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52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5: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작업 초기부터 자화상에 천착해온 김혜진은 첫 개인전에서 마스크를 중심으로 자신을 세상에 내보인다. 실재감을 가진 초상이 아니라, 마스크를 매개로 하는 것은 드러냄 속의 감춤을 내포한다. 물론 감춤은 또 다른 드러냄이기도 하다. 전시부제인 'I am...'은 주어만이 확실한, 그래서 주어 또한 불확실해지는 상황 속에서 나를 드러낸다는 간단치 않은 기획을 여러 차원에서 진행한다.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지 마자 관객이 처음 마주치는 것은 공중에 붕 띄워진 빛나는 마스크이다. 15가지의 다양한 색과 크기를 가진 크리스털로 앞뒤의 표면이 뒤덮여 있다. 그것은 본인의 얼굴이면서 가면이다. 이러한 일치는 축복일까, 재앙일까. 이 작품의 모델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찍혀진 사진이다. 마스크는 자연인 김혜진의 얼굴을 닮았지만, 고대 파라오의 무덤 등에서 발굴된 의례용 마스크처럼 영원을 향해 고착된 모습이다. 그것은 동시에 앤디 워홀의 작품같이 반짝거리면서도 은폐적인 현대의 초상들을 떠오르게 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가면은 삶의 정점에서 죽음을 응시하는데, 이러한 초상과의 차이점은, 그녀가 가면 안쪽도 주시한다는 점이다. ● 가면 안쪽 역시 크리스털로 뒤덮여 있지만, 둥근 동공에 피부 아래 조직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은 추상적 패턴이다. 마스크는 얼굴의 일부를 뜯어낸 듯하고,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마스크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 가를 묻는다. 2008년에 제작된 또 다른 시리즈는 단색(은빛)으로 만들어진 마스크 5개를 벽에 줄지어 배열하기도 했다. 마스크가 여럿 등장하는 작품은 복사의 느낌을 배가시킨다. 금속성 물질로 뒤덮인 마스크는 무겁고 단단하지만, 표면, 또는 중층의 표면들로 이루어진 그것은 쉽게 벗겨지며 깨지는 존재이다. 색색의 눈알들 앞에 깨진 마스크가 놓인 2008년의 작품은 얼굴이라는 표상을 구축하는 것도, 해체하는 것도 타자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검은 인형 위에 색색의 마스크가 줄지어 설치 된 2008년의 작품은 개인의 실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는 듯하다. 다양한 크기와 색깔로 이루어진 전구들을 투명실로 매달은 작품은 그것들이 깨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원자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얼굴의 가변성을 강조한다. 허공 속에 떠 있는 원자들 같은 작품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것은 얼굴, 또는 마스크라는 형상인지도 불확실하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인지, 흘러내리는 눈물인지, 투하되는 폭탄인지그것이 어떤 은유를 통해 어떤 표정으로 읽히는지는 타자의 시선에 달려 있다.
