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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7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피규라 Figura/ 이야기 - I. ● 김성욱의 작품은 전형적인 '피규라' 조각이다. 작품 대부분이 인체 형상을 모방한 상(像)이어서 말 그대로 '사람 모습의 상'을 뜻하는 피규라라고 지칭할 수 있다. 본래 조각이 인간 형상을 따라 만든 우상에서 출발했고, 르네상스 이후에도 조각가들이 인간 형상에 대한 찬미를 표현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의 조각의 역사적 연관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20세기 동안 조각이 피규라란 사실은 잊혀지고, 그 대신 기하학적 무기물 형태가 전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관념적 추상조각이 선두에 나서면서, 구상의 피규라 조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들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거의 20 여년을 구상의 피큐라 조각으로 작업을 거듭해 온 작가에게 시대의 조류에 뒤떨어졌다는 자괴감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피큐라를 고집해 온 그의 예술적 확신 앞에 필자는 우선 거두절미하고 존경을 표시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 외형적으로 모노톤 같은 피규라의 작품에 무딘 펜을 대고 싶은 욕구를 누르지 못하고 있다. ● 작가는 인체 형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시각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덩어리감이 강한 조각을 제작해낸다. 항상 돌을 다루는 편이므로, 굳이 작품을 들어보지 않아도 무거운 무게감이 상존함을 알 수 있다.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규모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공간 안에서 볼륨과 매스가 전체적으로 한 번에 지각되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적 특질들은 실상 인간 형상을 다루는 피규라 조각의 일반화된 속성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인간 육체에 대해 감각적 반응을 할 때는 그것이 공간 안에서 차지하는 부피와 중량부터 즉 입체성부터 지각하기 마련이다. 조각가들은 형태의 입체성에 누구보다 민감해서, 이를 토대로 입체감이란 조각적 감각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김성욱 작가 역시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다만 그의 피규라 조각에는 동류의 경우와 차별화되는 입체적 속성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여인의 풍만한 몸에서 볼 수 있는 만곡선의 윤곽과 부드럽게 부푼 신체 볼륨 그리고 빛과 그늘의 교차로 만들어진 생명감 있는 표면 질감, 돌의 냉기 대신 기묘한 온기를 전하는 모뉴멘탈한 중량 등이다. 이들 독특한 요소들은 그의 인간 형상에 뜻밖의 친근한 표정을 부여할 뿐 아니라, 작품을 돌이란 무기물로부터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유기적 대상으로 변화시켜 놓는다. ● 작가의 돌조각에는 인간의 표정이 있다. 친근한 삶의 이야기들도 있다. 작가는 돌을 다듬는 감각적, 조형적 경험 위에 개인의 이야기, 오랜 기억의 사념들을 투영시켰다. 감각적 형식에 감정과 환상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형태에 내용을 채우는 일은 시각예술가의 전통적 과제이지만, 그의 경우 숭고한 사상이나 심오한 철학적 관념, 사회적 이념 같은 거대한 내용은 상관이 없다. 거대 담론보다는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가 그의 작품 내용의 축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의외로 필자에게 대단한 매혹의 힘으로 다가왔음을 고백해야겠다. 그의 작품 공간이 진동한다거나 표면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면, 바로 이 이야기의 힘이 그 같은 환상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작가의 피규라란 조형적 측면과 더불어 이야기 측면을 함께 언급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두 측면은 감상자가 작가의 조각을 이해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통로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II. ● 김성욱의 피규라 조각은 인간의 형상 외에도 기억의 이야기들을 표현하기 위해 물고기, 꽃, 자전거, 집과 같은 부차적 상징 형상을 더하기도 한다. 그 중 가장 의외로 여겨지는 형상은 주사위이다.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주사위는 게임의 도구이면서, 성인이 된 지금은 행운을 기원하는 부적의 오브제이기도 하다. 번거롭게 들리겠으나 조각의 역사를 다시 언급하자면, 선사시대 인류가 오브제(조각)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인간 형상의 우상 외에도 표지석과 부적의 돌조각들이 있었다. 이번 일곱 번째 개인전에 전시된 「행운의 주사위」는 피큐라가 아니라 그런 표지석 혹은 부적의 계보에 속한 모뉴먼트이다. 화강석에 LED로 조명된 「주사위」연작은 그 신비한 조명 불빛 덕분에 더욱 원초적 기념물의 상징성을 더한다. 