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E ZOO TOY

배주展 / BAEZOO / 裴周 / painting   2011_0526 ▶ 2011_0612

배주_난장판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유채_181.8×259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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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1_0526_목요일_05:00pm

기획 / 가나 컨템포러리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 컨템포러리 GANA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배주의 회화 - 천진한 웃음 뒤에 숨은 서늘한 농담 ● 배주영과 배주, 작가는 이렇게 이름이 둘이다. 배주영은 페르소나 즉 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적 주체를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이고, 배주는 그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겨냈을 때의 자기를 호명하는 이름이다. 그림을 그릴 때도 물론 배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가면이 벗겨진 자기 내면의 욕망을, 그 욕망의 일그러진 초상을 보여주는데 적나라하고 거침이 없다. 작가는 이렇게 두 개의 이름을 빌려 인간의 존재론적인 한계를 드러내는데, 그 인식 그대로 작가의 자의식이 되고 그림의 주제가 되고 형식이 된다. ● 이를테면 이처럼 이름이 둘인 것은 작가가 공공연히 자신을 이중분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중인격을 인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이중분리와 이중인격은 인간 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이기도 하다. 야누스의 두 얼굴 이래로 물거울에서 타자를 발견한 나르시스나, 역시 거울에서 대면한 불완전한 자기 곧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아기, 그리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하이드는 숨겨진, 잠재된, 억압된 인격을 암시한다), 도플갱어가 모두 내 속에 타자가 살고 있음을 증언해주는 상징적 좌표들이다. ●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처럼 자기를 이중분리하고, 그렇게 분리된 인격의 반쪽에게 페르소나의 가면을 씌워 자기를 대리하게 하는가.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이라고 했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유기적 기계 혹은 생물학적 기계란 말이다. 그리고 제도는 개별주체가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래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개별주체와 그 욕망을 통어하려는 제도의 기획은 처음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충돌된 욕망이 억압되면서 무의식의 지층 아래로 숨어든다. 이처럼 인격의 실체는 숨긴 채 인격의 허물에 가면을 씌워 제도에 내어주고 사회 밖으로 내보낸다. ● 그래서 어쩌면 페르소나는 개별주체가 제도를 속이고 사회를 기만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심리적 장치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 사회의 통념이 요구하는 삶,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삶, 합리적이고 지각 있는 삶을 사는 페르소나의 삶 역시 알고 보면 대리하고 대역하는 삶이며, 척하는 삶이며, 좀비 혹은 허깨비의 삶일지도 모른다(흔히 인생을 연극에다 비유하질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페르소나가 대리하는 삶을 사는 동안, 나의 또 다른 그늘에선 억압이 차곡차곡 쟁여진다. 그래서 나는 억압된 욕망을 내재화한 잠재적인 시한폭탄이 된다. 상황을 과장하거나 극화한 점이 없지 않지만, 배주는 이처럼 이중분리 혹은 이중인격으로 나타난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주제화하고 있고, 두 개의 다른 이름을 빌려 그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게 함으로써 공감을 얻고 있다. ● 더불어 배주라는 이름에는 또 다른 꽤나 심각한 의미마저 탑재돼 있다. 즉 배주를 영어로 쓰면 Bae Zoo 곧 배(작가)의 동물원이 된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이 사회며 세상 그대로를 거대한 동물원이라고 본다. 제도에 의해 양육되고 길들여진 동물들이며, 그렇게 길들여지면서 점차 본성을 잃어가는 동물들이며, 그 본성을 억압된 욕망으로 전이시키는 동물들이며, 합법의 이름 아래 약육강식과 정글의 법칙을 몸에 익힌 동물들이 서로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는 살벌한 우리라고 본다. 이중분리와 이중인격도 그렇지만, 이처럼 세상을 동물원과 동일시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작가는 인간을 시니컬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고, 그 시선은 때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한바탕 피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억압된 욕망이 귀환한 그 피바람에는 가학과 피학이 혼재된 카타르시스와 함께 인간에 대한 공격에 뒤따른 어떤 씁쓸함이 묻어난다.

배주_어떤 나라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1
배주_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_캔버스에 유채_162×259cm_2011
배주_Deep, Deep, Deep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0

