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WINDOW

2011_0618 ▶ 2011_0628

NaNa_FadeAway_판넬에 혼합재료_117×91cm_2011

초대일시_2011_0618_토요일_06:00pm

참여작가 / 나나_박은선_이미애_제유성_한성규

writer / 김정은(회사원)_이재경(변호사)_강지현(교사)_서정신(언어철학박사)_강소영(작가) 기획 / 박은선

스페이스함은 LexusPRIME社가 지원하는 미술전시공간입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함 space HaaM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37-2번지 렉서스빌딩 3층 Tel. +82.2.3475.9126 www.lexusprime.com

『Through the Window』전은 5인의 작가와 5인의 미술애호가들을 연계하여 기획된 전시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시점과 창들이 존재한다. 어떤 각도와 높이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대상도 달라 보이고 느낌도 다르기 마련이다. 미술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작가는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고 미술에 대한 대화의 대상 대부분이 미술관계자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미술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 또는 비전공자, 그 밖의 대중을 만나 미술에 대한 대화를 적극적으로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전공과 직업은 각자 다르나 평소 미술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미술애호가들이 각 작가의 writer로 참여한다. writer는 각자 연계된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거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을 방문해서 가진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그들만의 생각과 느낌을 전한다. 한 명의 감상자와 한 명의 작가가 모든 감상자와 모든 작가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공유함에 있어 미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의 전환점을 갖게 되길 바라며 또한 미술을 매개로 연계된 그들이 각자의 삶에 전에 없던 새로운 소통의 창 하나를 더 얻게 되기를 바란다. ■ 박은선

가벼운 탈출의 공간종이... 그 위에 나타난 사라져 가는 것 들, 그리고 멸종위기의 동물. ● 흔히들 미술이라고 하면 스케치북, 캔버스, 아크릴판 그도 아니면 좀 다르고 특이하고 무언가 더 있어 보이는 재료에 나타나야 한다고들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종이에 끄적거리는 건–낙서이지 어떤 예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을 것 이라는 건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저의 선입견을 이번 나나 작가님의 작품작업을 통해 깨버릴 수 있었습니다. 가벼운 종이들, 그리고"전형적인 스케치를 하는" ,탈출의 공간이 되었던 다양한 종이들. 제가 아는 종이들도 간간히 보여서 반가웠습니다. 여고생들만 그랬을까요? 종이는 따분한 수업시간에 잠시나마 제게 해방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디지털세대에 왠 종이 타령이냐고 하시겠지만 그 종이들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가벼운 종이, 그리고 편안함을 주는 종이들 위에 작가님이 표현하려고 하셨던 것은 "가볍지 않은" 메시지였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 들. 그리고 멸종 위기의 동물들. 사실 멸종 위기의 동물들 스케치는 제 눈을 충분히 사로 잡았습니다. 귀엽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는 표정들. 그런 디테일을 어떻게 그렇게 표현을 잘하셨을까요? 이제 사라져 가는 것 들을 표현하는데 종이만큼 좋은 재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그리고 어찌 보면 아니 아직도 메모를 생활화하고 있으면서도–왜 그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에 열광하고 있을까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도 그냥 내 생각을 표현하기 쉬웠던 종이도 사라져 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단 생태계가 파괴되어 사라지는 동식물뿐 아니라 이젠 점점 멀어지는 우리에게 있었던 작은 감정의 사치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요? 제겐 그렇습니다. 저 종이들이, 그리고 저 위의 스케치가 살짝 오늘 만큼은 제게 앞만 보고 가지 말고 잠시 딴 생각을 해도 좋다고, 그러면서 우리를 떠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습들을 한번 보아 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이실까요? ■ 나나_김정은

박은선_Cast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06

멈춤과 움직임 속에 만나는 또 다른 세계... ● 그녀는 움직인다... 아니다 그녀는 멈춰있다. 아니다 그녀는 움직이는 중이다. 아니다 그녀는 또 멈춰있는 것이다. 박은선 작가는 세상을 하나로 바라보고 있다. 언뜻, 이세상은 멈춤과 움직임으로 나눠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에서는 멈춤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의 세계이다. 아니, 그녀의 작품안에서는 혼재해 있으며, 가상과 현실의 구분도 무의미 해지고 있다. 박은선이 선택하는 선과 면, 그리고 색채는 세상을 하나로 담고 있다. 그녀가 유기적인 공간이라고 일컫는 공간에서 멈춤과 움직임이 공존하고 있다.그 모습이 박은선이 바라보는,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진정한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3차원과 4차원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그녀. 의자의 다리면서도 동시에 등받이가 될 수 있는 상태. 길이면서도 테이블 또는 벽이 될 수 도 있는 공간이나 상태. 평범한 일상에서 각구성 요소가 한 몸처럼 일정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평면에서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목격한다. Escher의 작품에서나 느낄 수 있는 오묘한 진리가 더 역동적으로 녹아 있다. 거울과 같은 매체, 그리고 오브제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본다. 현실과 가상사이에서 미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은 그 한계를 잊어 버린다. 그녀의 작품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찾아냈다. 세상은 결국 거대한 틀속에서 하나하나씩 관계를 맺어가며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그 움직임은 결국 멈춰진 존재들과 하나의 공동체로서 짝지워진다는 것... 리얼리티란 가상속 공간속에도 존재한다. 그 가상공간은 우리의 현실공간과 이어져있다. 현실공간을 닮으면서도 재현적이지 않은 공간이다. 그녀 안에서 우리의 시점과 감성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 박은선_이재경