필자가 이 주사위 작품에 시선을 먼저 둔 까닭은 이 작품이 상징하는 기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육면체의 단순한 조형성과 강렬한 시각성 때문이다. ● 지금까지 작가는 이 만큼 단순명료한 조형물을 제작한 적이 없었다. 피규라는 기본적으로 얼굴에서든 신체에서든 세부사항을 묘사하며, 몸통에 사지가 연결되는 복잡성이 있게 된다. 그런데 「주사위」에는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육면체의 부피와 무게 그리고 명확하기 그지없는 덩어리감이 돋보인다. 모더니스트들이 이런 큐브의 형상을 즐겨 사용했음은 이 같은 형태의 단일성과 시각의 즉각성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김성욱 작가 역시 이 점을 겨냥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사위」의 단일한 형태와 구조는 그의 다른 피규라 작품들의 형식적 특성을 이해하게 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작가의 1990년대 초기 돌조각부터 현재 작품까지 인체 형상은 늘 원통형을 기본으로 한 단순한 형태였으며, 인체 구조는 수평과 수직 혹은 사선을 축으로 연결되어지곤 했다. 한 마디로 이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단순성의 고전주의 미학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입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피규라의 인체조각들이 다소 추상화된 단순한 형태들이라면, 「주사위」는 그런 형식적 추구를 노골화시킨 한 사례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작가의 단순함에 대한 취향이 서구 모더니즘식 형태 환원에 동승한 것은 결코 아니란 사실이다. ●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전통 석조 불상조각의 인체 형상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 석조불상과 달리 한반도의 석조불상의 인체 형상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강한 볼륨감과 기하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팽팽한 표면의 긴장감으로 인하여 탄력 있는 윤곽을 형성하며, 고요하면서도 안정감 있고 생기 넘치는 형태를 보인다. 또한 덜 장식적이고 대범한 단순성을 특징으로 삼아 소박한 여유와 명상의 너그러운 폭을 안으로 품고 있다. 작가의 다소 추상화된 인체 형태는 다름 아니라 바로 그런 한국 전통 석조인물상의 도상으로부터 유추되어야만 한다. 생략의 형식미는 모더니스트 형식주의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잡다한 생각들을 멀리한 소박하고 청초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표시한 것이다. 내면의 정화가 세부 묘사를 생략한 형태의 단순화를 가져왔으며, 풍만한 볼륨과 확대된 매스는 생명력이 안에서 밖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정신적 충일함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형태의 단순화는 작가 자신의 삶의 태도와 매우 잘 부합된 것이다. 언젠가 그는 공자의 「논어」에서 빌려 온 어구를 인용하여 "나물먹고 팔베개 하면서 유유자적하길 더 좋아한다"는 진심어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이토록 소박하기 그지없는 삶의 철학이 투영된 조형 형식이라면, 당연히 그것은 탈속한 단순성의 정제된 형태미일 수밖에 없으리라. ● 18세기 서양의 고전주의 미학자인 J.-J. 빙켈만은 이런 정신적인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제의 조형미를 가리켜,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함"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실상 작가가 시도한 형태의 단순화는 테크닉의 빈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빙켈만의 언급처럼 순수하게 정화된 정신을 표상하기 위한 고귀한 방법이며, 세부묘사가 생략된 정적인 모뉴멘탈리티는 크기와 상관없는 위대함을 드러내는 이상적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작가의 작품에는 자칫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형태의 기능적 측면과 미적 측면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느 작가에게나 이 두 요소는 공존보다 갈등과 충돌이 앞서는데, 작가의 작품에서는 자연을 모방하려는 형태의 측면과 추상화하려는 정신적 측면이 일정한 비율로 늘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W. 보링거가 1908년 경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모방충동과 추상충동을 해석하면서 이 양자의 길항작용이 미술의 역사를 결정했다고 설명한 내용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 한편 작가의 작품에는 딱딱하거나 날카로운 기하학적 형태보다 부드럽고 둥근 유기적 형태가 주로 등장한다. 이는 그가 대리석이나 화강석 그리고 옥 같은 경질의 돌을 다루면서도, 이를 무기체 재료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체로 대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일찍이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을 조각하는 과정을 돌 안에 숨은 생명을 해방시키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던 것처럼, 작가는 돌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마지막 손질까지 재료와 하나가 되어 호흡을 나눈다. 