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11_0629_수요일_07:00pm
참여작가 창작 / 김덕영_김소철_오아영 비평 / 박찬미_이민지_조민우
주최 /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력 / 소셜아트컴퍼니_㈜아침미디어 협찬 / ㈜석수유통
기획/연출 / 강수민 진행 / 현소영_안세희_이미솔 디자인 / 방은미 교육/막수저 / 이도경_임성희_선지연_정해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supplement space STONE & WATER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286-15번지 2층 Tel. +82.31.472.2886 www.stonenwater.org
석수아트터미널-샛 Stone&Water Gallery Seoksu Art Terminal-SAT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287-38번지 1층 Tel. +82.31.472.2886 www.stonenwater.org
GYA PROJECT 2011 ● Gyeonggi Young Artist Project 2011 (GYA 2011) 은 2010년도에 신설된 GYA 2010의 후속 프로젝트로 경기지역을 기반으로 성장, 활동하며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와 비평가를 발굴•지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GYA는 일회성 전시지원에 그치지 않고 젊은 예술가의 '발굴'과 '지원'이라는 명제를 정확히 설정하여 지속적 프로그램과 전시지원을 통한 실질적 반향을 유도하고자 한다. 또한 예술가의 범주를 '창작'과 '비평'으로 설정하고 창작의 행위와 더불어 비평의 생성에도 무게를 두며, 작가와 비평가의 1대 1매칭을 구성하여 상호간 교류와 소통을 통해 창작활동의 뚜렷한 목적성과 예술적 담론을 형성케 하고자 한다.
GYA 2011 Showcase Exhibition 색:色 은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의 경기지역 창작/비평가 발굴•지원 프로젝트『Gyeonggi Young Artist Project 2011』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첫 번째 전시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창작_김덕영, 김소철, 오아영'과 '비평_박찬미, 이민지, 조민우'를 소개하고 GYA 2011의 시작을 알리고자 기획되었다. ● 이번 전시의 부제인『색:色』은 색채심리학에서 논하는 색의 개념으로, 사람의 머릿속 관념과 무의식적 추론에 의해 생성되는 '기억색'「memorial color, 記憶色」과 빛에 따른 물리적 현상을 통해 측색되는 '현상색'「appearance color, 現像色」을 이르는 말이다. 기억색과 현상색은 하나의 객체를 바라볼 때 인간이 자각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정의방법으로 발생된 두 개의 색의 개념이며,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내면과 외면으로 부터 받는 영향과 이 둘의 상호관계 그리고 이를 통해 촉발되는 현상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 개인적 경험과 심리상태, 문화적 배경, 사회적 현상, 지역적 환경, 관심사 등의 영향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는 '창작', 그리고 이 창작의 작업 속에서 감정적, 사회적 줄기를 읽고 텍스트를 통해 외양의 것으로 생성하는 '비평'. 이 두 역할과 서로의 관계에서 앞서 말한 두 개의 색의 개념이 갖는 성향과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처럼 창작과 비평은 이번 GYA 2011에서 서로 다른 두 지각경로를 통해 실험적 예술활동을 이어갈 것이며, 무엇보다 기억색과 현상색이 갖는 다르지만 같은, 같지만 다른 두 개의 새로운 '색:色'을 드러낼 것이다. 또한 같은 선상에선 이 젊은 예술가들이 온전한 소통 속에서 서로의 개념을 뚜렷이 하였을 때, 이들이 생성해낼 색:色은 더욱 실험적이고 신선한 작품으로 탄생할 것이라 기대한다. ■ 강수민
GYA 2011 창작 ● 보여지지 않는 곳의 고통, 반응 자체는 언젠가 하나의 현상으로 보여지게 된다.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겉이라는 틀은 무언가에 의해 망가지고 변형되며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파괴와 소멸 그리고 파괴와 생성은 같이 존재한다. ● 나는 'Pang' 이라는 타이틀로 내부로부터 반응되어 외부에 드러나는 결과적 이미지인 크랙과 변형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작업을 진행한다.(Pang은 갑자기 격렬하게 일어나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아픔을 뜻하는 단어로 표면의 갈라짐 혹은 폭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부의 반응으로 인한 현상를 말한다.) ■ 창작_김덕영
