『세계의 끝』과 유사한 구도를 취한 바 있다. 또 그 도상은 「폭로하는 입」(2009) 의 초대형 화면 왼쪽 귀퉁이에 그림의 구성요소로 개입한 적도 있다. 조연에 머물던 이 육면체 실내 공간은 2010년 들어 『세계의 끝』이라는 독자적인 연작의 자격으로 주연처럼 제 새끼를 치고 있다. ● 화면 위에 동일한 형태를 반복해 작품 세계를 규정하는 도상의 전례는 『세계의 끝』 이전에도 장파(1981년생)의 작업 연보에서 꾸준히 관찰된다. 높은 지평선 위로 자리한 한적한 미지의 벽돌 가옥의 존재감은 짧은 작업 연보 속에 이미 친숙해질 만큼 되풀이 되었다. 『세계의 끝』의 실내 공간 도상과 함께 「폭로하는 입」(2009)속에 나란히 등장한 적도 있고, 채색과 구성을 미세하게 변주시켜 수차례 화면 속 주연으로 출연했다. 「모두 그것을 미친 여름이라고 불렀다」(2009), 4색으로 변주된 벽돌가옥 4점을 하나로 묶은 「붉은 벽돌집」(2008), 「벽돌집」(2010), 그리고 차량 조수석에서 차창 밖을 바라본 시선 속에 벽돌집을 삽입한 「당신의 왼편」(2010)까지 변형된 반복은 무수하다. ● 중복 출연으로 각인된 장파의 조형 도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건 단연 2008년 「식물들의 밀실」연작의 일부로 제작된 「폭력의 순환」(2008)에서 정원의 수풀을 앞발로 헤집는 정체불명의 회색 개다. 개의 입은 SF영화 「에일리언」의 괴물의 입을 닮았고 개의 흥분 상태를 지목하려 했던지 생식기는 민망할 만큼 붉다. 이 괴견(怪犬) 도상은 회화 소품 16점을 모자이크로 구성한 「식물들의 밀실」(2008), 「그들이 인지하는 미시적이고 거대한 세계를 보세요!」(2008)에 출연했고, 급기야 무대미술을 연상시키는 설치물 「목격자의 의무」 속에 어설픈 모양새의 입체조형물로 가담하기도 했다. ● 『세계의 끝』의 흑백 육면체 실내와 검은 웅덩이의 종말론적 도상(2010년)은 중복되어 제시될수록 미학적 설득력을 높였다. 「식물들의 밀실」에서 괴수의 입을 단 정체불명의 개 도상(2008년) 역시 전하려는 메시지가 뭐건, 두어 번 이상의 노출로 전달력을 상승시켰다. 고안한 도상을 반복시키는 장파의 전략은 보는 이의 뇌리에 잔상을 각인시켰고 더불어 도상 자체의 권능도 강화시킨다. 장파의 작업이 도상 반복을 추종하는 까닭은 뭘까. 동일 행동의 반복으로 강박적 사고를 차단하려는 시도를 강박장애(obsessive compulsive disorder)라 부른다. 반복된 행동이 불안의 원인을 일시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 행동은 불안감을 다만 한시적으로 차단할 뿐, 원천적으로 제거하진 못하는 걸로 알려진다. 반복은 계속될 밖에.

장파_The Big Splash_캔버스에 잉크, 아크릴채색_75×230cm_2011
장파_What must we do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55×105cm_2011
장파_Beep_종이에 아크릴, 디지털 프린트_47×201cm(각 47×67cm)_2011