그리고 돌의 정기가 표출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제작의 모든 공정을 거의 무리할 정도로 자신의 손으로 이어가며, 결코 공장이나 남의 손에 맡기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의 스승이었던 석조조각가인 전뢰진선생이 그의 작품을 가리켜 '차갑고 딱딱한 돌이 꽃잎처럼 부드럽게 되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남달리 드러나는 친근하면서도 유기적인 생명력의 조형효과를 이해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III. ● 김성욱의 조각적 정념은 대단하다. 그는 돌덩이의 구석구석까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며 돌 입자 하나하나까지 다듬기위해 장시간 샌드페이퍼와 드릴을 가지고 돌과 맞씨름하길 즐긴다. 돌의 정기를 깨워 일으키는 동시에 피규라의 조형으로 유기적 생동감을 불어넣는 장고의 작업 덕분에 물리적 중력의 역학 아래 냉냉하게 묵묵부답이던 돌덩이는 어느 듯 다정하고 쾌활한 생기를 발산하는 인간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기물에 불과하던 돌에서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이 마법과도 같은 변형 transfiguration의 과정을 단지 형태 변화의 소산이라고만 결론내리기에는 아무래도 모자람이 있다. 도대체 어떤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필자는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할 때마다 오래된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에 몰입해 들어가는 모습을 자주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모두 작가의 가족들에 대한 기억과 일상의 삶에 대한 기억들로 중첩되어 있으며, 그런 각별한 사적인 친근함으로 물든 이야기가 작품의 배경이고 내용이며, 주제이고 소재임을 곧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그 같은 이야기들이 작품에 덧입혀져서야 비로소 돌조각에는 특유의 유기적 생명력이 생생하게 솟구쳐 올랐다.
작가에게 있어 유년시절의 이야기는 창작의 샘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번 개인전의 제목도 그래서 「유년시절의 기행」이었던 것이다. 해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들, 이를테면 이른 봄 윤중로에서 떨어지는 벚꽃 사이로 바람을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던 기억, 물고기를 좋아하여 낚시해 온 물고기를 우물에 집어넣었던 기억, 형제와 함께 새를 공중에 날려 보내면서 희열을 느꼈던 기억 등 수 많은 일상의 사소한 기억의 이야기들이 그를 지금까지도 순수한 기쁨으로 젖어들게 하는 것이다. 이번 2011년 이즈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들도 바로 그 같은 이야기들이 일관된 주제로 관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안타깝게도 올 해 그는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주던 아버지와 장인어른 두 어르신들을 연달아 떠나보낸 아픔을 겪었다]. 이런 소박한 삶의 이야기가 작품의 기둥이 되고 조형에 생동감을 더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그의 상상력을 위한 토양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지 않다면 그의 구상조각은 다소 평범하고 진부한 재현미술에 불과하고 감상자에게 던지는 감동도 덜 했었을런지 모른다. ● 작가는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인 1993년에 구상으로 돌조각을 하던 동료들과 함께 '삶-이야기'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 발기 당시 한국미술계는 네오팝의 구상과 포스트모던의 추상, 표현적 형상미술, 그리고 뉴미디어아트가 트랜드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보기 드물게 석조로 일상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미술가들이 그룹을 형성했고, 그 중에 작가 김성욱이 동아리 활동의 기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도 활동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 '삶-이야기' 그룹에 대한 언급은 실은 작가에게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몫이고 작업의 동인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모더니즘 미술에서라면, '이야기'는 거추장스러운 비형식적 요소에 불과하다. 