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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1부 / 2011_0518 ▶ 2011_0605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수가화랑 SUKA ART SPACE 부산시 동래구 온천1동 204-22번지 Tel. +82.51.552.4402 www.suka.co.kr
2부 / 2011_0617 ▶ 2011_0627 관람시간 / 09:30am~06:00pm
갤러리 피치 GALERIE PICI 서울 강남구 청담동 122-22번지 B1 Tel. +82.2.547.9569 www.galeriepici.com
즉자 언어의 조형성 ● 화면은 해독할 수 없는 기호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암호문 같다. 접근 할 수 있는 단서도 별로 없다. 언뜻 보자면 그것은 글쓰기와 그리기가 혼재된 풍경으로 보인다.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는 커다란 사물 이미지와 치밀하게 쓰여진 빼곡한 기호들의 화면은 시각적으로 작가의 신체리듬과 노동의 흔적이 감지되지만 감각적으로는 의외로 정적이다. 그렇더라도 이 기호의 풍경은 분명 의미상으로 다층적이다. 예컨대 글쓰기의 문자와 그리기의 이미지는 진화를 멈춘듯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생성의 기원으로 퇴행한 듯 보이다가도 2진법과 이미지 시대의 영향으로 이모티콘처럼 진화된 기호들의 풍경은 구조와 행위의 이분법을 경험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양하는 역설적인 방법론 모색이라는 야심찬 지적 모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흡사 소통의 부재를 야기하려는 화면, 단절 자체를 지향하는듯한 분절의 화면,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변형 혹은 동일한 흔적만으로 가득 채워진 화면, 마침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될 것 같은 화면이다. 서양의 미학적 관점으로 보자면, 로제 보르디에(Roger Bordier)가 언급하듯이 글쓰기와 그리기는 별개의 것이지만 이건희에게 있어 문자와 이미지는 그 생성의 기원이 같다. 그가 주로 다루는 한지 역시 역사적으로 글쓰기와 그리기의 최적의 매체였음 또한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이건희 식 역설이 개입한다.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교묘하고 전복적인 성찰은 문자들로 하여금 이미지들의 영역을 구조적으로 재건하도록 부추기면서도, 동일한 시각 하에서 이미지 영역을 파괴하도록 이끌어 간다. 어쩌면 작가는 오늘날의 미술이 소통이라는 미명아래 행해지는 과잉의 글쓰기와 그리기를 이율배반적으로 부각시키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동양회화의 동일한 영역, 즉 시∙서∙화를 전략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술의 급격한 변화와 잡종화의 흐름 속에서도 이건희는 동양적 가치와 질료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한지의 물성과 조형성에 천착하면서 일관된 작업성과를 풀어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한지작품의 경우 전통예술 특유의 구조와 형태에 의해 지속되는 보전의 힘과 시대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전복의 힘이 서로 밀고 당기는 길항작용이 항상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기에 작품의 해석에 있어 그 진폭이 그리 넓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꼭 한지의 전통성이나 물성만을 고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지작업에 천착하지만 의외로 그 보폭은 만만치 않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듯 중층으로 배접된 한지에 콜라주라기보다는 상감 하듯 삼투되어 있는 가느다란 색지의 드로잉은 간결하면서도 조형성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더불어 소통이 불가한 불완전한 문자가 쓰여진/그려진 동일한 규격의 배접지 뒷면에 조명을 투과하는 100개의 설치작품도 펼쳐 보이고 있다. 한지의 물성과 드로잉이 혼용된 작품들은 기존 작품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명을 이용한 작품은 새로운 해석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쓰기와 한지, 빛의 변주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단지 한지라는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조형어법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의미론적으로 그것은 매체와 해석에 대한 개방성이다. 개방성은 교통의 근간이 되지만 반면 사회적 약속은 허약해진다. 약속은 닫혀있다는 함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소통은 지속되지 못하며 그의 문자들은 규칙적 구성은 깨고 증식과 분열내지는 탈각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더불어 한지가 갖는 빛의 투과성은 문자들을 반사, 추가, 삭제하면서 동시에 움직임을 환기 시킨다. 다시 말해 이건희에게 있어 소통의 언어는 더 이상 변이될 수 없는 고착된 꼴의 궁극적 종착지가 아니라 어떤 형상으로도 메타포 할 수 있는 문자의 시원이자 이미지의 물질이 된다.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색이 빛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건희의 문자는 빛과의 조우를 통해 소통의 또 다른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다. 문자와 이미지가 소통을 위한 물질적 요소라면 그건 동시에 '즉자 언어(卽自 言語)'이기도 하다. 이건희의 문자는 자율성과 그 미학을 통해 독자적으로 조형적 '글쓰기(에크리튀르, criture)'를 추구한다. 결국 그의 문자는 오기(誤記)이거나 기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놀이의 성격을 가지면서 속박이나 약속을 부과하지 않는 절묘한 어떤 결합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이건희가 작품에 임하는 태도는 아주 진지하다. 그 진지함이 그를 한 곳에 머물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그런 시도 속에서 작품과 관객의 소통이라는 의미층을 자문하고 체험한 결과물이 문자와 이미지의 결합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소통은 강제되거나 억지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흔적이나 의미를 통해 혹은 기지 문자의 표피적 의미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감상자의 몫이다. 설사 완전한 텍스트가 화면에 존재한다 한들 작가와 독자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혹자는 작가는 죽었으며 독해는 독자의 영역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추론에서 이건희의 작품은 소통의 주관적 인식방식과 객관적 인식방식 사이의 대립, 감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분석방식의 배치(排置), 더 나아가 전통적이라는 특수한 가치와 전지구적이라는 보편적 가치와의 구분을 재론하고 새롭게 재정립하려는 일련의 방법론적인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전시장 이곳 저곳에 산재하는 문자와 이미지들은 이건희가 자기성찰과 자기규정을 통해 얻어진 조형적 복화술임을 발견하는 것도 이번 전시의 묘미이다. ■ 유근오
Vol.20110520i | 이건희展 / LEEGUNHEE / 李建羲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