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책임기획 / 장경호
참여작가 / 참여평론가 김은지 / 유근오 서평주 / 김종길 이보람 / 고충환 이재환 / 김숙경 인세인박 / 박영택
관람시간 / 10:30am~06: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역학개념으로 인체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뒤 일정기간의 잠복기를 거쳐서 발병되는 발화점을 이른다. 이는 흔히 철학이나 사회 또는 예술 등 기타 제분야에서 소수에 의한 어떤 형태의 사고 또는 행동이 수면아래서 진행되다가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나 는 것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 날로 다원화되는 세계에서 생산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단일한 그물망으로 포획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티핑 포인트』展은 35세 이하의 신진작가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작업에 내재되어 있는 다기한 발언들을 기존의 작가, 평론가의 눈을 통해 다양하게 들추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 장경호
나/너는 누구냐? ● 일반적으로 작품의 출발은 개인적 기호를 기반으로 한 미학적 신념을 표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런 측면에서 드로잉, 사진, 퍼포먼스 등의 김은지의 작업들은 개인적 독백에 근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독백은 혼자 말하기다. 하지만 작가는 '나와 내 안의 나 사이의 대화'라고 말한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대응적 관계가 불명확하지만, 그것은 분명 또 다른 나와의 소통을 위한 스스로의 대화이다. 대화는 소통을 위한 기본적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자 자아로 하여금 정체성을 확인케 하는 존재론적 형식이다. 그렇더라도 확답이 없이 질문만 던지는 대화는 허망하고 때로는 갈증이 되어 스스로를 옥죈다. 정체성은 언제나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는, 그 자체로 억압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종 작가는 도플갱어를 떠올린다. 그것도 때론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쌍생아적인 자기동질성을 넘어 자기분열을 야기하는 타자적 자아로 자리잡는다. 이는 병리학적으로는 까프그라 증후군 (Syndrome de Capgars)에 속한다. 허위와 허상, 정체성의 불안과 상실, 그 갈증은 증폭되고 덧없는 대화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상이다. 이렇듯 정체성을 위장한 혼돈의 자아가 화면에 펼쳐지고 있다. 화면은 유화나 아크릴에 비해 회화적 발언이 약한 과슈와 연필, 혹은 색연필로 빈약하리만큼 엷게 도포되어 있다. 그럴 만큼 김은지에게 세계의 인문학적 질서는 허약하다. 형상들조차 충돌과 어긋남으로 야기된 불안으로 떨고 있다. 분절된 결핍의 신체와 무수히 많은 작은 동그라미(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를 얽매고 있는 사회적 그물망으로도 보이는)로 채워진 경련의 드로잉은 의뭉스런 왜상을 낳는다. 이는 초월적 신체이거나 사물의 질서를 벗어난 형상이기에 끝없이 증식, 복제하면서 화면을 배회한다. 혹 이 동그라미들은 물거품이나 존재의 그림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들은 실체와의 동등한 위상을 넘어 정체성을 대신하거나 삼키듯 위압하고 있다. 이 드로잉은 정체성만큼이나 종착지가 없어 미리 정해진 이미지를 찾는 일도 무상하다. 이런 방법론을 통해 작가는 분열된 의식의 증식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자면 김은지의 작업은 확신에 찬 기존의 사회적 정설(doxa)에 대한 도발이다. 이런 역설 속에서 나/너에 대해 묻고자 한다. ■ 유근오
서평주는, 20여 년 전 통쾌한 한방의 비평적 시각언어로 종울음쳤던 박재동의 한겨레 만평미학을 회화미학으로 물려받았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얼음송곳으로 찌르듯 풍자했던 박재동의 미학이 서평주에게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 그는 사실이라는 현실과 진리를 '편집된 현실 혹은 진리'로 바꾸어 놓는 신문 속 사진들을 '회화적 재편집'으로 풍자의 신미학을 창조한다. ● 기사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거나 사진 스스로 기사의 전면성이 된 것들에서 '비꼬기'의 대상이 될 만한 것들을 추슬러 낸 다음, 그 사진위에 사진의 내용을 비꼬는 그림을 부분적으로 덧칠하거나 지운다. 