나는 사물과 인물, 문화가 그동안 쌓아왔던 역사성, 그리고 이 전통적인 상태에서 고유한 사적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서술방식은 환경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이를 통해 주도적으로 습관적인 상태와의 입장을 재설정할 수 있다. 아직-인식되지-않은 일상의 상태는 의심을 하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은 규칙으로 행동과 사고를 형성시키며, 인식의 순간은 물건의 망가져 쓸모없어짐, 인물의 죽음, 다른 문화의 유입 또는 생성과 같은 물리적인 상태의 변화에서는 필연적으로 경험되어진다. 또한, 사적인 감정이나 기억에 유발되기도 한다. ● 나는 일상의 사건/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입장을 재설정하여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탐구로 작업을 진행한다.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함축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이전의 작업에서 나는 깨진 컵이나 필라멘트가 나간 전구 등을 파란 천으로 싸는 행동으로 그 물건에 사적인 기념품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거나(망가진 물건을 해진 파란 바지로 싸기, 2008), 친할머니의 사망이라는 사건을 객관적인 기술과 감정적인 기억 사이 어딘가 위치한 입장으로 보이기 위해 벽지에 반복적인 텍스트를 새겨 넣고 이를 도배 후 떼어내는 작업에서(송별이 끝나고, 2010), 사적인 경험과 이해를 이야기한다. 또,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동안, 손님들과 대화의 수단을 연장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인 팁을 두고 나온다든지(호텔, 2008), 안산 원곡동의,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를 위해 자국/자문화의 음식을 제공한다는 특징적 현상에서, 나도 나의 독자적 음식을 내놓는 작업에서(순무김치와 재첩국, 2010) 주위의 환경과 그것에 자신 스스로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해 연구한다. ● 앞으로,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지 이미 50년이 넘은 기념비를 소재로「맥아더 동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진행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적으로 여러 층위가 섞여 있는 공적인 문화/상황을, 어떻게 사적으로 재설정하여 고유한 내러티브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탐구한다. ■ 창작_김소철
어릴적 누구나 생각해봤을 지우개 가루와 몸의 때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시작한 작업으로 현재는 목욕탕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가벼운 옷차림, 얼음 띄워 빨대 꽂은 커피, 소금을 한줌 쥐어 뱃살에 열심히 비비는 아줌마, 탕에 몸은 들어가도 머리카락은 넣으면 혼나요. 과할정도로 탐하는 서로의 등, 사우나의 힘이 느껴지는 냉탕에서 발차기, 탕에 앉아 눈을 감고 피로를 풀어내는 사람, 까만 망사속옷을 입은 때밀이 아줌마, 그대 발톱을 담은 물이 나의 입술에. 이번 때는 좀 크네. 여자들이 그렇게 뭘 훔쳐가나요, 어디선가 나는 향긋한 냄새는 반짝이는 피부를 위한 노력, 너는 어쩜 그렇게 말랐니, 때밀이 아줌마를 둘러싼 때 전문도구, 목욕 후 마시는 바나나우유는 참으로 맛나다, 몸이 시원해지는 냉탕온탕 바꿔 들어가기, 목욕탕에서 열리는 탕 이벤트, 비누칠 해 쓰는 공용의 의자와 바가지, 냉탕의 폭포는 아직 도전해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멈추질 않는 모래시계, 잠시 열렸던 문 새로 들어온 새바람은 놓치지 않고 힘껏 들이마신다, 언제부터 영글게 맺힌지 모르는 천장의 물방울, 어느샌가 금지된 사우나에서 팬티말리기, 탕에 담그면 혼나는 수건, 때밀이 아줌마는 물을 자주 끼얹어주지 않아 나의 때에 내 얼굴은 붉어집니다. ■ 창작_오아영
GYA 2011 비평 ● 그저 손을 내밀어볼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아무도 안보는 데서, 두 눈을 감고 뭔가를 꼬옥 안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손이나 발이 내밀면 쑤욱- 하고 벽을 통과하는, 일종의 초능력 같은 것.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딘가로 이동한다거나, 변신한다거나, 그런 거 말고, 그냥 쑥 내밀었는데, 그냥 쑥 내밀어지는 것. 몸이 벽을 통과한다는 것부터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이렇게 말하면 궤변이겠지만, 내가 바란 것은 단지 그것 뿐 뭔가 대단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나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내가 담긴 이 그릇의 테두리를 가늠이나 해볼 수 있을까, 이 방을 넘어서, 또 머나먼 어딘가를 넘어서, 라고 막연하게 떠올려보곤 했다. ● 아마 우주 브로마이드 때문인 것 같다. 새로운 방으로 이사 오면서 벽이 썰렁하기에 뭐라도 하나 붙여놓자 해서 눈에 띈 것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다. 