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noia

조영표展 / JOYOUNGPYO / 曺永杓 / painting   2011_0601 ▶ 2011_0607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14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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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602_목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gallery.hwabong.com

퇴행 혹은 낯섦에 대한 단상들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나의 유년시절이다. 바라보고 있어도 폐기된 시간의 회환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유년기뿐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불가역성이 아니고, 환원불가능성이기 때문에, 발작적으로 드러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유년시절에서 나는, 나 자신의 어두운 이면, 권태, 상처받기 쉬움, 여러 가지 절망들에 대한 소질, 불행하게도 모든 표현들로부터 단절된 내면적 동요를 명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중에서- ● 예술은 강박관념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박증, 편집증, 망상, 분열은 오히려 예술적 영감의 풍부한 보고이다. 예술은 결여와 과잉의 진폭 사이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도의 균형과 평화는 에너지의 제로상태, 더 이상 예술이 필요 없는 경지가 된다. 정신분석학에서 그것은 바로 열반원칙에 들어선 단계로 죽음충동이 현실화된 차원으로 본다. ● 일찍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열의 상태야말로 예술적 긴장의 과잉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바로 이 넘침이야말로 아주 창의적인 것이라고 새롭게 개념정의를 하였다. 같은 의미에서 예술가들이 가진 히스테리나 강박증과 같은 신경질환은 오히려 천재적인 메타포의 도달에 필요조건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조영표는 이번 전시에서 '파라노이아'(paranoia) 연작을 선보인다. 파라노이아는 심리학적 용어로 '편집증'으로 번역되며, 가장 보편적인 것이 '망상'이다. 일찍이 달리는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편집증적 비평'이라는 개념으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사실, 파라노이아라는 개념은 반드시 퇴행이라는 심리학적 과정을 수반한다. 퇴행은 사회질서, 즉 상징계를 파괴할 조짐을 가진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예술가들에게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해소하여 주는 웅숭깊은 우물과 같은 것이다. ● 작가는 자주 헛것, 망상, 혹은 환각을 경험한다. 그것은 반복적이며 강박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언캐니(uncanny: 낯익은 동시에 낯섦)하다. 어쩌면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일은 아주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다. 작가의 작품이란 무의식 속 불안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된 기억은 억압되고,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 반복을 통해서 말이다. 이때 작가는 현실과 환영간의 긴장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예술은 환영을 처리하는 하수구이다. 그의 회화작품은 대상체와 상징의 연관성, 대등한 유사성, 재현된 시각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왜 이런 형상이 배치되고 조합되는가? 이제 세 개의 심리적 풍경으로부터 정교한 접근을 시작해보자. 늘 그렇듯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작가가 의도한 것 이상을 읽어낼 수밖에 없다. 작업이란 일종의 증환으로써 작가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심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해석조차 그저 하나의 창작일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13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11

풍경, 낯설음 하나 ● 어린 아이가 롤리팝 사탕을 들고 있다. 아이들이 너무 사랑하는,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만큼 둥글고 큰, 그러나 아이는 그것을 갖고 있을 뿐 먹고 싶은 표정도 아니며 먹을 의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이의 누이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입으로 손을 빨면서 어딘가를 뚜렷하게 응시하고 있다. 오로지 암사자만이 관음증의 주체인 관객을 쳐다본다. 마치 암사자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관객에게 시선을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 아이들은 다락방인 듯한 장소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유일한 비상구는 창문 없는 창 너머로 보이는 아주 가까워 보이는 바다다. 바다에서는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다. 마치 아이들은 탈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혹은 저 창 너머 세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안전하지만 불안한 다락방에 갇혀(?)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은 마치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대한 하나의 비유처럼 느껴진다. 두 어린아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구강기의 쾌락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은 언제나 어린아이의 상태를 그리워하는데, 특히 구강기의 상태 즉 어머니와 한몸처럼 일체감을 느꼈던 시기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아이는 늘 달짝지근한 사탕을 먹고 싶지만,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더 이상 사탕을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했던 것을 얻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욕망의 미끄러짐 즉 환유! 이젠 다른 것을 욕망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컬러풀한 큰 사탕을 쥐고도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따라서 사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브제 아(objet a)이다. 무지개 색깔의 사탕은 환타지 즉 베일과 같은 것이다.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 즉 헛것!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삶의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해야 하는 어떤 것!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까지는 삶이 유지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 이미지는 계속해서 헛것이라도 짚어야 유지되는 삶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15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11

