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518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고동현_김종현_김지수_박경범_박하얀_송인헌 신용덕_양태모_이미숙_이향남_장지원_정미정
기획 / 조기주 후원 / 단국대학교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모여서도 혼자 - 옛날 옛날에 ● 임종 직전의 아버지가 사이 안 좋은 두 아들을 놓고, 막대기 하나는 부러지지만 여럿이면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시고, 그러니 사이좋게 뭉쳐 살라 훈시하고 눈을 감으셨단다. 그 후 아들들은 사이좋게 살았다고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 모여 있는 것의 미덕, 교훈은 이것 말고도 무수한 실화까지 포함해서 정말 많다. 그러니 뭉치자?
이번 얘기 ● 단국대학교 박사과정생 12명이 각자 한 점씩 출품, 한 장소에서 전시를 한다. 이번 학기 정식으로 수업을 듣는 박사과정 재학생(+α)들이다. 조기주 선생님의 크리틱 수업, 강영주 선생님의 미술사 수업, 양효실 선생의 미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다. 한 주에 세 번은 얼굴을 맞대는, 그러니까 여섯 번은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를 나누고, 식사를 하거나 서로의 작업에 대해 '공적으로' 의견을 나누거나 이론수업을 듣는다. 그러니까 각자의 작업에 대해 호, 불호를 드러내거나, 참견하거나, 언쟁을 하지 않는 부드러운 관계를 이어가는 중이다. 박사 과정생인 것이다. 얼추 자신의 작업 자체에 대한 개인적 불만, 불안, 고통은 있겠지만, 그것이 (애정 어린) 외압에 의해 바뀔 만큼 여린 초심자들은 아니다. 상식에 비추어 본다면 12명은 서로에 대해 알지만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는 친밀한 타인들이다. 어른인 것이다.
12명의 면면을 한번 들여다보자. 연령, 이십대에서 오십대까지 두루 걸쳐 있다. 기혼과 미혼, 여성과 남성, 학점을 받아야 하는 정식 수강생과 청강생, 한국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외국인과 한국말임에도 이론 수업 - 요즘 이론은 너무 어렵다 - 에서 늘 어려움을 느끼는 한국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서 각자의 위치는 너무 상이해서, 흡사 차이와 이질성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세대, 연령, 성별, 국적의 차이는 구상, 비구상, 평면, 입체 등등의 이들 작업 방식의 차이를 능가한다. 각자가 집중한 풍경들 - 심리적/내적, 물리적/외적 - 의 차이는 또 어떻고!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중심이 부재하는 탈중심성(eccentricity), 이름하야 '포스트' 담론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내용 없는 내부, 정체성 없는 집합, 동일성 없는 우리, 우리 없는 우리, 희박한 우리. 그러므로 이번 전시에서 이 모임의 실체는 개념화할 수 없는 채, 모임에 속한 이들의 느낌, 인상의 모호함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외부에 있는 이들이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이념을 통해 이들 12명의 태도를 포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견고한 내부가 없으므로 밖에서 볼 수 있는 프레임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느슨한 내부는 존재나 본질이 아닌 하나의 과정, 상황으로, 일시적 퍼포먼스로 존재할 것이다. 모여 있으나 외부의 압력에 맞서 쉽게 부러지지 않을 통일된 힘 같은 것은 없으므로, 이번 전시에 참가한 이들에게 이번 전시가 무엇이었는가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12명이 함께 읽고 있는 『실재의 귀환』의 저자 핼 포스터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번 전시가 무엇이었는가는 오직 다음번 전시를 통해서만 알려질 것이다.
옛날 옛날에 ● 아버지의 임종 후 아들들은 함께 뭉쳐 살았고 그래서 행복했단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이야기는 불행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행복해지는 서사로 구성된다. 해피 엔딩은 진짜 이야기를 감추고 환상으로 현실을 덮는다. 정말 아들들은 뭉쳤기에 행복했을까? 안 부러지는 것이 부러지는 것 보다 더 좋을까? 부러진 나무나 안 부러진 나무들이나 모두 불쏘시개가 되었다는 것은 공통의 진실 아닐까? 부러진다, 상처 입는다, 힘들다, 외롭다, 모여 있다, 위로받는다, 힘을 갖고 대적한다, 정체성이 확고하다. 왜 아버지의 명령에 아들은 복종했을까? 예술가인 '아들'이었다면 임종 직전 아버지에게 호명당한 아들, 이란 참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 대들었을까? 나는 우리가 아니고 나입니다, 란 선언은 해피 엔딩 서사에서는 불가능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는 그래서 그들은 '불행'했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아니다.
이번 얘기 ● 작가에게 배움, 특히 뒤늦은 배움은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은 논리와 불화하기 마련이라는 통념도 있다. 예술은 배울 수 있거나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천재 신화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은 철학이 되었다는 언명은 또 다른 예술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존재방식이다. 배우려는 이들에게 불안은 감수해야할 실존, 대가이다. 아는 것은 행복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삶을 포기해야 할지 모르는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12명의 박사과정생, 배움을 통해 작업의 급진적 변화나 작업의 이론적 정당성을 모색하는 학생들의 이번 전시는 12명 각각의 차이, 개성, 질문, 고통을, 어떤 하나의 개념이나 이념으로 묶는 일 없이 보여줄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뭉쳐야 잘 산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아버지는 없다. 뭉친 것도 따로따로 혼자인 것도 아닌 이들의 '잠정적인' 묶음, 과정으로서의 삶의 농담(gradation), 그러므로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단체전의 자유로움을 만끽하시길. ■ 양효실
Vol.20110518e | Push&Pull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