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519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개인적 체험 :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나, 친구들끼리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무작정 모여서 빈둥대고 있었다. K가 말했다. "심심한데 그냥 이러지 말고 우리 뭣 좀 하면서 놀자." 그러자 H가 대꾸했다. "우리 지금 놀고 있지, 공부하냐." 모두 까르르 웃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던 K가 한 마디 더 했다. "야, 일요일 다 지나갈라, 지금 몇 시인지 아니?" 내가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서는 거들었다. "응, 난 몇 신지 알고 있다." (모두 한 번 더 까르르)
지금 와서 생각하는데, 우리들의 그 시시한 농담은 한 단어나 문장이 가지는 여러 개의 뜻이 엇갈리며 우스꽝스러운 언로(code)가 발생하는 사례였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대화는 함축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마련이고,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압축된 말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조건 아래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언어학에서 화용론(pragmatics)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특정한 관계로 묶였을 때 텍스트의 맥락이 변하면서 흥미로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분석한다. 조각가 황지선의 작업도 이와 같은 언어학의 개념처럼 지적인 알레고리 위에서 형태를 갖추어간다. 그녀가 벌이는 창작의 실마리는 놀이-play-다. 놀이는 오락이나 유희를 의미하기도 하고, 게임이나 시합이라는 뜻도 품고 있다. 또 이것은 휴식이나 실업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도박과 모험, 일탈 행위나 성적인 무절제를 완곡히 표현하기도 한다. 놀이는 음악 연주나 연극 공연, 굿처럼 무대 위에서 한바탕 벌이는 퍼포먼스를 가리키기도 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품에는 이와 같은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그녀는 과거의 개인적 체험으로서 놀이를 관객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불러들여 놓았다.
사실, 놀이라는 행동은 예술 행위와 매우 닮았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역할을 반사적으로 흉내낸다. 어른들처럼 무작정 야구공을 던진다. 하지만 애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점점 나이를 먹고 자랄수록 아이들은 비로소 적절하고 일관된 행위를 습득한다. 야구공을 왜 던지고 받는지, 던진 공을 왜 방망이로 치고 달리는지, 포수는 왜 항상 앉아있고, 외야수들은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있는지 알게 되는 단계가 온다. 단순한 숨바꼭질부터 복잡한 체스나 야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놀이는 관계와 역할을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예술 작품을 완성하거나 그것을 감상하는 능력 또한 단순한 인지 능력을 넘어선 포괄적인 이해에서 출발한다.
황지선은 이와 같은 예술의 의미화 과정을 놀이라는 은유를 통해 드러낸다. 이는 더없이 자기반영적인 태도다. 그녀의 작품 소재가 되는 것들은 대부분 단순하지만 일정한 게임의 규칙을 배워야만 할 수 있는 게임이다. 거대한 주사위에서 쏟아지는 사과는 우연과 필연을 가로질러 돌이킬 수 없는 인과관계의 비가역성을 표현한다. 사과는 예컨대 성경에 기술된 에덴동산의 선악과, 혹은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의 황금사과처럼 욕망의 매개체일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인상주의 미술 시기에 세잔이나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완전할 수 없는 생명의 비유로 읽히기도 한다. 아니면 사과는 비틀즈의 음반회사 로고나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의 상표처럼, 반으로 쪼개어지거나 한 입 베어 물린 손상된 현대적 자아의 반영일 수도 있다. 커다란 여행 가방 속에 팔방으로 달려있는 검은 거울(즉, 보이지 않는 거울)은 우리를 비추기보다 빨려 들어가게끔 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환상 소설의 동기로 곧잘 제공되는 옷장 속에 숨는 놀이로 해석된다.
이는 하나같이 작가의 과거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대상들은 하얗게 탈색되거나 붉게 녹슬음으로 인하여 현실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현실성 있게 재현하는 모순적인 상호보완성 속에서 끝없이 순환한다. 모든 놀이는, 게임은, 시합은, 도박은, 그리고 예술은 여기 현실의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자체로서 지극히 현실적인 면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서 우리는 한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현실로의 몰입과 현실에서부터의 도피라는 상반된 태도를 함께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걱정. 황지선의 힘으로 가득 찬 미술을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이 글만 읽은 독자들에 대한 나의 소심한 걱정이다. 그녀의 작가적 태도가 현실과 비현실성, 작업 정신과 유희 본능 사이에서 재귀적으로 순환한다는 내 논지를 잘못 읽으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유유자적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일단 『PLAY』라는 전시 제목으로부터 진지함이 결여된 행위로 비칠까봐 우려된다. -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손이 가는대로, 하다보니까 작품 하나가 탄생하더라 - 이것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예술가의 모습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서 천재성과 직접 이어진다. 살리에리(A. Salieri)가 그토록 시기했던 것도 창작과 장난이 구분 안 되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이었지 않나. 나의 괜한 걱정이 무색하게, 어느 경지에 올라선 이 작가는 게임을 지배하는 원숙한 선수처럼, 덩치 큰 조각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자신의 상상력을 작품으로 빚어낸다. ■ 윤규홍
Vol.20110519k | 황지선展 / JISEONHWANG / 黃智鮮 / sculpture.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