그것도 개인의 일화를 작품으로 제작하는 일은 개인을 신화화하는 시도로 혹은 무의미한 환영을 만드는 엉뚱한 시도로 비추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récit)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는 중요한 상상력 발인의 요소로 재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세기에 불순한 요소라 여겨져 버려졌던 이야기의 전통이 과학기술만능의 후기산업사회 안에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야기가 바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상상력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이들에게 획일화되고 기계화된 삶을 일탈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형식주의와는 반대로 이야기의 환상은 경계를 없애고 그 감동은 인간들 사이에 관계와 소통을 가져오는 기회가 된다. 또한 발화된 이야기는 동일자에게로 환원되기보다 이질적 타자에게 확산되어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요소와 층위를 포용하는 면모를 지닌다. 규칙과 원칙, 기능성과 획일성, 기계적 자동성과 이성중심의 지배적 담론에만 이끌려가던 미술이 이야기와 상상력, 상징과 은유, 각색과 패러디, 등에로 문을 열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시점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는 조형적 가능성의 발로이고 작품 위에 가로놓인 여유로운 상상의 공간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작가의 작품에서 제목을 간과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조각작품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이야기를 함께 상상하며, 그 조각의 피규라를 눈길로 천천히 따라가거나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을 때, 감동은 배가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이야기란 불사조가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조금 더 숙고해보자. 작가는 자신의 내면적 상상이란 영토 안에서 기억이란 이름의 씨앗을 뿌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경작해내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은유이다. 작가가 기억에서 길러낸 이야기가 조각의 피규라로 현현되었을 때, 거기에는 감상자도 공감할 수 있을 비유와 각색이 따라 붙는다. 말하자면 먼 지난 과거 어린 시절의 원형적 경험은 시간의 터널을 지나 은유가 되어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허구이고 문학이 되며 시각예술에서는 환상이 되는 것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상상과 은유의 힘 덕분에 이야기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 움직이고 살아남을 것이다. 의미론적 적합성, 논리적 명확성 같이 수미일관한 담론은 이야기의 은유 앞에서 아무런 힘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사행(事行 procès)은 문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상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들-논리적 모순마저도-을 거리낌 없이 아우르는 이야기의 사행은 마치 동양의 일원론이 서양의 변증법적 이원론까지 포용해버리는 양상과도 같아 보인다. ●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이해가 갈 수 있듯이, 피규라의 이야기 안에는 지나간 과거와 지나가고 있는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들이 실재한다 [비실재의 시간이 실재한다는 역설에 저항감을 느낀다면, 필자는 폴 리쾨르의 말을 빌려, 지나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무'는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예를 들어 '가족'이란 테마에 등장하는 '엄마'는 과거 작가 자신의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였고 현재의 작가 자신의 사랑스런 부인이며, 앞으로 자라날 작가의 딸의 모습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자 아내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상자가 작품 앞에서 이렇게 과거-현재-미래의 이행과 그 추이를 상상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어도 좋을 것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논증하면서, 시간의 층위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이 있음을 분석한 바 있다. 그리고 내적 시간성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지)에 따라서, 즉 마음 먹기나 쓰기에 따라서 시간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감상자 개인의 마음에 따라 작가의 피규라들은 나 혹은 너의, 과거 혹은 현재 또 미래의 피규라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피규라가 지닌 만곡선 윤곽의 단순한 인물 외형은 '마치 ~ 같은 것'이란 아련한 기억들을 어슴프레 떠올리는 동기부여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들 조각의 부드럽고 편안한 인상은 작가 자신의 원본적 경험의 원상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감상자에게도 개인의 고유한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자유로운 상상을 하도록 하는 자리 역할을 맡는다.