자신의 몸에서 직접 떠낸 등신대의 동체와 마스크가 조합된 작품 뒤에는 그림자 대신에 작가가 서있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거친 재료로 떠낸 자국이 분명한 동체는 희미한 유령처럼 보이며, 그 물체의 껍데기로부터 유출된 빛의 입자들은 그림자 자리에서 고해상도의 이미지로 자신의 실재성을 뽐내고 있다. 전시에 등장하는 글자들은 실재와 이미지의 역학 관계에 상징적 차원을 덧붙인다. 자신의 이니셜이 등장하는 평면 작품은 실재가 더욱 불분명해진 상태에서 가치 관계를 따진다. 이니셜 앞에 그려진 다이아몬드는 비록 탈색된 상태지만 이니셜 앞에 군림한다. 그것은 모든 작가가 꿈꿀만한, 자신의 작품에 새겨놓은 부재기표인 것이다. 해골바가지에 실제 보석을 뒤덮은 데미안 허스트처럼, 작가의 이름 자체가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미술계라는 게임장에서 엄청난 성공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LED로 설치한 작품은 이제 막 미술계에 진입한 신진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김혜진은 바닥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글을 300-400자 정도 설치했는데, 이름을 포함한 글자들은 마스크라는 이미지의 상징적 변주이다. ● 가면은 놀이와 축제, 의례라는 인간 사회의 장에 뛰어들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 특히 여성이 맨 얼굴로 나서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 외과적, 또는 화장술을 통한 치장은 다시금 집단적 의례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검게 칠한 눈썹으로 영원을 응시하는 파라오의 가면이 품어내는 위용은 종교적인 것이다. 도미니크 파케는 [화장술의 역사]에서 인간에게 화장술을 전달한 천사 아자젤은 신을 거역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라고 말한다. 중세시대에 몸치장은 육신의 유혹을 상징하게 되었으나, 불경스러운 근대의 시대에 반(反)자연은 다시 복구되었고, 모더니즘의 대변자 보들레르는 [화장예찬](1863)에서 아름다움의 이상을 자연에서 인위적 기교로 옮겨 놓았다. 인위적 기교는 자연을 초월할 수 있으며, 이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혜진의 작품에서 화장을 한 여인의 마스크는 마치 우상처럼 보인다. 얼굴을 그대로 떠낸 듯한 마스크는 그 뒤의 실체 역시 마스크라는 것, 역으로 허위 역시 진실의 계기 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종의 기호로 나타나는데, 이 '기호는 또 다른 기호로 향하지 않고는 결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잘려진 조각'(롤랑 바르트)이다.
손바닥만한 규모지만, 실체가 적시되기 위한 여정은 끝이 없다. 김혜진의 작품은 이 끝없는 과정에 어지러움을 개입시킨다. 마스크 표면을 뒤덮은 입자들은 마치 미러볼처럼 주변의 빛과 반응한다. 인류학자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가면을 어지러움과 연결시킨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놀이는 허구적인 하나의 닫혀진 세계를 일시적으로나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환상(illusion)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놀이는 그 자신이 가공의 인물이 되어 그것에 어울리게 행동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나를 연기하면서 내가 된다. 놀이하는 자가 자신의 인격을 일시적으로 잊고 바꾸며 버리고서는 다른 인격을 가장하는데, 이러한 표현을 행하는 놀이(Mimicry)에서 가면은 필수적이다. 미미크리에서는 자신을 다른 존재라고 상상하며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변신의 도구인 가면은 본래의 인격과 연기하는 역할 사이에 이중화(분열)이 있다. 분열을 조장하고 더 나아가 분열을 고착시키는 현대사회의 환경 속에서 가면은 실재와 분리될 수 없게 된다. 옥타비오 파스가'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가면, 또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 우리의 얼굴과 분리될 수 없다'고 했듯이 말이다. ● 모조 보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김혜진의 가면은 원본이 불확실해진 시대의 도상으로 다가온다. 얼굴 표면을 얇게 저며낸 실체 없는 대상을 뒤덮는 모조물들은 가상성을 강조하면서, 플라톤 이래로 철학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동일자의 모델을 부정한다. 표면의 투명한 점들이 발산하는 빛은 한 개인의 뗄 수 없는 표식인 얼굴을 탈 중심화 한다. 심연이 내재된 이 표면은 특히 여성의 마스크와 잘 어울린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플라톤을 거부하고 니이체를 따르면서, 본질의 세계와 외관의 세계라는 이분법의 폐지하고자 한다. 