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601_수요일_06:00pm
기획 / 성아리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club.cyworld.com/gallery175
『Her Synecdoche(가제)』는 전시장의 하나의 무대로 전환하는 형식의 전시이다. ● 이러한 형식의 모티프는 영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03년도 영화 『도그빌Dogville』과 찰리 카우프만의 2007년도 영화 『시네도키 뉴욕Synecdoche New York』에서 비롯되었다. 두 영화는 모두 연극이라는 장치를 이용하고 있다. 『도그빌』의 경우, 영화의 배경은 거대한 창고와 같은 공간을 흰 선으로 구획하고 텍스트로 지시함으로써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무대 위에는 기능이 축소된 추상적인 구조물들과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존재를 암시하는 사물들이 놓여있다. 배우들은 이 상징적인 구조물들과 사물들, 벽이 없는 가정된 상황에서 마치 배역의 삶을 살 듯 연기한다. 이러한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관객의 개입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장면에 존재하는 모든 배역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영화 속 연극적 장치는 관객의 경험을 영화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영화의 일방적 서사를 해체하고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이로써 영화가 선택한 연극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연극성은 오히려 영화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다. 『시네도키 뉴욕』의 경우에는 영화 속 배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연극의 무대와 영화 인물들이 그대로 연극에 등장한다. 연극의 감독은 자신의 역할을 할 배우를 고용하고 자신의 주변 인물들의 삶을 그대로 연극의 배우로 등장시킨다. 이 연극의 구조는 개별적인 개인의 삶이 닿는 한 지점을 계속해서 연극 무대로 옮겨와 "현실 속 있을 법한" 배우를 무수히 생산해낸다. 관객은 그 중 한 명이다. 여기서 실제와 연극 안의 리얼리티가 만나면서 영화와 영화 속의 연극 그리고 이 영화와 실제 세계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
전시에 참여하는 네 명의 작가들은 고우리, 미셸 백, 이지영, 장규정 이다. 이들은 각각 판화, 사진, 설치와 드로잉 등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다루는 매체의 다양성만큼, 작품은 형식적 측면에서나 내용과 주제적인 측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각각의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서사를 진행해 나가는 극의 구조처럼 공통점 없는 작가들의 서로 다른 작업들 간에 새로운 서사가 발생할 수 무대를 기대한다.
이 작가들을 한 무대에 모은 계기는 우선 이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때문이다. 이들은 작가라는 직업을 온전히 영위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삶과 작업이 분리 할 수 없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미술이라는 도구는 자신의 심리적 사건들의 기록이기도 하고 언어화되지 않은 대화의 출구이며 아직 보류중인 어떤 생각의 저장소기 때문에 진행중인 상태로 남아있다. 또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적응하거나 그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제스처, 자신을 정의하는 수단이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기민한 시선으로 구체적인 형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전달 할 만한 특정한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나 어떤 특정한 배열들은 작업으로 분류되지 않은 채, 자신의 공간 곳곳에 남아 있다. 또 이것을 타인에게 얼마만큼 개방할 수 있는가의 민감한 문제가 있다. 이들은 작업을 손에 놓은 적도 없지만 스스로를 작가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 탓으로 작업의 속도는 느리고 작업의 수는 많지 않으며 지금까지 전시라는 제도에도 지속적으로 속한 바 없다.
또 한가지 공통점은 이들 작업에 언어화하기 어려운 아주 특수하고 섬세한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른 사람은 중요하게 보지 않는 것 같으나 자신에게는 너무 크게 보이고 설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작업화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작가가 말하듯, 작품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뉘앙스와 감수성은 언어화하기에 매우 불명확하다. 많은 미술작품은 그 자체가 이러한 불분명한 존재를 상황을 설정해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작업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조차 아직 부재한 상황이었다. 전시는 작품이 갖는 불투명함을 드러낼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즉 연극 무대의 차용은 전시 제도로 인해 작가와 작품이 분리되어 단절되는 얼마 간의 기간을 연속되는 이야기 중의 한 장면scene으로 옮겨 연속성을 유지하게 한다. 이로써 작가는 작품과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으며, 작품에 내재된 불확실한 요소들에 대한 불안을 유보할 수 있다. 도그빌의 배우들이 벽의 존재와 상관없이 배역의 삶을 살듯, 전시장은 각각의 작가 혹은 작품의 애티튜드와 제스처가 상징적으로 작동하는 무대가 된다. 이 상황에 또 다른 개입과 변수가 등장한다. 그것은 관객이다. 전시장에 들어오는 관객들은 상징적으로 무대 위에 오른다. 관객은 무대에 자연스럽게 포함되면서 작품과 작품들 사이에서 작품과 자신의 새로운 관계를 매개하는 배역을 맡는다. 전시장에는 각 작품들을 비추는 조명들이 불규칙적으로 켜지고 꺼지면서 관객의 동선을 유도한다. (물론 이러한 동선 역시 관객의 선택에 달려있다.) 관객은 스스로 선택한 동선에 따라 대면한 작품과의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도, 작품과 전시에 대해 불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은 "그러한 배역"을 수행하는 극 중의 배우로 존재한다. 무대에 속한 관객은 무대 위에서 분리된 구경꾼이 아니라, 전시장에 들어선다는 의지와 함께 작품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는 관객에 대한 배려나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원래의 갤러리에 습관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관객이 연극에 포함되었다는 상황과 전시장의 작업이 수행하는 연기는 대단히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객의 행하는 경험 자체가 예술적 상황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술이, 혹은 사회, 자신이 속한 세계가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과 아주 밀접한 간격에서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변화한다는 점이다. 전시를 통해 발생하는 개개인의 서사가 자신들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에 잔잔한 반향이 되길 바란다. ■ 성아리
Vol.20110606d | Her Synecdoche 허 시네도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