그 공격이 전작에선 비교적 뚜렷한 편이었고, 더욱이 그 공격의 칼날이 자기 내면의 억압된 욕망을 향하고 있어서 더 극적으로 표출된 감이 있다. 성적 욕망과 폭력 욕망이 공모하면서 상대를 페티시화하고 사물화하는 극적 상황을 연출한 것인데, 더욱이 그 상황이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귀엽고 깜찍한, 최소한 무표정하거나 무감한 레고 인형들에 의해서 대리 자행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무표정하고 무감한, 무심한 행위이기에 오히려 더 살벌하게 와 닿을 수도 있겠다 싶다. ● 근작에서는 이처럼 자기 내부를 향하던 욕망이 자기 외부로 옮아가면서 자연스레 사람과 사람, 주체와 타자, 혹은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와 같은 사회학적 층위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확인된다. 이런 와중에서도 전작과 근작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deep, deep, deep」이다. 성적 욕망을 다룬 것인데, 속된 말로 여자를 상징하는 조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남자 레고 인형을 보여준다. 플라스틱 소재의 사물화된 인격체와 조개의 유기적 속살이, 발기한 남근처럼 단단한 물체와 물컹거리는 물질이 만나면서 성적 욕망을 표상했던 전작에서의 테마를 재확인시켜준다. ● 이 그림을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작가는 개별주체와 사회가 만나지는 접점에 서 있는 주체 곧 사회적 혹은 제도적 주체를 다루는데, 작가가 소재로 한 레고인형이 그 주체를 더 효과적으로 부각하게 해준다. 말하자면 레고블록도 그렇지만 레고인형은 몇 안 되는 전형적인 포맷을 따르고 있고, 더욱이 그 생김새가 구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 구조나 형태가 제도적인 사회의 그것을 닮아있다. 실제로 레고를 소재로 한 형태 만들기 놀이를 보면 일종의 사회 구조학 내지는 사회공학을 위한 형식실험을 연상시킨다. ● 그 형식실험에서 결정적인 개념이 관계이다. 작가는 그 관계를 비교적 사사로운 측면에서, 그리고 보다 공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먼저 사적인 측면을 보면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 작가는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연인이 동시에 다른 손으로 또 다른 연인의 손을 잡고 있는 레고인형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사랑은 실재하는 것이기보다는 부재하는 것이며, 환상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실재를 보상받기 위해서 환상을 일궈내고, 그렇게 부풀려진 환상 속으로 숨는 기술일 것이며, 그렇지가 않다면 착각의 기술일 수도 있겠다. ●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 작가는 제도와 개별주체가 만나지는 보다 공적인 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한눈에도 성좌에 앉은 권력주체와 그를 알현하는 개별주체가 일종의 하이어라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여실하다. 장난감 놀이가 그렇듯 개념이 선명하게 오는 편인데, 중심성이 강한 구도와 엄격한 좌우대칭이 중심에 있는 권력주체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감이 있고, 그대로 아우라를 강조하기 위한 종교적인 이콘화의 전형적인 포맷을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상 종교를 상실한 시대에 이처럼 사회에 만연한 하이어라키가 새로운 신생종교(이를테면 물신주의)로 등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재밌는 것은 권력주체를 중심으로 각각 청군과 적군이 양쪽으로 배열해 있는데, 이데올로기가 개별주체를 호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부여해준다는(이를테면 진보 대 보수) 루이 알튀세의 전언을 떠올리게 한다.

배주_Permeate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11
배주_ Pop,Pop,Pop_캔버스에 목탄, 유채_227.3×181.8cm_2011
배주_Wild Toy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1

이렇게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에 주목한 작가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짚는다. 이를테면 「Recycling」에서 작가는 담뱃재와 함께 버려진 레고인형을 보여주는데, 그의 가슴에 재활용 마크가 선명하다. 용도 폐기돼 버려진 인간이 인간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을 재확인시켜준다. 프로이트는 거세불안(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주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거세불안에 시달린다.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리되는 지점들, 이를테면 제도와 권력, 법률과 권위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감, 지금으로선 자본의 콜을 받지 못해 부지불식간에 쪽박을 찰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인간을 사물화하는 페티시즘의 극단적인 경우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위장(Permeate)을 제안한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사실은 틀에 박힌) 삶을 요구해오는 제도적인 사회 속에서 거세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위장 말고는 방법이 없다. 척하는 삶만이 바람직한 삶이며 잘사는 삶이다. 그 삶에 진정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 인격을 사물화하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진정성은 지나치게 나약하거나 심지어 위험하기조차 한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척하면 척할수록 더 잘 사는 삶이며, 절대 진정성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위장에 몰입한 나머지 도대체 진정성이 무언지, 혹은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망각할 정도가 되면 비로소 도통한 것으로 봐도 된다. ● 그리고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은 미술사 역시 비켜가지 않는다. 「난장판」에서 잭슨 폴록의 드리핑 회화를 패러디한 것인데, 전작에서의 색면회화를 패러디한 「색면회화 싫어」와도 통한다. 공교롭게도 둘 다 가장 미국적인 회화이며, 미국 현대회화의 보증수표에 해당하는 전형이며, 미국식 모더니즘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경우들이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일련의 그림들은 흔히 패러디에 따라붙는 원작에 대한 오마주와는 거리가 멀다. 원작을 숙주 삼아 그 권위를 논평하는(이를테면 드리핑 회화의 자동기술법과 색면회화의 형식주의 논리) 일종의 비평적이고 메타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대중문화 스타인 마릴린 몬로의 초상을 패러디한 「pop, pop, pop」에서 작가는 몬로의 초상을 찢고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레고인형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팝의 이름으로 너무 많이 차용되고 있는 이미지, 그래서 전형으로 굳어진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로 볼 수도 있겠다. 더불어 종이를 찢고 나올 때 나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제목도 재미있다. 팝적인 방법으로 팝의 전형적인 아이콘을 차용하면서 비트는 재치가 느껴진다. ● 이 일련의 의미기능들을 레고인형이 수행한다. 레고인형은 말하자면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서,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어던진 작가의(그리고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욕망을 대리하고, 물신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왜곡된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그 인형들에는 표정이 없다. 하나같이 웃음으로 결정화된 표정이, 기계적인 표정이, 한결같으므로 표정으로 부를 수조차 없는 표정이, 그래서 사실은 무표정이 있을 뿐. 베르그송은 웃음의 존재이유를 사회조절기능에서 찾는다. 즉 웃음은 서로 서먹하고 어색한 관계를 부드럽게 조절해준다. 말이 조절이지, 그 말을 뒤집어보면 가식이라는 말이다. 이 가식적 장치가 아니라면 사회는 결코 융화되지가 않는다. 어쩌면 페르소나는 웃도록 운명 지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레고인형들은 슬플 때도 웃고, 심지어는 분노할 때마저 웃음을 보여줘야 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대리하고 있고, 그 웃음 뒤에 숨은 우리 모두의 이중분열과 이중인격에 직면케 한다. ■ 고충환

Vol.20110526g | 배주展 / BAEZOO / 裴周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