장파 작업 연보의 초반부에 속할 「식물들의 밀실」에선 작가 개인사를 둘러싼 사연이 작가 노트에 비교적 소상히 진술된다. 약술하면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가족 구성원이 정상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부당 대우를 받고, 그는 다시 자신의 지인들(작가를 포함한)에게 그가 받은 부당 대우를 되갚는다는 체험담이다. 순환되는 불편의 악순환을 가까이서 관찰한 장파에게 그것은 작업의 동인이 되었다(작가가 감수한 고통의 상세한 내막까지 소개되지 않았다). 정상의 기준에 맞춰 차별과 폭력이 악순환 되는 현장을 가까운 가족의 굴레에서 개인사의 일부로 겪은 장파는 당시 경험의 인상을 최대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뒤늦은 자기 위안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식물들의 밀실」의 작가 노트는 내막까지 정확히 기술하진 않는다. 해소해야할 고통임과 동시에 숨기고픈 사실이어서일 게다. 그림 역시 작가노트처럼 상세한 진술은 자제한다. 전말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당사자인 장파의 구술이 보태질 때 가능하다. 의도적으로 내막을 불분명하게 처리했지만, 작품이 보는 이에게 주는 각인 효과는 높다. 작가가 고안한 도상의 시각 충격과 도상의 반복 때문이리라. 명백하게 스토리텔링을 열망하면서도(하소연 하고픈 개인적 고통), 모호한 대리자를 내세운다(숨기고픈 사실). 작가의 대리자는 기괴한 유기체(「식물들의 밀실」의 개)의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하거나, 반복 재현으로 무언가를 강조하는 무기체(『세계의 끝』의 웅덩이 패인 육면체 실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작가가 체험한 구체적인 과거사는 모호한 도상의 반복을 통해 침묵하는 추상 기념비처럼 변형되어 보는 이에게 기억된다. 무서운 강박의 힘. ● 상대적으로 초기 작업(2008년 이전)에서 장파는 지난 개인사에 대한 스토리텔링 욕망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림을 통한 직접 진술보다 장황한 해설적 제목으로 간접 진술하는 우회로를 택한다. 「그들이 인지하는 미시적이고 거대한 세계를 보라!」처럼 장황한 명령문을 통해 의사를 분명히 드러내거나, 일반적인 전시 도록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방대한 작가 해설이 삽입된 예를 보면 그렇다.

장파_Vrooom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32×62cm_2011

정상과 비정상을 완고하게 나누고 차별하는 '세간의 정상적 기준'을 향한 작가의 거부감은 「식물들의 밀실」에서 상반된 개념 둘을 모호하게 혼재시키며 개진된다. 가해와 피해, 정상과 비정상, 구상과 추상, 서사의 명확성과 시각 암시의 모호성 사이의 혼재. 장파의 개인사에 따르면 분명한 피해자에 속할 개마저 그림 속에선 마치 가해자인양 묘사되어 보는 이의 추론을 거스른다. 스토리텔링의 열망도 명백해 보이는데, "이야기라는 요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2009년 2인전 도록에서)고까지 고백한다. 권위적인 지식 체계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표면화된 건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구작에서도 관찰된다. 「아트 바이블」(2006)은 시각문화를 서열로 확정하는 제도이론의 무한 권능을 제도종교의 교조적 경전에 빗댄 장파의 설익은 패기를 보여준다. 그 작품은 작가의 여정이 『세계의 끝』에 당도하게 된 출발점처럼 읽힌다. ● 제도권 예술이론과 예술작품 사이의 종속관계를 둘러싼 작가의 구체적 불편을 설치물로 재현한 「아트 바이블」의 첫 여정은, 협의의 주관적 시공간인 가정에서 발생한 부조리한 개인사를 투영한 「식물들의 밀실」이 이어받는다. 「식물들의 밀실」은 구체적 대상(가령 개와 식물)을 출연시켜 진술을 대리하려 든다. 다만 '고의로' 모호한 서사를 취해 진술의 구체성을 포기하고 은유적 시각충격에 몰입한다. 그리고 이제 당도한 『세계의 끝』은 세계 전체 시스템의 부조리로 관심이 확장된 것이리라. 재현된 내용도 전작들만큼 소상하지 않다. 다만 능히 대처하기 힘든 기하학적 밀폐 공간과 정체 모를 검은 웅덩이의 추상성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모두 삼켜버린다. 작가의 복잡다단한 진술은 단순 구조(도상) 하나로 수렴된다. 단지 미세한 편차로 반복되는 웅덩이, 소실점, 그리고 밀폐 공간은 연작 타이틀처럼 종말을 향해 치닫는 세상의 부조리를 구조물로 재현한 거거나, 혹은 정반대로 부조리한 세계를 끝장낼 방책으로 작가가 세운 구조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게다. 선명한 작가 진술과 그것이 투영된 모호한 재현물. 그 둘은 커다란 구조 속에 일체가 되어 반복 재현된다. 세계의 구조적 부조리를 의심하는 장파는 미적 구조주의자가 되려한다. ■ 반이정

조혜진_변두리_페트필름_가변크기_2011

투명한 환幻의 풍경들 ● 그가 나에게 114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종로구 창신동 재개발지와 서대문구 가재울뉴타운 지구의 철거 예정지 풍경이다. 달뜨는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았기에 달동네라 불렀던 그 풍경들이 참혹했다. 말이 좋아 달동네지 무허가주택과 노후불량주택이 겹겹이 쌓인 도시저소득층 밀집지역이 아닌가. 버리고 떠난 자리에 누군가 살았던 삶의 흔적들이 말라서 나뒹구는 꼴이 안타까웠다. 힘든 현실의 껍질들만 남아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는 그 빈 주검들이 힘에 겨웠다. 쓸모 있는 것들조차 쓸모없이 남아서 생을 정지한 사물들이 눈에 밟혔다. 이제 그 모든 것들은 철거에 쓸려 흔적도 없이 지워질 것이다. 기쁘고 때론 슬픈 추억일지라도 돌아갈 집이고 고향이었던 가파른 산동네의 둥지는 깡그리 해체되고 파괴될 것이다.

