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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520_금요일_07:00pm
오프닝 퍼포먼스 / 2011_0519_목요일_07:00pm 클로징 파티 / 2011_0606_월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통의동 보안여관 서울 종로구 통의동 2-1번지 Tel. +82.2.720.8409 cafe.naver.com/boaninn
이번 보안여관에서의 전시 『유연한 벽』은 2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의 형태로부터 출발했다. 이수진은 2층 창문을 통해 벽과 바닥에 드리워진 햇살을 보면서 이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보안여관은 오래된 상업건물의 기존 파티션들을 허물고 난 기둥과 벗겨진 이 벽면들로 남아있다. 이 오래되고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지닌 전형적인 6, 70년대 건물의 빈 공간을 흰색 밴딩라인으로 덮어나가는 작업은 흡사 상처의 도포(塗布) 혹은 시신의 염습(殮襲)을 상기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작가는 설치의 전 과정을 직접 진행하는 과정에서 거의 한달 간 이 벽들을 세우고 다시 허무는 일을 반복해왔다. 전시 기간 중에도 이 작업은 계속 이루어진다. 수행적 (performative) 구축과 해체가 삶과 죽음의 순환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지속되는 이 프로젝트는 작가와 건물, 그리고 빛과 그것에 대한 기억이 빚어내는 상호작용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이수진의 「유연한 벽」은 2010년에 청계창작스튜디오에서 보여준 『Tied Up』전의 도시풍경(「Blind City-Beyond the Landscape」)을 테마로 한 개념적 설치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과 신체성이 강조된 퍼포먼스로 구현되고 있다. 『Tied Up』에서 공간을 가로지르는 밴딩라인의 면적 구성이 무대공간으로서의 극적 성격(theatricality)을 띠고 있다면 『유연한 벽』에서는 장소성 못지않게 시간의 현전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Tied Up』에서 버려진 날카로운 유리들을 세워서 만든 도시(「Glass Landscape」)의 공제선이나 배경의 흰 면을 도시의 사무실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블라인드'로 설정하는 것은 스케일과 무관하게 대상을 구체적 참조로 파악하도록 한다. 이에 비하면, 「유연한 벽」의 면들은 분명히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면들로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벽'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그것을 벽이라고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 망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Tied Up』에서 무대의 조명에서 보듯 고정되어 있었던 빛의 연출 또한 『유연한 벽』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깥의 일기(日氣)에 그대로 좌우될 만큼 민감하게 노출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정반대의 프로젝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공간을 묶는다는 개념이나 반투명의 면에 의한 공간의 중첩은 부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작업들에서 장소는 결정적인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수진의 작업은 공간의 분할과 연결이라는 두 가지 형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간은 분할을 통해 의미를 구축한다. 분할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 바깥 즉, 아무런 내부를 갖지 않는 장소로 남아 있는 반면, 분할은 안과 밖을 만들고 이쪽과 저쪽의 의미론을 생성한다. 분할은 흡사 배아(胚芽)가 그러하듯이 삶의 형식이기도 하고 동시에 복잡성(complexity)이 출발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공간의 분할은 가장 기본적인 창조의 형식이다. 그와 반대로, 공간의 연결은 각각의 분절(segments)들에 질서를 부여한다. 연결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고 화음(和音)이 형성되며, 빛과 그림자가 겹쳐지고, 시공간의 운동이 시작된다. 이를 위해 이수진이 만들어내는 것은 일종의 '벽'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벽을 쌓은 것은 공간을 막기 위해서이다. 벽이 생김으로써 세계는 보거나 다가갈 수 없는 부분들을 갖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것은 구조에 면을 부여한다. 벽은 일정한 크기의 판이면서 넓이로 이루어진 일차원적 공간이다. 이로부터 두 가지 가능성이 비롯되는데, 하나는 공간을 절단하고 그것에 이원론적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면의 생성을 통해 그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잠재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벽 위에는 그림이 그려지거나 균열이 일어날 수도 있고, 정치적 구호와 화려한 장식이 새겨질 수도 있으며, 더욱 공고하게 강화되거나 허물어내릴 수도 있다. 벽은 건축이 구사하는 언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단순한 면이지만 모든 구조에 바탕을 제공한다.
이수진은 산업용 포장재인 폴리프로필렌(PP) 밴딩라인을 사용하여 벽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사용한 밴딩라인은 반투명한 소재로 빛의 투과를 일정량 허용하고 있다. 밴딩라인을 양쪽의 지지대에 잡아당겨 고정하는 방식으로 쌓아올림으로써 많은 수평선들로 이루어진 얇은 면이 만들어진다. 흐릿하게 반복적으로 그어진 연필선들의 배열처럼 보이는 이 면은 빛의 각도와 강도에 따라 불투명한 백색의 벽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아련한 그림자처럼 투명해 보이기도 한다. 수평으로 당겨진 밴드들의 틈으로 투과된 빛은 앞이나 뒤의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이러한 시각적 중첩을 통해 공간은 서로 다른 각도로 교차하는 수많은 레이어들이 끊임없이 교직(交織)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수진이 만드는 벽과 다른 벽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중력에서 비롯된다. 이수진의 벽은 수평으로 이어지는 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건물 전체를 묶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균형은 벽을 잡아당기는 힘으로부터 주어지며, 이 힘은 잠재적으로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는 장력을 암시한다. 원래의 건물이 중력을 견디고 있는 벽채와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밴딩라인의 면들은 이 중력을 빠르게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의 장력과 빛의 흐름으로 바꾸어 놓는다. 건물 안을 거니는 관객의 신체를 둘러싸고 무거운 건물의 형해(形骸)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구조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야말로 이 낡은 공간에서 이수진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의 요체일 것이다.