그렇게 사진의 문맥을 살짝 바꿈으로서 그는 '언론의 정치성'을 해체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붓질은 뒷담화 같은 풍자효소의 곰팡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의 이런 회화적 전략을 단순히 '재치'라고 말하기에는 비판적 메시지가 작지 않아 보인다. 그 중 하나를 톺아본다. ● 그의 사진이든 회화 작품이든 하나같이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의 사회현실에 대한 풍자인데, 그 풍자에는 미학적 비판성이 서늘하게 살아있다는 점일 게다. '풍자諷刺'의 본뜻이 “남의 결점을 다른 것에 빗대어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이듯, 결점으로서의 현실모순을 그는 비웃고 폭로하고 공격한다. 직설로 곧장 치거나 반어로 우회하고 때로는 우화로 빗대어 놓은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더 빛난다. 지극히 어두운 이 현실에서, 자본이 말아먹은 미학의 언저리에서. ■ 김종길
이보람, 소독된 희생자 ● 잔혹한 이미지나 특히 희생자 이미지는 보기가 곤혹스럽다. 만연한 폭력을 증언하는 몸짓이나 윤리적 공감을 호소해오는 눈빛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처럼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운 이미지도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노출되다보면 무감해지고 무심해진다고, 수잔 손탁은 말한다. 세계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 즉시 이미지로 가공돼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이미지의 시대며 비주얼의 시대가 처한 딜레마다. ● 이보람의 작업은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린다. 인터넷에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라크 등등 세계 도처에서 전송돼온 참사 이미지며 희생자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주로 신제국주의의 각축과 충돌이 부른 전쟁에 연유한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데, 희생자 이미지를 흰색으로 그리고 핏빛을 분홍색으로 그려 일종의 그래픽적인 회화로 변질시킨다. 적나라한 현실을 애매한 이미지로 탈색하고, 참혹한 현실을 볼 만하고 즐길 만한 이미지로 표백한다. 이로써 원본에 반영된 적나라한 현실이나 참혹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인 그리고 감각적인 이미지만 오롯해진다. 그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무감하고 무심한 현실감이라는 역설을 불러일으키는데, 석고상만큼이나 창백한 희생자 이미지며 참사 이미지의 표면에 그 역설이 들러붙어있다. ■ 고충환
제도적 현실과 게임의 메커니즘 ● 사회적 삶의 억압과 부자유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이재환은 정치와 자본의 메커니즘이 드러내는 허위적 현실과 부조리를 관찰한다. 제도와 권력체제에 의해 구축된 이 현상은 그 자체로서 '사실'이며, 허상과 실체가 하나의 구조체로 존재하는 '사회 현실논리'에 작가는 자신의 표현행위를 개입시킨다. 이는 권력이 작용하는 가해의 비인간적 의미인 '폭력'을 공감각화하는 작업으로, 폭력에 관한 사회적 프로파간다식 원인규명과 비판이 아닌 우회적 혹은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과 지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 그는 「폭력분석_나열」(2009)에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사건"에 관한 문서와 언론기사들을 20m 벽면에 배치, 현대인의 인식에 미치는 언론의 위상과 편파적 허울을 수평관계에 위치시킨다. 또한 공간설치 「춤」(2010)에서 이질적 장치들의 작동이 산출하는 소음과 복잡한 반응상태를 통해 사회 부조리한 것들이 지닌 불가분의 실체를 인간의 감각기관이 인지하는 하나의 전체현상으로 치환한다. ● 오늘날 사회에서 삶의 주체가 지닌 사고의 오리지널리티란 실재하는가?; 제도의 현실과 부조리에 종속된 인간적 삶의 문제의식은 게임을 차용한 그의 근작에서 현대인의 일상범주로 가까이 다가가는 소통의 유연성을 보인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의지는 권력의 일방향적 지배논리에 의해 본질이 왜곡되거나 혹은 다른 성격으로 전이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규정된 법칙에 따라 시작은 존재하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게임의 속성과 동일시, 이를 사건화한다. 이와 같은 방식은 사회현실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지시하는 행위이기에 앞서 게임의 구조체계가 지닌 현상 즉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는 사회적 허위현실에 의해 변질된 삶의 주체성에 관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자아의 다차원적 인식에서 폭력에 대한 사회공동체의 주체로서 회복 가능한 담론을 희망하는 의지로... ■ 김숙경