언제 어디서 샀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오래돼서 책장을 펼치자 쩍쩍 소리가 났다. 그때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우주의 한 페이지가 펼쳐진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정신이 멍 했다. 아, 맞다. 나 저기 살고 있는 거잖아. 아주 당연하고 새삼스런 사실이, 그러나 한 번도 실제로 확인해본 적 없는 사실이, 겸연쩍으면서도 능청스럽게 다가왔다. 그 느낌은 뭐랄까. 길을 걷는데 누가 불쑥 튀어나와 '당신은 x년x월x일생 누구누구 아무개입니다' 라고 말하며 명찰을 손에 쥐어준 느낌이었다. ● 그 누구더라, 외국 가수, 마돈나던가. 그 여자는 처음 사람들을 파악할 때 이런 테스트를 한다고 들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여주고 이게 누구의 그림인지 아냐고 물어본대나. 나랑 마돈나를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나도 테스트 비슷한 것이 있긴 하다. 「지구 근처에 지름 1km 이상의 소행성이 850여개 있는데요, 30년 뒤에 지구와 행성 하나가 충돌할 수도 있대요. 그 확률은 1/45,000. 이렇게 보면 엄청 희박한 것 같지만 길 걷다가 자동차에 치일 확률과 같다니까 좀 현실감이 들지 않아요? 소행성들 중 하나라도 충돌할 경우 그 위력은 히로시마 핵폭탄의 50,000,000배래요. 어떻게 생각해요?」 정말 멋지지 않은가! 수억 년 역사의 끝을 장식할, 지구의 마지막 인류가 될 수 있다니. 혹시나 해서 쓰는 말인데, 난 절대 이 세상 얼른 끝장나 버려라, 모두 죽어버려야 해, 따위의 얘길 하는 게 아니다. 이건 염세나 허무와는 좀 다른 것이다. ● 그래서였나. 나는 몸에 돌돌 말은 이불을 자궁삼아 배 속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불 속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는데, 그 작은 우주에서조차도 외로웠다. 이건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깨달았다. 단지 나는 이걸 품고, 결여를 내 일부분으로 만들어서, 내가 엎지른 것들, 내 얼룩들, 그것들이 나를 전처럼 상처 입히지 못하게 모두 품은 사람이 되어서 지나갔던 길들을 다시 지나가게 될 것이다. 생각한다. 그건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살게 된다. 그래서였다. 그저 손을 내밀어 봤을 뿐이었다. 물론 아무도 안보는 데서, 두 눈을 감고 뭔가를 꼬옥 안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모차르트처럼, '나는 서로 사랑하는 음표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비로소 세상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 비평_박찬미
언제부턴가 그 무엇에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인과관계들이 뒤통수를 치고, '예상'이라는 범위가 얼마나 편협하고 위험한 것인지 가늠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의 모든 말은 확언으로 끝맺어지기 보단, 여지를 남기며 흐리멍텅하게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그건 어쩌면 정당성의 부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리나 진실에 대한 정당성이 아니라, 앞-뒤의 이치가 맞아 떨어지는지에 대한, 그런 정당성의 부재. ● 어정쩡한 불신 속에 살아가지만, 나를 둘러싼 시공간은 끊임없이 변하고, 쉼 없이 나를 새로운 만남으로 떠밀려 보낸다. 새로운 만남들이 나에게 타자他者로 다가오듯, 그 타자他者의 시공간 역시 나를 철저히 타자로 받아들인다. ● 하지만 나와 너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를 만들어 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살고 있음'을 알고 그리고 이해해야 한다. 나의 앞-뒤로 너의 앞-뒤를 강요한다거나 재단할 수 없다. 타자의 이치에 나의 이치를 들이밀기 보단, 그의 이치를 내게로 끌어들이며 '우리'를 재구성해야 한다. 나와 다른 너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로서', '너로서', 그리고 '우리로서' 살아가며 그 동시대를 함께 만들 수 있으니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의 욕심의 모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비난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 모든 시대가 고유의 의식구조와 삶의 방식이 있듯, 모든 개인은 각자의 의식구조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예술은 서로 다른 예술적 의미와 방식을 담고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배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름을 이해할 때 발견되는 우리의 접점이 품은 창발적 시너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 나의 비평은 불신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왜 나는 지금 여기서 불신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지 그 당위성을 꿰는 작업이다. 모든 텍스트는 글쓴이의 손을 떠나는 순간 수많은 오독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처럼 조형적 언어로 매개한 작가와의 마주함은 우리 각자의 맥락을 새로이 풍요롭게 할 것이다. ■ 비평_이민지