풍경, 낯설음 둘 ● 소녀가 호랑이 위에 앉아 있다. 무게감 없이 아주 가볍게 안착한 듯한 느낌이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호랑이 위에 앉아있는 느낌. 그리고 무릎 위에는 애완견이 서있다. 소녀, 애완견, 호랑이, 만일 이 세 생명체가 달리 배치되어 있었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소녀가 애완견을 깔고 앉아있고, 호랑이를 무릎에 앉힌다면 어떨까? 아주 귀여운 작은 호랑이, 몸집이 큰 애완견의 조합, 어쩌면 더 기이할 것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조합 뒤의 배경 역시 해질녘 폭풍우의 조짐을 암시한다. 그것은 오후 4시의 불안과 같이 근원적인 것이며, 어쩌면 그것은 두려운 동시에 편안했던 시원의 풍경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 그런데 계속 불안을 야기 시키는 것은 소녀의 얼굴 표정이다. 소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오른 오이디푸스의 발처럼 불편하고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보호하는 소녀 역시 작가의 알터-에고(alter-ego: 분신)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것은 늘 삶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는 동시에 도덕적인 양심을 지키려는 작가의 초자아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12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1

풍경, 낯설음 셋 ● 한 어린아이는 세미 발레복을 입고 화면의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어린 사내아기는 얼룩말에 무중력 상태인양 앉아 있다. 여기에 얼룩말 역시 침대 위에 무게감 없이 안착해 있다. 커튼이 쳐진 바깥 풍경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공간은 높은 건물임에 틀림없다. 더 이상 푸른 바다가 아닌 높은 하늘에 구름이 떠있다. 아기는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아슬아슬할 만큼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더군다나 액자 속의 앵무새야말로 자연스럽지만 부자연스러운 기이한 경계선에 있는 느낌이다. 오히려 앵무새가 있어야 할 곳은 새장이지만, 액자는 충분히 새장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고 할까. ● 어쩌면 대자연의 평원에 뛰놀고 있어야 할 얼룩말이 안으로 들어온 것, 그 말은 마치 상서로움을 전하는 유니콘 처럼, 인간이 원하는 진정으로 평화로운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의 이미지들은 모두 어떤 유기적인 영향 관계 속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모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응시를 되돌려 주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과 파열은 여전히 불안의 원초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낙원 같지만 절대로 낙원일 수 없는 파괴된 낙원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11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1

꿈 작업, 은유와 환유 ● 예술가의 환상이나 망상 역시 꿈과 사한 메커니즘을 갖는다. 꿈도 환상도 모두 억압된 것, 혹은 트라우마와 같은 것으로부터 귀환하는 것이며, 예술가들의 작업이 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이 작가의 작품이 '무의식의 귀환' 혹은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때로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의 조합에 무방비 상태이고 무감각하기조차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선택한 모든 사소하고 하찮은 대상은 작가의 삶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 좀 원론적으로 접근해 보자. 프로이트는 꿈 내용을 수수께끼(그것을 풀 수 있다는 의미에서)로 묘사하면서 『꿈의 해석』에서 언어학적 분석으로 꿈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꿈 내용은 이미지 그 자체로 읽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가치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꿈은 어떤 변형(위장) 과정을 거쳐 의식계에 떠오르는데, 이것이 우리가 잠에서 깼을 때 기억하는 현시적인 꿈이다. 이처럼 잠재적 꿈이 위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계에 떠오르기에는 부적절하여 의식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검열자를 적당히 따돌리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꿈 작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이러한 꿈 작업이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의 메커니즘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압축은 하나의 꿈이 잠재적인 꿈보다 내용이 적어지는 것으로 잠재적인 것이 생략되고 압축되는 과정이다. 압축을 통해서 잠재적인 요소 중 어떤 요소들이 완전히 탈락되거나, 잠재적인 꿈 가운데 어떤 일부분만이 꿈으로 옮겨지거나, 어떤 공통점을 가진 잠재적 요소들이 꿈에서 하나로 뭉쳐져서 나타나는 것이다. 전치는 위장을 하기 위해 잠재적 꿈 사고의 요소들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니까 꿈을 꾼 당사자는 이것을 전혀 이해 못하거나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전치는 꿈을 해석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 바로 이런 꿈 작업이 가진 압축과 전치의 과정이 라캉에 오면 은유와 환유의 메커니즘으로 정교화 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전회시키며 압축을 은유, 전치를 환유로 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압축은 서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니까 유사성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은유와 같은 것이고, 전치는 연관되는 다른 어떤 것으로 자리를 바꾸어 놓는 것이니까 인접성을 원리로 하는 환유와 같다는 것이다. 라캉은 꿈과 농담, 포비아는 무의식의 반영이며, 이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로 그 구조화의 얼개를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은유와 환유인 것이다. ● 그렇다면 조영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조합은 분명, 작가도 모르는 작가에 대한 다량의 무의식적 정보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치 침묵이 무한한 발화인 것처럼...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9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0

