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noid Scene 파라노이드 씬

2011_0527 ▶ 2011_0616 / 일,공휴일 휴관

김남표_Instant Landscape-Airshow 2_artificial fur, 캔버스에 목탄_130.3×193.9cm_2011

초대일시 / 2011_0527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 김남표_김성수_김준_박경률 (aka. 박은영) 박미나_배준성_양만기_이지현_장승효_홍성도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파라노이드 씬 : 불온한 세상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 편집증 (paranoia, 偏執症)은 다른 말로 망상장애라고도 하며 소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망상을 보이는 병적 상태를 일컫는다. 다른 정신과적 질환보다 사회적 기능이 월등히 높아, 상대적으로 직업적 기능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경향을 보인다. 특이한 것은 환청은 나타나지 않고 주로 환각 증상이 스스로를 납득할 만큼 강력하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착각하는 방식에 나름의 논리가 존재해 버린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설득 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근거가 된다. 예로부터 대한민국은 설득이 되지 않는 사회였고, '과거의 방식 (8, 90년대 예술가들이 작업을 통해 사회적 담론을 표출했던 방식)'은 바로 이러한 '편집증 말기의 사회'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는 데만 그쳐 긍정적 효과를 보지 못한 케이스 라고 할 수 있다. 2011년의 대한민국은 좀 더 교활해졌다. 정치가는 국민의 말을 듣지 않고, 관료들은 더욱 고압적이 되었다. 집단은 조직원에게 설득되지 않으며, 언론은 이익을 쫓고, 학교는 돈을 번다. 이에 따라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가들도 좀 더 고차원화 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정부와 집단의 문제점을 직접 지적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각자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우회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훨씬 세련되고 능숙한 조형언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러한 편집증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발견한 편집증적인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성수_Loreley_캔버스에 유채_116.7×90cm_2011
김준_fragile-chunhyang on the limoge_디지털 프린트_100×140cm_2010
박경률(aka. 박은영)_사일로식 사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45cm_2011
박미나_0985555460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8×158cm_2010

『파라노이드 씬』은 과거 인터알리아에서 기획된 바 있는 다른 2회의 전시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2009년에 기획된 전시『망막의 진실』은 관람객이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 나아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내용 이었다. 이는 '눈'과 '시선'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바였는데, 눈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것의 외양적 이미지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2010년에 진행했던『결핍된 주체』는 잉여 된 욕망으로 인해 자아를 상실해만 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더불어,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안타까움에 대한 개탄(慨歎)이었다. 이번에 마련한 전시『파라노이드 씬』은 앞 선 두 가지 전시의 테마를 근간으로 하고, 나아가 작가가 주체가 되어, 다소 냉소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형국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현실에 실재하는 공간과 작가의 상상에 의해 생성된 공간, 혹은 개인의 기억에 의지하여 발생한 장면이 한 화면에 어우러지는 접점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결과물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있음직한 풍경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실재할 수 없는 모호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작품들간의 표현방식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결국 얼마나 작가 스스로가 창조해 낸 풍경에 깊숙하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근소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을 가감 없이 가져와 그대로 늘어놓는 형태일 수도 있고, 과거나 환상을 열망하는 개인사적인 공간일 수도 있고, 나아가 현실이나 실재의 공간을 비판하기 위한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결과물은 작가에 의해 탄생한 일루젼이 거부감 없이 관람객에게도 투영된다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 더불어 현실에서 기인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동시대와는 닮지 않은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같다. 결국,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현실부정에서 비롯되며, 주체들이 현실을 도피할 수 밖에 없는 근거는 분명 사회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병리학적 문제점에서 발로(發露) 하였다는 사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culpture of Museum L, sketch girl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라_162.2×130.3cm_2011
양만기_Garden of Darwi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0×140cm_2010
이지현_Mumbei+Rm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08~09
장승효_mash in! – epispde_3D photo mulasec_130×264×12cm_2010
홍성도_Tourist_플렉시글라스, 알루미늄, 사진_90×135cm_2011

예술이 여타의 감성적 활동과 다른 것은 예술작품은 온전히 정신활동의 결과이고, 현실의 특정 상황이나 일정한 법칙에 대한 인간의 자각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미지는 현실을 모방하여 대체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우리의 삶과 의식은 이미지에 의해 영향을 받고 부여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 이유로 분명 이들은 사회로부터 특정한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이들의 정신활동을 규정하였으므로, 그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결과물은 결국 이 사회의 산물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이 도출해 낸 결과물들은 '과거의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사회적 현상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지도, 거대 담론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특별한 이데올로기나 지식인의 허위에 대한 비판 등을 모두 배제한 채 다분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립적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고압적으로 지적하지도 않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그저 목격한 문제점들을 펼쳐놓고 있다. 이들은 매를 들고 회초리를 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종아리를 치며 내보이는 형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침묵하는 호통은 쩌렁하게 울린다. ● 플라톤이 예술의 본질을 모방으로 정의한 이래 전통적으로 예술의 중요한 기능은 세계의 재현이었다. 하지만, 예술의 진정한 힘은 시각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으로 확인되는 영역 너머의 실재를 보게 만드는 것에 있다. 우리가 추상회화를 보면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세계를 치밀하게 모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속의 실재를 느끼게 해 준 탓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참여작가들이 사각의 틀에 표현한 것만을 보고 느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참여 작가들은 저마다 가시적 지점 너머 실재의 지점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들이 우리에게 '불온한 세상'을 '불편한 시선'으로 응시하라는 반증적 테제(These)인 것이다.. ■ 윤상훈

Vol.20110527e | Paranoid Scene 파라노이드 씬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