신체를 둘러싸는 공간에 대한 감각이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한 것은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다. 인류학자이자 비교문화학자인 그는 1966년에 출간된 『감춰진 차원 Hidden Dimension』에서 공간을 '고정형 공간 Fixed-Feature Space', '준-고정형 공간 Semi Fixed-Feature Space' 그리고 '비정형 공간 Informal Space'으로 나누면서, 신체를 둘러싼 공간이 집이나 가구, 움직이는 사물들, 그리고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등과 각각 공유하게 되는 공간에 따라 구분이 이루어진다고 설파했다. 무엇보다 그는 '개인적 공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에 의해서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인 실험과 설문을 통한 측정을 시도하였는데 후에 이러한 연구를 '근접학 Proxemics'으로 발전시켰다. 홀에 따르면, 개인이 경험하는 공간의 유형들-친밀성, 개별성, 사회성, 공공성의 공간들-은 비교적 명료한 크기를 지닌다. 이러한 거리에는 사회적 지위, 성, 개인적 선호도 같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개입하기도 한다. 예컨대, 친밀성의 공간은 문화나 친교의 정도에 따라 15~45cm 정도의 거리에 걸쳐 있다. 반면, 공공성의 공간은 3.7~7.6m 정도에 걸쳐있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나타난다. 이 범위를 넘어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것은 모두 불편함을 야기하는데, 공격적인 참견이나 무관심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Hidden Dimension』, Hall, Edward T., Anchor Books, 1966에서 인용)
이수진의 건축적 공간은 약 1~2m 폭의 회랑(corridor)들로 이어져 있다. 이는 보안여관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구조에 평행하게 중첩되어 있는 또 하나의 건물 즉, '또 다른 보안여관'이 지니고 있는 구조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을 보안여관의 '유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과거의 어느 시점에 그 공간을 경험했던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진의 공간에서 소멸해버린 기억에 대한 살아있는 참조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Alejandro Amenabar) 감독의 『The Others』에서처럼.) 홀의 스케일에 따르면, 이 회랑들은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 46~120cm)'에 속한다. 즉 '벽'이 허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혼자 점유하는 심리적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수진의 연출은 관객들의 고립, 낙오, 방황을 전제로 한다. 보안여관에서 관객은 건물의 유령과 혼자 마주친다. 그것이 반드시 끔찍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중첩되어 있고 반투명하거나, 점점 어두워지다가 다시 밝아진다. 가는 선의 결들로 인해 섬세한 그림자들이 공기와 빛의 감촉을 환기시키는 것 역시 악몽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는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다양한 방들과 그 장소들을 엇비껴 덧 입혀진 통로들을 따라 걸어가면서 가려지고 드러나는 장소의 세부들을 관찰할 뿐이다.
건축적 공간은 행동-심리적, 문화적, 사회-도구적 준거들의 복합적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한국의 가옥구조는 가깝게 붙어있는 비교적 작은 방들, 얇고 탈착이 가능한 벽채, 전체의 공간을 연결하는 복도 등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반면 서구의 가옥들은 좀 더 독립적인 분할을 추구하는 벽채와 문짝들로 이루어져 있다. 17~18세기경부터 유럽의 가옥들은 거실과 현관을 구분하고 침실과 식당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사적 공간에 대한 개념이 일반적인 건축형태로 자리 잡는 데는 20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공간의 분할은 개인이라는 관념의 위상에 의거하여 발전되어 왔다. (『사생활의 역사 4』, 필립 아리에스, 조르쥬 뒤비 등, ‘거주방식’, 새물결, 1996, 445~466쪽에서 인용)오늘날 공간은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행동-심리적 존재방식에서 좀 더 진전된 조건들을 반영한다. 그것은 사유의 형태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근대건축에서 공간과 그것의 외관은 실용적 필요에 의한 형태를 넘어서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이레, 2006, 108쪽에서 인용)즉 공간은 말을 하며 다가올 뿐 아니라 스스로 그것의 성격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공간과 관계를 맺는 것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는 1933년에 사유의 형식을 그대로 공간에 전이시킨 『Merzbau』를 만들었다. 공간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호주관적인 변용(affect)을 구축한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의 현대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공간을 연극의 무대로, 혹은 영화처럼 연속적인 장면들의 시퀀스로, 혹은 우리의 피부와 맞닿아 있는 신체의 연장(extension of body)으로, 혹은 심리적 에너지의 장(場)으로, 혹은 권력의 크기(volume)로 각각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공간을 다룬다는 것은 이 모든 다양한 항들로부터 특정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수진의 「유연한 벽」은 생각의 내부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관념의 분절들을 떠올린다. 어떤 것들은 좀 더 분명한 윤곽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것들은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선들은 구체적 공간 위에 덧입혀짐으로써 그것을 가리지만, 동시에 가려진 공간을 전혀 다른 대상으로서 드러낸다. 『Tied Up』에서 작가가 언급한 'blindness'란 바로 이 가림을 함축한다. '보안여관'은 이 벽들을 통해 두 개의 정체성이 중첩되는 장소로 제시되었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발견한 장소이다. 이수진의 작업은 모든 장소에 이 이원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유진상
Vol.20110519c | 이수진展 / LEESUJIN / 李琇珍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