모호한 공간: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 조영표의 작품을 보면서 내내 그는 그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라캉의 발언처럼 말이다. ● 작가가 사용하는 모티프들은 아직 의미에 닻을 내리지 못한, 즉 기의를 만나지 못한 기표들의 부유물이다. 작업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티프는 어린아이, 바다 혹은 하늘, 동물, 새, 그리고 소파와 침대 같은 기물들이다. 형식적으로 보아, 이런 대상들이 대부분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어쩌면 영원히 기표로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다. 혹은 바로 이러한 기표와 기표의 연결과 틈새에서 무의식의 작용을 찾을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작가는 항상 공간을 이중적으로 분리해낸다. 안과 밖, 실내와 실외, 집과 자연과 같이 이질적인 공간이 대치되어 드러난다. 마치 꿈 속 공간과 꿈 바깥 공간을 그리듯이 말이다. 이런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열려있다. 이 공간에서는 어린아이가 중심이 되고, 때론 동물이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 어린아이와 동물은 유사하면서도 상반되는 대상체이다. ● 어린아이와 동물은 마치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존재들, 상징계에 진입하기를 거부하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작가가 그려내는 아이들은 더이상 아기가 아닌, 상상계의 향수와 상징계의 진입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존재에 가깝다. 어쩌면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에 서있는 존재, 엄마와의 이자관계의 완벽성을 경험한 존재(상상계), 그러나 그런 엄마를 버리고 사회적 시스템(상징계) 속으로 진입해야만 하는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어쩌면 더 이상 영원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순수와 영악, 본능과 이성,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 그것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예술가의 운명에 대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자라고 싶지 않은 자아, 나르시스적인 자아, 영원히 퇴행하고 싶은 욕구를 지닌 이드적 자아, 욕구과 욕망의 구분이 없는 단계로의 회귀 등은 잃어버린 세계로서 예술가들이 꿈꾸는 것이 아닐까. ● 마찬가지로 조영표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혼재, 마치 초현실주의 데페이즈망처럼 낯선 요소들의 결합이 눈에 뜨이나 그것은 그다지 시각적 충격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훨씬 더 낯설든지, 훨씬 더 자연스럽던지 해야 할 것인데, 그저 좀 소박한 병치에 가까워 보인다. 초현실주의가 모순과 이율배반의 이미지로서의 적극적인 충돌을 통해 무의식적 메시지를 풍부하게 환기했다면, 조영표는 이보다는 좀 더 소프트하거나 안전한 방식의 표현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여기에서 작가의 작업이 지니는 수사(rhetoric)의 취약성 혹은 평면성의 한계와 더불어 모호함이 가중된다. 때로 모호함은 해석의 지평을 폭넓게 열어놓아 시적인 긴장감을 지니게도 하지만, 그의 경우 시적 효과를 전달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럴 경우 이런 모호함은 그저 한낱 가벼운 유희로 추락할 수 있을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이미지의 근원을 보다 섬세하고 세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 형상이어야 하는가, 자신의 강박 혹 망상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며 본질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조영표_파라노이아 (Paranoia) series No.7_캔버스에 유채_72×90cm_2010

레토릭으로 유혹하라! ● 조영표의 작품은 보다 더 정교한 수사학적인 의미의 덫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강화되었을 때 보다 심리학적이거나 미학적인 유혹의 매체가 될 것이다. 마치 마그리트의 작품이 한낱 회화가 아니라 형이상학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이미지의 선택에 따르는 무의식의 차원을 철저한 심미적인 논리에 입각하여 고구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은유와 환유와 같은 수사로 의미의 중층구조를 만들고, 그것이 감각과 사유의 일치에서 오는 쾌락 즉 일종의 브레인-섹스를 환기하는 차원으로 진화하여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이 우리가 살고 싶은, 살아야 할 세상에 대한 강박적 요구라고 한다면, 작가 역시도 자기 유희와 위안을 넘어서는 지점으로까지 자신을 치열하게 밀어붙이는 지적 성취와 더불어 감각적인 모험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유경희

Vol.20110603e | 조영표展 / JOYOUNGPYO / 曺永杓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