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atbox

윱오버툼展 / Joep Overtoom / painting   2011_0518 ▶2011_0524

윱오버툼_Weeken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3×130cm_2011

초대일시 / 2011_0518_수요일_05:00pm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02:00pm~06:00pm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윱 오버툼의 회화세계 ● 윱 오버툼(Joep Overtoom)은 네덜란드 출신이며 런던과 로테르담을 기반으로 활약하는 신예 페인팅 작가이다. 그는 극도로 자기만의 형식과 자기 언어를 개진시키려는 일차적인 임무를 중대시하기에 아방가르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윱의 회화에서는 자기 형식 발현의 근본적 성향이 제도에 대한 전략으로 변모해가는 여타 영미권 미술의 상궤와는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윱 역시 골드스미스 미술대학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기존 예술관념과 형식을 배제시키면서 동어반복을 회피하고 새로운 회화 언어(novel painting language)를 추구한다는 입장을 지킨다. 다만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윱은 내재적으로 급진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에 대한 낭만적 믿음을 견지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낭만주의적 성향을 견지한다는 근거는 세계의 인과성, 역사 발전의 목적성, 대자연에 대한 믿음, 총체성 등 현대 서양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항목들에 대해서도, 윱은 흔들리기는커녕 조화와 이성을 지키는 태도에 있다. 이는 기이하며 전투적인 전략을 근거로 하는 영미권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안정적이고 차분한 북유럽의 피를 생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 윱이 주로 활동하는 런던의 상황은 미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사뭇 다른 특성이 있는데 첫째, 1970년대 노동당 장기 집권과 함께 영국의 기업들이 세계 경쟁에서 밀리고 IMF 상황에서 보수당 '대처리즘(Thatcherism)'이 대세를 이루었다. 기업의 국유화와 사회복지를 철폐하며 강한 영국, 경제력 회복, 기업의 복권 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대처리즘은 많은 예술가들의 심리에 저항의 불꽃을 심어주었다. 둘째, 50년대 베이컨과 루시앙 프로이드로 대표되는 보헤미안 페인터 그룹, 60년대 데이비드 호크니와 앨런 존스로 대표되는 영국 팝아트, 70년대 '살아있는 조각(Living Sculpture)'을 표방한 길버트와 조지, 70년 후반과 80년대 초반 리처드 롱으로 대표되는 '예술과 언어(Art & Language)' 등의 개념미술을 끝으로 영국에서 미술운동의 에너지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전설적 영웅이나 극소수의 선택된 엘리트만이 부각되었던 사실, 복지에서 경쟁으로 내몰았던 사회적 정책 등은 1988년 '프리즈 제너레이션(Freeze Generation)'의 태동을 결정지었던 요인들이다. 더군다나 80년대 레이건 정부 경제정책의 성과는 주식시장의 폭발적 상승으로 가시화되었고 이 자본은 재투자되어 미국의 상업적 보수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이후 영국의 '젊은 영국 파워(yBa)'를 키우는 역학적 중추가 되었다.

윱오버툼_Barric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3cm_2011
윱오버툼_Dialogu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3cm_2011
윱오버툼_Prolonged (No refundswithout a valid tick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70×145cm_2011 (courtesy of Artside Gallery, Seoul)

1988년 이후부터 영미의 미술은 미술의 본질주의보다는 충격 요법, 무기력에 저항하는 과잉 이미지, 반항, 타락, 터부로의 침범, 내용 없는 기제만의 발현, 서사의 파편화, 불확정성의 원리(Permanent Uncertainty)에 대한 찬동, 억압된 성의 폭발, 죽음 이미지의 훌리건적인 남용이 일반화되었다. 이는 세계 구조의 총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낙관, 그리고 장기적 역사발전의 순방향에 대한 믿음을 골조로 하는 모더니즘과 정반대에 위치하는 가치관들이다. 사실상 하버마스와 같은 학자들은 여전히 계몽주의적 모더니티는 항구적으로 개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미술계 위주의 문화정책이 개발한 조제법이지 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거니와 대륙 철학자들은 이 용어 자체를 부인하는 편이다. 실제로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의 사상계와 예술계는 태생부터 모호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전략적 훌리거니즘(hooliganism)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한 편이다. 윱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위해서도 위에서 말한 분위기를 상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윱이 견지하는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파우스트 신화를 떠올려보자. ●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Doctor Faustus, 1947)'는 파우스트 시리즈의 3번째 진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파우스트는 작자미상의 '파우스트편(Faustbuch, 1587)'이다. 여기에서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현세의 온갖 쾌락을 얻는 대신 종국에 이르러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번째 파우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Faust, 1832)'로서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서 현세의 온갖 욕망을 발산시키고서도 종국에 구원을 받는다. 이는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괴테는 세속적이면서도 낙관적인 근대정신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실존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신의 섭리, 일방적으로 확정된 윤리 강령의 중대성이 인간 이성과 과학적 합리주의로 대체되어 인간만의 자율적 세계 운영이 가능하리라는 예상에 다름 아니다. 이에 반해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는 2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 발표되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토마스 만은 괴테와 같은 근대정신의 낙관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생생한 결과가 아우슈비츠의 공포라는 사실에 모든 지식인과 예술가, 정치가는 낙담해야만 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 아드리안 레버퀸(Adrian Leverkühn)은 시대의 곤경을 돌파하기 위해서 악마와 계약을 체결했고, 진정한 영감을 얻은 대신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냉혈한이 된다. 레버퀸은 광기의 전체주의의 운명, 강인한 주체성의 관념을 근간으로 하는 독일정신과 모더니티의 비극성을 인격적으로 구현한 상징이다. 이 비극성은 모더니트의 한계와 덧없음, 그 참담함을 드러내는 비판이지만, 동시에 외부 세계의 광기와 내면의 광기를 차분하게 기록하면서 조화와 이성을 끝까지 잃지 않는 모더니스트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이는 모더니티의 몰락과 해체를 도도히 버텨내 가는 모더니스트로서, 맹목적이며 공격적이자 파괴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허구성과 그 궤를 달리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새삼 모더니즘이라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를, 붕괴된 근대적 믿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시험 받고 있다. 아직도 대부분 유럽인들은 모더니즘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모더니즘에 탈(post), 반(anti), 대안(alter)와 같은 접두사들(prefix)을 마구 붙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윱오버툼_Simulator_종이에 지클리프린트_163×143cm_2011
윱오버툼_Rapist_종이에 지클리프린트_147×138cm_2011