자연적 얼굴이 아닌 화장한 얼굴의 사진 이미지로부터 출발한 김혜진의 가면은 복사물의 복사물, 즉 시뮬라크르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표상이 아니라 환각으로 제시된다. 허공에 붕 떠 있으며, 그나마 고정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스크는 시뮬라크르가 야기하는 어지럼증과 관련된다. 김혜진의 작품에서 마스크를 이루는 또 다른 입자는 전구들인데, 전구들은 그 안팎으로 허공을 품으면서 가상성을 더해 준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결국 빈 구멍들로 가득 찬 유한한 조합이며, 그 어떤 것에든 모든 것들이 태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무(無)로부터도 무엇인가가 태어날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동일성도 모순도 없다. 단지 유사성과 차이, 구성과 해체, 공존과 와해, 이것이 사물들의 본성인 것이다. 들뢰즈가 지지하는 세계에서 자연 역시 총체화가 불가능한 합으로서 나타난다. 자연의 모든 요소들을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조합은 없으며, 유일한 세계나 총체적인 우주도 없다. 자연은 '이다'가 아닌, '그리고'를 통해 드러난다. 이 우주는 우발적이며 기계론적이다. 그려진 것 위에 또 그려진 원시의 동굴벽화 이래로, 이미지의 역사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잠재성은 현대의 팝아트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김혜진의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마스크와 앤디 워홀과의 미학적 유사성을 강조한다. 신문이나 잡지의 이미지로부터 발췌되는 팝아트의 도상들은 언제나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완벽한 미인, 완벽한 전기의자, 완벽한 자동차 사고 사진 등이 등장하는 앤디 워홀의 화려한 작품에는 토마스 크로 등 많은 미술사가들이 지적하듯이, 일상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 김혜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현실과 이미지를 넘어서 상징의 단계에서 작동된다. 그것은 충동과 상상보다는 확정적이지만, 지시대상과의 거리를 더욱 벌리고 있는 단어는 자기지시적인 측면에서만 확실할 뿐이다. 언어 역시 분열을 전제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새로운 영혼의 병]에서 언어의 영역인 상징계(symbolique)를 '대화자의 논리적 및 규범적 규칙에 따른 담화'라고 부른다. 상징계는 육체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투입과 투사로서의 동일화가 일어나는 상상계(imaginaire)와는 구별된다. 가면이 자아에 관한 이미지들의 만화경으로 상상계에 속한다면, 말은 규범적 범주들과 그것들의 조합 영역에 속해 있다. LED로 만들어진 작가의 이름은 주체를 구조화하고 보다 분명한 형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상징계를 이루는 구성적 언어는 정동(affect)이 승화할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한다. 언어의 회로를 거치면서 충동은 변형되지만, 충동적 의미의 지표들은 언어를 꿰뚫을 수도 있다. 무의식과 욕망은 언어적 재현으로부터 배제되지만, 정신은 또한 그것들에 꾸준히 이끌리는 것이다. 김혜진의 작품에서 언어로 나타나는 분명한 자기 동일화의 형식은 주체가 기호와 창조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장한다. ● 자신의 상상 세계로 관객을 이끌기 위한 전시실의 입구에 설치된 이름과 문장들은 작가의 개인화의 드라마가 행해지고 있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자리를 보여준다. 저녁 무렵 켜지는 상가의 불빛 같은 이름과 스쳐지나가는 관객의 발치 아래 놓일 문장들은 명명 행위에 내포된 분명함과 달리, '명명할 수 없는 것의 한계'(크리스테바) 또한 펼쳐 보인다. 명명은 의미의 공백을 결코 메우지 못한다. 그러나 언어는 현실 및 상상과 상호작용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다른 의미가 바로 예술적 승화이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승화를, 잠재적이고 함축적인 비존재를 대신하는 숭고한 의미작용이며, 바로 이것이 덧없음을 대체하는 기교라고 지적한다. 아름다움은 그것과 동체이다. 미는 집요한 우울증을 베일로 가리는 여성들의 장신구처럼, 상실의 감탄스런 얼굴모습처럼 나타나고, 상실을 변형시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크리스테바가 인용하듯이, '슬픔은 정신 상태이고, 그 속에서 감정은 신비스런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텅 빈 세상에 씌여진 가면처럼 새로운 삶을 부여한다.'(발터 벤야민) ■ 이선영
Vol.20110525g | 김혜진展 / KIMHYEJIN / 金惠珍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