조혜진_변두리_페트필름, 아크릴_가변크기_2011

저 모든 풍경은 산재다 ● 옛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어야 한다고 시끄럽게 떠들던 시대가 있었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으면 온 동네 어른들이 쏟아져 나와 새 길 새 도랑을 쓸고 닦던 그 시대. 아줌마 파마처럼 온통 슬레이트 헤어로 치장한 근대화의 지붕들이 전국을 휩쓸자 이번에 정체불명의 대머리 양옥집이 유행을 탔다.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도시외곽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시에 살았으나 저소득층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외곽으로 밀렸다. 이곳저곳 외곽의 구릉지는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되었고 판자촌은 벽돌집이나 다세대 주택으로 옮겨 타기도 했지만, 단칸방살이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 1989년 통계에 따르면, 서울, 부산, 대구 등 6대 도시와 수도권을 중심으로 502개 지역에 총 32만 6,000가구, 131만 3,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서울시만 75개 곳, 378만 평, 8만 800가구 30만 5,000명이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8년 전인 2002년 대한민국은 낙후된 시가지 주거환경을 정비하는 새로운 도시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뉴타운 사업이었다. 뉴타운 사업은 정치인들에게 주민의 환심을 유토피아로 채우는 기름불과 같았고 그래서 서울은 빠르게 뉴타운 공화국으로 돌변했다. 뉴타운 공화국의 집 있고 돈 있는 시민들은 쉽게 아파트로 갈아타면서 중산층 대열에 끼어들었으나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은 재개발지가 될 구릉지의 집들로 삶을 전전했고 그도 아니면 쪽방촌에 기어들었다. ● 2002년 이후 수도권의 뉴타운 사업은 지우고 세우기를 쉼 없이 반복하고 있다. 수십 년을 걸었던 길들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집들의 풍경이 엎어졌다. 보상받은 사람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고 불 꺼진 집들에서는 쌓인 세월만큼 어두운 유령들이 겉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벽부터 기계들은 부산하게 빈집들을 먹어 삼켰고 집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쓰러졌다. 그 모든 풍경은 산재였다. 시인 송경동이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모든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난/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다"라고 했을 때의 그 산재풍경들.

조혜진_변두리_페트필름, 아크릴_가변크기_2011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 /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 /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 /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 /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 /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 / 산재에 물들어 있고, 보라 /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 / 숭숭 구멍 뚫리고 있다 (송경동,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중에서) ● 조혜진은 카메라를 들고 그 산재의 풍경들 속으로 잠입했다. 풍경의 전체가 아니라 세부의 세목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그가 '조각'으로 지어야 할 집들의 구조를 찍었다. 그 구조는 빈집의 오래된 뼈였다. 굳게 닫힌 창문, 누렇게 얼룩진 벽지, 울퉁불퉁 꾸불꾸불한 계단 골목, 후문과 장독대를 지지하는 돌담 축대, 아스라이 견디고 선 전봇대와 산발한 전선, 멀쩡하게 살아서 산 사람을 기다리는 온전한 빈 집, 묶인 채 버려진 책들과 앨범,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연예인 화보, 가파른 언덕길과 철제 울타리, 죽어서 엎어진 화초들과 화분, 걷어가지 못한 빨래, 창틀에 걸어 놓은 수채화 하나, 뚝 끊어진 전선과 두꺼비집, 회칠한 벽들에 갈겨놓은 '철거' 글씨, 해체 철거된 집터에 고인 검은 물, 콘크리트를 지탱했던 무수한 철근들……. ● 탐색이 짙게 밴 그의 시선에는 결핍을 채우려는 의지가 엿보일 만큼 집요하다. 작업용 답사사진으로 보기에는 풍경의 세목들이 팔팔하다. 텅 비고 말라서 허허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 파닥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기갈 들게 했을까? 그는 불현듯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곧 일을 시작했어요. 가난했고 배우지 못한 엄마의 과거가 힘들었죠. 창신동은 40년 전인 1970년대에 엄마가 살았던 동네에요. 부정하고 싶었던 엄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저는 그곳에 가게 되었죠. 재개발로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산동네를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시작했던 것이 그 즈음인데, 가서 보니 산의 반은 집이고 나머지 반은 터만 남은 흙이었어요. 그 사이를 초록색 방진막이 풍경을 둘로 가르고 있더군요." ● 그곳에서 그는 풍경의 흰 뼈를 보았다. 사골처럼 오래 고여서 삶의 진한 국물 싹 빠져 버린 달동네의 흰 뼈. 수십 년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한 것은 건강한 달동네의 뼈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뼈의 국물로 살았을 것이다. 또한 그곳은 엄마의 풍경이기도 했다. 조혜진의 인생 30년이 엄마의 한 생을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그 풍경. 손세실리아 시인이 그의 시 '곰국 끓이던 날'에서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희멀건 국물,/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라며 통곡했던 그 국물의 흰 뼈. 그는 그래서 투명한 재활용 페트 용기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달동네의 집들을, 국물 쏙 빠진 흰 뼈의 집들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조혜진_변두리_페트필름, 재활용 페트용기_가변크기_2010