이미애_Road Trip I – Texas_캔버스에 유채_71×96.5cm_2009

풍경이 주는 안식으로, 현대인의 부질없는 욕망을 없애는듯... ●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을 기억 속에서 꼽으라면 어떤 여행일까? 마음에 맞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이 아닐까 한다. 이미애작가는긴미국생활을마치고한국으로돌아오기전에딸과함께텍사스주에있는댈러스 (Dallas, Texas)로 자동차 여행을 했다고 한다. 여행 중 날씨가 너무 좋고, 구름이 사랑스러워 이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 풍경화로 다시 조우하게 됐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이 자연을 담는 풍경화가 된 것도 이 때의 즐거운 기억 때문일것이다. 풍경화란 여러 가지 다른 예술을 결합하여 그 상승효과를 통해 자연을 미화함으로써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18세기 베네치아식 풍경화는 감탄스러울 만큼 세밀하고 정교해서 이 풍경화가 담긴 관광 그림엽서를 사오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고, 이 엽서를 간직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그 여행을 강렬하게 떠오르게 한다. 이미애 작가는 여행을 할 때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도 여행에 대한 기억을 작업의 바탕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작가는 하늘을 자주 본다고 한다. 하늘의 풍경은 작가 안의 휴식과 희망 같기 때문이다. 이미애작가의길은구름따라끝없이연결되어지고, 펼쳐진 들은 저 너머로 끝없이 중첩된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인 듯 사뭇 경이롭기도 하지만, 어느덧 그림 속에 본인도 흡입된 거 같이 빠져 있게 된다. 작가의 그림들의 주요 주제는 폭넓게 펼쳐진 일관된 구도로 그려진 풍경이다. 풍경화의 배경적 요소가 반영되었으면서도 곳곳에서 모던함이 엿보인다. 자연의 풍경을 커다란 화폭에 담아낸 이미애작가의 작품들은 자연스러운 구도로 하늘을 휴식공간으로 바라보는 감상자의 마음과 교감한다. ● 형형색색자연은 인간의 삶의 쉼터... ●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 속에서 얻은 생동감 있는 구름의 모양이나 계절, 시간대(오전, 한낮, 오후), 하늘 위, 아래의 색조 변화가 그림에 '느낌' 을 준다. 잔잔하게 덮인 색조, 안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톤, 섬세한 손길로 다독거려진 터치의 조화가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고요와 일상의 여운이 어우러진 대지와 하늘에 걸린 구름은 자유로우면서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역동적인 묘한 매력이 있다. 존컨스터블은 그의 풍경화(landscape painting)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 낙원의 아름다움을 반영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컨스터블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 자꾸 반복해 그려야 한다고 하였고, 픽쳐레스크(picturesque: 풍경으로보는 이상향)는 제아무리 사실적인 풍경이라도 인간의 기준에 따라 선택되어 제한된 화면 안에 표현되는 것인 '인위적인 자연'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풍경이 왜 이상향을 담은 그림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도시가 발달하고 그에 의한 스트레스가 늘어날수록 전원 풍경은 널리 사랑 받게 되는 것 같다. 작가는 오랜 세월을 거쳐 숙성된 숭고한 자연을 고마운 마음으로 그린 듯하다. 이런 그림을 보면 우리의 부질없는 욕심과 망상이 한순간 덧없게 느껴진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왠지 기대고 싶은, 작은 것이나마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미소가 편안한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미애 작가의 작품을 통해, 일상의 잔잔한 휴식을 느끼며 편안하게 감상하고, 자연과 미의 질서를 찾는 습관을 배우고 기르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자연을 통해 나의 진정한 존재의 이유와, 여유로운 자연의 섭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미애_강지현