작가는 화면 바탕에 케이블 선을 배열해서 부착했다. 수평으로 나란히 늘어선 선들은 균질하거나 평평한표면이 아니라 굴곡과 깊이가 다른 피부를 만들어낸다. 케이블선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화면위로 얼굴 하나가 커다랗게 떠오른다. 전선을 감싸고 있는 피복의 표면에 색을 입히고 다시 깊이가 다르게 그라인드로 깍고 갈아낸 흔적이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오브제 위로 구사되는 페인팅의 흔적은 기계적이 아니라 감정과 손, 마음의 굴곡들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편이다. 이 작업에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수단은 물감의 '토핑'이 아니라 케이블의 피부를 깍아 내는 행위에 있다. 강도와 압력에 의해 깊게 패이면 속이 드러나 금속성이 보이고 얇게 깍으면 고무질감의 외피가 패인 자취가 드러난다. 그것이 다른 깊이, 색상, 질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른거리는 이미지를 연상시켜준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표면을 깍아 나가면서 깊이의 층차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 이 '조각적 회화'는 아울러 서로 다른 색상의 케이블을 배열해서 그 위로 어두운 색을 전체적으로 입힌 후에 자동차 도료를 착색해나가고 지워나가고 깍고 다시 착색하는 여러 과정을 통해 주사선과 같은 이미지의 역동적인 상을 드러낸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는얼굴이다. 그 얼굴은 명료하기 보다는 흔들리고 왜곡되고 빠르게 스치면서 멈춰서있다. 작가 주변의 지인들이고 그저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화면으로 호명되어 얹혀 지는 얼굴은 범죄자나 미아를 찾는 수배전단지의 인물상과 유사하게 보여 지면서 선입견을 갖고 그 얼굴이미지를 보게 한다. 실제 사진이미지를 조작해서 영상이미지인 것처럼, 가상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텔레비전이란 매체가 대중을 조작하는 방식의 패러디다. 미디어는 이미지를 바꾸고 조작한다. 사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이미지/사건은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부재하고, 실제적이면서도 동시에 피상적이며,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의 실제세계와 텔레비전의 영상세계, 이 두 세계는 점점 더 뒤섞여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나아간다. 미디어가 재생산되어 원본이 되고 반대로 현실이 복사물이 된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자칭 세계 그 자체가 되었다. 이 같은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 기능에 따라 전적으로 환영과 모조품에 의해서만 양육된 인간 유형이 등장했다. ● 그것이 현대인이다. 박인세인의 작업은 오브제를 활용한 회화이자 조각적 방법론으로 이미지를 안긴다. 이 케이블선이란 결국 영상이미지를 전송시켜 보는 이의 망막에 이미지를 안겨주는, 제공해주는 결정적인 수단, 도구인 것을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케이블선 자체가 아예 이미지를 드러내버린 형국인 것이다. 사선으로 긁고 지나가는 힘들에 의해 강한 노이즈가 발생되는 것 같은 환청도 인다. 시각적인 이미지이자 다분히 청각을 자극하는 화면이다. 아울러 이 수평의 선으로 인해 감지되는 시간과 속도의 힘도 거론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면, 그 표면은 텔레비전 화면과 매우 유사하게 보여진다. 결국 작가는 우리에게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케이블 선을 활용해 보여준 것이다. 우리에게 보편적인 볼거리이자 광범위하게 편재되어 있는 텔레비전이란 매체의 이미지제공방식, 그 주사선의 흐름,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가 제공하는 이미지의 폭력적인 편재성과 동질성으로서의 강제적 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선에서 그 같은 방법론과 재료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오늘날 미디어에서 송출되는 무수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 박영택
Vol.20110714f |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 2011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