삶을 닮은 예술의 지평 ● 하루가 지나갈 무렵이면 의식처럼 오늘을 되돌아보고 무심한 표정으로 뉴스를 찾아본다. 오늘도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내가 무던하게 보낸 하루에 비하면 세상은 요란하게도 오늘을 보냈구나. 어차피 내일이면 쉽사리 잊어버릴 기억들인데도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그래, 오늘도 역시 나름 예술을 한답시고 혼자서 주변의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나만의 하루를 보내버린 그저 그런 날인가 보다. 이렇게 혼자 살아가고 있지만 당신네들을 영원히 잊고 살수는 없을 텐데, 더더욱 나뉘어 살 수도 없을 것인데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다시금 스스로를 반성해본다. ● 예술을 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인생의 선배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마음과 예술적 경험들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었을까? 과거 1980년대의 민중미술은 함께 더불어 살고 나눔을 행하는 실천적 삶의 미술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었을까? 한편으론 오늘날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미술이라는 것들처럼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기회주의적 순간은 아니었을까? 분명 그들은 '공동체적 신명을 회복하여 현실 속에서의 일상개념을 규정'하고 삶과 가장 밀착한 미술을 보급 또는 향유할려고 노력한 미술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많은 의구심 중에서도 실천을 우선적으로 행하였다는 점은 깊은 경외감을 갖게 만든다. 적어도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민과 사고를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꼭 죄인처럼 느껴지는 나에겐 말이다. ● 최근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유행으로 다양한 지원사업이 생겨나고 많은 예술가들이 지역에 개입하여 단기간동안 그 지역민들과 결과물을 뚝딱 만들어낸다. 공공미술프로젝트가 결과물과 함께 과정도 중요시되고 있지만, 지금은 그런 과정까지도 결과물과 같이 일종의 '보여주기'식의 미술을 창조해냈다. 무언가 사회적이고 예술자원봉사를 하는 아름다운 모습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는 부단한 모습들은 그들의 창작적 행위들보다 아름답지 못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그런 미술프로젝트들이 곳곳에서 행하여지는 가운데, 공공적 미술을 바라보는 많은 일반인과 관객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외면한다. 새로운 장르, 새로운 공공미술, 소통의 미술로서 오늘날 우후죽순 행해지는 공공미술들은 과연 진정으로 문화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또는 실천하는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목적성을 갖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소통 아닌 소통의 예술을 하고 있다면, 진심으로 바라건대 이제는 지양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 '공동체'는 생활과 운명을 같이 하는 조직체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불행하고 불편한 시대에서 늘 경쟁을 해야만 하고 누군가를 밀쳐 내거나 짓밟고 올라가는 자유로운 시대의 모순에서 어찌 공동체적 삶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이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예술로서 삶을 아름답게 하고 삶에 가까운, 삶을 닮은 예술을 통해서 서로의 이질감은 줄이고 예술을 매개체로 문화적 삶의 공동체를 발현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를 존중해서, 함께 지혜와 경험을 나누어 가는 예술실천을 하도록 하자. 과거의 알 수 없는 잘못들이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더라도 소박한 꿈을 잃지 말고 한걸음씩 실천해 간다면, 우리의 삶을 닮은 공동체적 예술의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비평_조민우
Vol.20110611f | GYA 2011 SHOWCASE EXHIBITION 색:色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