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528_토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_다원예술공간 도어
관람시간 / 01:00pm~07:00pm
다원예술공간 도어 OPEN SAPCE DOOR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7-22번지 B1 2관 Tel. 070.7590.9335 www.thedoor.co.kr
'예술은 원래 시간, 공간, 욕망을 전유專有(appropriation)하기'였다고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지적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사회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혹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작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의 영역 안에서 이 세계의 많은 테제들을 전유하고자 한다. 다소 거창하게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작업들은 그러나 사실 기본적으로 작가 자기 자신에게 천착되어 있다. 르페브르 식으로 말하면, 작가 스스로 자연이나 사회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전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즉 세상을 살아가는 '적극적인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지점에 예술의 시작점이 있다. 최근에 한국사회에서 생산되는 많은 시각예술 작품들에서 나는 '자기 고백적' 특성을 보았다. 이들은 거시담론을 언급하는 대신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성찰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이들은 사회구조가 지닌 모순이 변증법적으로 해결되고자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폭로나 언급이 아닌, 자기 자신과 자기 이외의 영역으로 규정되는 사회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수단으로 예술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고백적 작업은 출발점이 작가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서 '지적(知的) 자위행위'로 그칠 공산이 크다. 이러한 작업들이 예술에서의 유효성을 입증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가 개인의 일기로 그치지 않는 다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강제'되지 않고 '전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론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김민주의 작업은 개인사적인 정보를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작업에서 상정하고 있는 타자성이 불특정 다수가 아닌 일 대 일의 대응성을 지닌다는 점, 장소적 지시성이 배제된 심리적 공간 안에서 인물의 동선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기고백적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balance & tension」이라는 작품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과 공간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인물이 '실'이라는 매개체로 균형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장면은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마주하는 갈등과 감정, 권력의 문제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말해 김민주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자기고백적 특성은 마치 표류하는 섬 위의 유한존재로서의 한 개인, 또는 개인 대 개인의 마주함과 같은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구체적으로 당김음, 엇박자라고도 불리는 영문으로는 다소 생소한 단어가 본 전시를 명명(命名)하는 전시어(展示語)이다. syncopation은 현장성 있는 연주에서 연주자가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변주상태의 연주를 말하기도 하는데, 당김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주를 작가는 무엇에 비유하고자 했을까 유추하게 되는 것이 관람의 과정이 된다. 2~3분 분량의 러닝타임으로 이루어진 영상에는 두 명의 무용수가 등장하고 이들은 서로 조응하며 중심을 잡거나 아슬아슬한 균형 상태를 유지한다. 무용수들이 균형을 잡고 있는 공간은 현실과는 괴리된 그리드(grid) 가 입체적으로 조성된 익명의 공간이다. 3D 그래픽에 의해 만들어진 다분히 중성적인 공간은 일종의 무균질의 상태를 느끼게 한다. 이 공간들은 구체적인 지시성이 결여된 상태로 '절벽, 갇힌 공간, 바닷가의 tetrapod(방파제)' 등 '장소'적인 지시성이 배제된, '공간'적인 지시성만 남은 상태의 공간들이다. 더군다나 공간 안에서 두 무용수가 움직임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무용수와 공간의 이미지가 서로 시각적으로 충돌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격리된 공간을 심리적으로 상정하게끔 한다. 당연히도 심리적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공연은 작가의 어떤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 쓰러지지 않기 위해 긴장감을 잃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두 무용수가 있다,. 그들은 가장 예리한 긴장감, 즉 '0'이 되어 가고 있다. '0'은 양쪽에서 똑같은 힘으로 잡아당겼을 대 줄이 꼼짝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멈춰 있는 모든 것에 의해 성립된다. 정지 돼 있음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영향을 이겨내면 흔들림이 줄어들면서 계속 정지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이겨내지 못하면 흔들림이 커지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의 영향을 없애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민주)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0'의 상태, '정지 되어 있음'은 관성이 작용하고 있는 관점보다는 작용ㆍ반작용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힘의 균형 상태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물리적 관점을 넘어 인간 개인의 체험이 된다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혹은 외부조건과 상호작용하며 겪게 되는 한 개인의 갈등과 균형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일견 이것은 단순히 균형을 유지한다는 차원이 아닌 제로 값을 향해 우리의 인생이 수렴한다는 역설적인 토설과도 같다. 이 역설적인 토설은 마치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선험적인 명제를 떠올리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가야 하는, 죽음 이전에 인생의 balance와 tension을 유지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전술(전술)했듯이, 김민주의 작업이 예술적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 '강제'되지 않고 '전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론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면, 그 지점은 역시 '0'의 상태에 대한 언급이 될 것이다. 균형과 긴장이 만들어내는 가장 예리한 안정감의 상태, 이것은 또한 '힘(력)'의 상태에 가깝다. 하나의 예를 들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고 있을 때 '힘'이 느껴지는 상태는 한쪽이 줄을 놓아버린, 긴장감이 해소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팽팽하게 대립하고 긴장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생에서 힘이 유지되는 상태는 결국 적절한 균형과 긴장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여 인생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엇박자, 당김음은 때로 균형이 무너졌다 회복되는 과정과 다시 찾은 인생의 균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Syncopation(당김음)은 교과서 같은 정박자보다 재미있는 인생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김민주가 말하고자 하는 '전유'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예술의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 과연 그녀의 이야기가 사적 체험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지는, 역시 관람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 지세민
Vol.20110528a | 김민주展 / KIMMEANZOO / 金玟注 / 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