제유성_The invisible_캔버스에 유채_72×72cm_2011

희망이라는 이름의 풍경 ● 1. 제유성,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다!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매한 욕망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적어도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이 이런 욕망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혹,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인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자신에 대한 솔직한 표현을 시도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표현 능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볼 때, 제유성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솔직함을 향한 용기에 있어서나 표현의 능력에 있어서나 그는 축복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처럼, 그러면서 소설가와는 달리 제유성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세계의 구조, 그 세계와 자신이 즐겁게 소통하고 있는 많은 방식들, 희망이 가능한 존재론적 이유, 이 모든 것이 그림의 색과 형태와 깊이를 통해 복합적으로 전달된다. 때로는 수필처럼, 때로는 단편이나 장편소설처럼, 때로는 한 편의 시처럼 제유성의 그림은 형태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의 메시지는 일관되고 정연하다. 물론 그 메시지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려는 적극적 노력 안에서만 읽혀지지만 말이다. 2. 수많은 세계와 소통하는 여러 개의 방식...제유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존재의 전체가 아니라고 그 누구보다 단호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그의 그림에는 다른 세계로 열린 수많은 창이 있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 갈 수 있는 세계가 따로 따로 마련되어 있고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작가의 설정과 표현은 매우 철학적이다. 17세기 철학자 라이프니쯔는 여러 개의 가능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 중에서 가장 완벽한 세계가 신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제유성이 라이프니쯔의 기독교적 직관, 즉 보다 나은 세계의 존재를 확신하는 직관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제유성의 세계관이 지닌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토록 수많은 세계의 이야기를 그려내기에는 100호, 200호의 화폭도 좁기만 할 것 같지만 제유성은 시각적 구성의 절약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집어넣어 그려내고 있다. 그는 라이프니쯔보다 평등주의자인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제유성이그려내고있는다양한세계는우열의잣대로비교되는세계가아니라, 모두 다 아름답고, 재미있으며,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화가로서 그는 각각의 세계를 조금씩 다르게 그려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각각의 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 뿐이다. 3.상상력의 힘, 희망의 힘...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제 각기 다른 이유에 의해 삶의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마음속에서나 실제에서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제유성이 그려 보여 주고 있는 다양한, 그리고 재미있는 세계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창조되어 가고 있는 한, 내 몸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 대해 절망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제유성방식으로창조적상상력이계속발휘되고있는한에는, 더 밝고, 즐겁고, 신비로운 세계들이 주위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만들어지고 존재하고 있다는 희망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제유성_서정신

한성규_Trave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94cm_2011

현실 속의 보태니아 ● 작가 한성규는 자신의 그림을 프랑스의 야수파 앙리루소(1844~1910)의 그림 같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 루소와 한작가의 표현하는 색감에 있어서, 그 강렬함은 비슷하다. 한작가의 여행시리즈1편 인트래버(travel)에서, 고양이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몸을 그린 '사실과 목마를 옆에 두고' 어린시절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놀이에 대한 환상'을 교차시킨 점,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이 작품기법은 루소의 작품에서도 보인다. 순진무구한 작가정신에 의해 그린 듯한, 그림에 배어 나오는 '작가주의적' 조형감도 비슷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한작가의 그림은, 주로 '개발과 발전'의 도시화에, 자연과 어린시절을 '빼앗긴' 그의 잃어버린 꿈을 그리고 있어, 그 개인적. 시대적 그림주제의 차이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도시화의 결과물은 아파트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작가는 중1학년때부터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한 그의 부모님의 배려 아닌 배려로, 가족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홀로, 오래동안 살고 있다. 그가 화가로서 고독한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시간들을, 그림의 주제가 되고 있는 '개발과 발전'에서 찾는다면 재미있는 아이러니일까? 무제(Untitled)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중간의 꽃과 왼쪽의 사막여우들과 오른편의 어린아이의3각 구도는 어린 시절의 어떤 놀이장소를 환상화한 듯하다. 놀이터에서 철없이 뛰어 놀아야하는 시절,『어린왕자』에 나오는 사막여우들과 무슨 실갱이를 '줄달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의 집안은 천주교란다. 그러나 그는 불교신자라고 소개한다. 도시화의 과정에서 놀이터를뺏긴 어린 한성규는, 아파트를 분양해주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개발업자에 의해 '당해' 아들에게 아파트를 사주지 못해, 오랜 시간 분명 힘들어했던 그의 부모님과의 인연을,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이해하고, '치유' 받고자한 건 아닐까? 작가의 종류를 2개로 나눌때, 자신을 사회적인 작가라기보다는 '내면의작가'라고 말하는 한성규. 한작가와 나눈 많은 대화에서 종교얘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도 아직 종교관이 정리가안 되었는지, 위와 같은 나의 분석에 조용히 듣고만 있으며, 내면의 소리에만 귀기울이는 듯 했다. 그가 그리는 꽃들은 별의미가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냥 사진이나 실물로 보고 마음에 들면, 쉽게 그림 소재화 한단다. '식물의 이상향을 향해'(ToBotania)라는 작품은, 흡사 고호의작품에서나오는보랏빛아이리스꽃아래, 사막여우가 어울리지 않게 앉아있는 그림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식물과 동물의 만남은, Botany(식물학)와 Utopia(유토피아.이상향)의 조합어, 보태니아(Botania)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이는 한작가가 지향하는 우주관이나 세계관이 아닐까? 이미 한작가는 길잃은 5마리(?)의 고양이들을 거두어, 한집에서 가족같이 조화롭게 어울어지며 살아가고 있으니, 보태니아라는 이상을 현실화하고 있는것이다. 한성규작가. 그의 꿈과 함께, 원대한 꿈을 향해서 크게 날개짓을 하며 높게오를 날을 기다린다. ■ 한성규_강소영

Vol.20110619b | Through the WINDOW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