투명한, 흰 집들과 빈 사람들 ● 조혜진의 집은 철거 예정지의 달동네로부터 왔다. 그는 서울의 뉴타운 지구 재개발지에서 찍어 온 사진 속 집들을 재현했다. 집들은 비었으나 무거웠다. 무거운 집들이 조각 작품이 되었을 때는 무겁지 않았다. 투명 플라스틱 페트로 지은 집들에는 세월도 현실도 사건도 그 무엇도 묻어있지 않았다. 집들은 집의 형체로만 남았을 뿐 사람의 그림자 하나 깃들어 있지 않았다. 비어서 투명해진 그 집들이 아팠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 사이가 뻐근거렸다. 나는 그 통증이 나의 통증인지 집들의 통증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해체 철거된 집들이 하나 둘 그의 작업실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이 집과 저 집을 따로 지었고 저 집에 붙은 옆집을 이어서 지었다. 한 채, 두 채, 세 채, 그는 동네를 통째로 옮겨 오려는 듯 쉼 없이 집들을 지었다. 집들은 어두운 전시장에서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심해에서 빛을 발하는 물고기들처럼 집들은 고요했고 그래서 선명했다. 그 많은 집들이 층층이 산동네를 이루며 공중에 설치된 풍경은 영락없이 달동네였다. ● 그러나 먹먹한 어둠일수록 더 맑게 투명해지는 이 흰 집들의 정체는 밝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엄마의 뿌연 눈물일 수밖에 없는 깊은 통각의 뼈, 비어서 투명해진 현실과 비현실의 풍경, 눅진한 삶들의 흔적만 남아서 탈각된 집들의 허물이 조혜진 조각의 미학적 실체들이다. 그는 통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맑아지는 눈물을 생각했을 것이다. 산세와 지세에 눌려 정형 따위는 갖출 수 없었던 집들의 고단한 몰골과 그런 현실에 깃들었을 지난한 삶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나자 완전히 비어서 말라버린 고치 집에 소스라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집들은 투명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투명해서 아픈 것이고 맑아서 안타까운 것이다. 그 집들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빈집의 '비어있음'을 안타까워했던 기형도의 「빈집」과 다르지 않다. 모든 빈집은 사람이 비어서 발생하는 사태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중에서) ● 기형도의 빈집은 조혜진의 빈집을 채운다. 기형도의 시어들은 조혜진의 미학적 개념어와 거의 일치한다. 가난과 이주의 정처 없음이 절박하고 결국 모두 흩어졌으나, 빈집에 갇혔기 때문이다. 무엇이 갇힌 것일까? 삶의 현실이다. 숱한 현실의 껍질들이다. 기억으로는 모자란 껍질들의 회한이다. 조혜진의 집들은 회한의 껍질들이다. 그 껍질 속에서 삶은 변태를 꿈꾸며 황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황홀 따위는 '환幻'에 불과하다. 그러니 빈집에 갇힌 수십 년의 짧았던 밤들이 산산이 흩어질밖에. 그 흩어진 것들의 한 획들이 모여 한 조각 한 조각 집을 이뤘을 것이다. 사람을 이뤘을 것이다. 조혜진이 이룬 달동네는 그렇게 흩어진 것들의 한 조각 환일지도 모른다. ● 이번 전시는 그가 이룬 집과 사람들의 환이자 환의 섬이다. 집들의 일부를 공개하거나 동네라 해도 지극히 부분이었던 것을 하나의 전체로 만들고자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이 환의 공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빈집과 환영뿐인 사람들 곁으로 우리를 직립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삶이란 환에서 시작해 환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낭만적인 진리를 일깨운다. 그러나 그가 세운 낭만의 진리야말로 우리가 상실했고 또한 묻어버렸던 삶의 실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 김종길

Vol.20110904b | 2011 OCI YOUNG ARTIST-장파_조혜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