이야기는 상상과 함께 길을 가는 허구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모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기억의 원본이 이야기마다 달라질 수 있듯이, 작가는 작품에서 얼마든지 피규라의 차이를 유발할 수 있다. 그 만큼 창의적이 된다는 말이다. 앞으로 작가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각색에 따라 그리고 그의 '지금과 여기'라는 상황에 따라 다시 다른 요소들을 감싸면서 다르게 구성될 것이다. 그렇게 변환, 확장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지난 모더니즘 미술을 전복시킨 가장 강력한 힘들 중 하나인 '이야기'의 조각을 작가가 일찍부터 확신했던 것은 우연한 행운이었다기보다 예술가로서 그야말로 탁월한 예지의 소산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여 필자가 사족으로 덧붙이려는 것은 다가오는 시간의 경험들을 잘 활용하면서 이야기와 주제의 외연을 더욱 더 큰 폭으로 넓혀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야기는 본성상 그 서술적 연결구조 때문에 항상 다른 이질적 재현의 가능성들을 다양한 층위로 이끌어낸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그래서 그 다음에?"라거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래서 그리고 그래서... "라고 연결하지 않던가? 필자는 작가가 유년시절의 경험을 우화, 민담, 문학적 삽화 이외의 다른 영역으로 접목시켜 나갈 수 있길 강하게 바란다. ●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이미 충분히 내비치고 있다. 작가는 거의 동일한 테마를 형상화, 재형상화할 때마다 중복 이외에 각색과 패러디의 플레이를 -아직은 조금 소심하게- 즐기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시각과 촉감에 관련된 자신의 모든 감각 일체를 동원하여 조형적 변화를 일구어내는 데 더 노력하는 듯 보인다. 가령 앞서 언급했던 「주사위」 이외에, '유영'의 테마에 속한 「4人4魚」란 작품이 있다. 여기서 조각과 주변 공간의 길항작용은 아이들과 물고기들의 물고 물리는 연속 움직임의 환영 속에서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서로 맞물려 둥글게 선회하는 움직임은 뜻 밖에도 바로크적 역동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제한된 시간의 틀을 넘어 지금, 여기에로 율동감을 전달하는 듯하다. 아이와 물고기의 크기 역전-아이가 작고 물고기가 더 큰- 및 표면의 마티에르 대조-촉각적 상상력을 염두에 두자- 역시 이야기의 상상구조를 큰 폭으로 이동시킨다. 그 외에도 움직임의 환영과 이야기는 「새를 날려 보내다」, 「엄마와의 놀이」, 「형제들의 꽃」에서도 비추어진다. 후자의 경우, 형태의 연속적 반복이 비록 소극적이나마 운동감을 떠올리는 것이다. 더욱이 그 꽃송이 안에서 우리는 물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의 유영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를 상징한 은방울꽃, 그 꽃송이마다 작가 자신을 포함한 다섯 형제의 기억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피규라의 변화는 이야기의 확장이며, 필자는 그 변화가 앞으로 우리 모두 기대해도 좋을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서영희
FLOATING MEMORIES(FLOATING REMINISCENCE) ● 차가운 겨울,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슬픔 속에서도 다른 운명과 어떤 희망의 싹은 움트고 있었다. 아버지를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과거의 유년시절의 추억부터 모든 기억들이 순간의 찰나처럼 스쳐지나간다. 앞으로의 운명도 어떠한 행운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은방울꽃처럼 청초하게 느껴졌던 아버지의 삶과 열정을 돌에 담아 보았다. ■ 김성욱
Vol.20110714g | 김성욱展 / KIMSUNGWOOK / 金成旭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