윱 오버툼의 회화 정신은 자연의 인과율에 대한 항구적 신뢰, 역사의 장기적 합리성, 즉 거시 역사(macro history)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견지한다. 또한 파편적 네러티브가 언젠가 장기적 시간이 지난 뒤 그 시야가 회복될 때 재건되리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더니티의 보편성이라는 관념이 보여주었던 개별자에 대한 폭력성을 반성한다는 입장에서 마지막 파우스트를 닮아있다. 앞에서 말한 '젊은 영국 파워'는 분명히 모더니티에 등을 돌렸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권태에 모르핀을 투여시킨 병리적 처방이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심미적이면서 동시에 성찰을 거듭하는 윱 오버툼을 가리켜 나는 반성적 모더니스트라고 부르고 싶다. 첫째, 매체의 본질주의를 폐기하지 않는다. 둘째, 모더니즘의 붕괴된 진실을 역사 속에서 확인한 현재인이지만 현재라는 시점의 정황 속에서 모더니티의 지속가능한 명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셋째, 윱은 우리 시대의 전지구적 문제점, 즉 글로벌리즘이라는 무한 경쟁의 물결을 눈앞에 두고 서둘러 피신처를 찾기 위해 스스로 관행적 움직임에 애써 휩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비관론에는 출구가 없으며 출구는 자기 태도로부터 생성된다. 윱 오버툼이 생성시키려는 출구는 아직 끝나지 않은 회화에 대한 탐험에서 비롯된다. 넷째, 니체는 '최후의 인간(last man)'에 대해 예견했다. 그는 인간이 더 이상 커다란 명분이나 삶의 거시적 목표를 갖지 않고 개체의 사소한 이익의 원칙이나 편리한 일상, 육체적 타락에 혹닉(惑溺)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분명히 우리는 130년 전 니체가 예측했던 최후의 인간임에 분명하다. 미술의 본질보다는 제도와의 관계, 상업적 성패의 여부, 네트워크 형성 여부, 언론 노출 빈도수라는 온갖 부수적 요소들에 의해 주요소들이 전복된 주객전도의 말기 증상에 시달린다. 윱 오버툼은 적어도 최후의 인간을 거부한다. 유행과 시류보다는 본질에 접근하려는 우직함은 진정 아름답다.

윱오버툼_Residu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20×110cm_2010

윱 오버툼의 이번 전시 제목은 '스웨트 박스(Sweatbox)'이다. 말 그대로 발한상자를 뜻한다. 발한상자는 관객에게 제공해줄 자신의 회화세계를 뜻한다. 피부로 스며들어 팔목의 동맥을 요동치도록 하며 심장에 이르러 울림을 줄 기분 좋은 충격파, 그것이 윱 오버툼이 생각하는 자신의 회화세계이다. 몇 개의 매혹적 색채만이 화면에 매우 편편하게 입혀져 있다. 버려진 폐기물로 구축된 바리케이드, 가치중립적 깃발과 훼손된 동상, 태양을 재현하는 가스통, 결코 화려하지 않은 샹들리에의 이미지들은 매혹적 색채의 평면적 단순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문명비판적 메시지를 분명히 한다. 글로벌리즘 신화의 허구에 대한 총체적 풍자이지만 동시에 세계에 대한 근원적 애정이 잠재되어 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žk)이 사도 바울의 말을(에베소서 6:12) 패러디했던 문장은 윱 오버툼의 마음을 잘 대변해줄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부패한 실질적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일반에 향한 것이요 그들의 권위에 관한 것이자 글로벌 법칙과 이 법칙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신화에 관한 것이다." ■ 이진명

Vol.20110518h | 윱오버툼展 / Joep Overtoom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