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shade

양순실展 / YANGSOONSIL / 梁順實 / painting   2011_0512 ▶ 2011_0525 / 월요일휴관

양순실_In the sh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324.4cm_2010

초대일시 / 2011_0512_목요일_06:00pm

우진청년작가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7:00pm / 월요일 휴관

우진문화공간 WOOJIN CULTURE FOUNDATION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2동 1062-3번지 Tel. +82.63.272.7223 www.woojin.or.kr

고통의 자가증식(Self-reproducing), 그 숲의 풍경 ●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여자의 피눈물, 늘 참을 수 없는 슬픔들. 마른 가지처럼 뚝뚝 부러지는 울음아! 나는 매일 죽는다. / 자꾸 삐져나오는 핏물, 자꾸 쪼아대는 저 새들, 그러지 마라, 제발. / 정물이 되어버린 것들도 피를 흘리며 일상은 그렇게 수상하게 유지되고 고통은 저 혼자서도 절로 새로워진다. / 이것은 차라리 '진혼곡'이다.

양순실_깊은 하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45.5cm_2009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양순실의 그림은 '숲'으로 가고 있다. ● 처음에 눈에 띄는 풍경은 '안'에 갇힌 정물들이다. 이 그림들은 이전 전시와 맞물려 있는 것들로, 주로 의자나 탁자, 꽃병, 작은 집 같은 이미지다. 그리고 그녀가 자주 그렸던 얼굴 없는 마네킹의 이미지도 오랜만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 정물들은 그동안 보였던 직선과 곡선의 말끔한 조합으로 용의주도하게 배치된 듯한 느낌과 다르다. 특히 숯처럼 타버린 속내를 단정하게 감추기 위해 턱까지 옷깃을 올리고 열심히 피땀을 흘리고 있는 마네킹의 치마나 푹신한 의자의 쿠션이 결국은 쿨렁이는 핏물처럼 그린 의자와 딱벌새의 공격으로 들통나버린 속내는 하나의 변화를 알리는 조짐이다. 급기야는 고통이 스스로 증식하여 꽃병에서 솟구쳐 나올 지경이 되어버린 듯한 마네킹 무더기가 발견된다. 철망으로 된 속치마 속에서 부지런히, 남몰래 키우던 생명력마저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실내, 집 혹은 일상은 균열되고, 가지와 뿌리가 모두 지상으로 노출된 나무 밑동에 왜소하게 올라가 있다. 얼굴 없는 슬픔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에 시달렸던 마네킹에게 차라리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은 다행이었던 것일까?

양순실_In the sh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0
양순실_In the sh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0
양순실_In the sh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0

이어 이들은 '숲'으로 갔다. ● 실내에 둘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침대가 숲에 놓여있다. 침대는 잠과 휴식이며, 죽음은 영원한 잠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침대는 죽음과 자살의 충동을 말해주고 있다. 훨훨 날아오르는 비둘기는 침대를 들어 올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침대는 의외로 무겁다. 순간을 날아 영원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잠시일 뿐. 오히려 양순실의 침대에는 꽃봉우리가 봉긋 올라오고 있다. 낮달이 뜬 오후에 침대 위에 풀이 자라고, 작은 집이 그 속에 숨어 좁은창문 틈새로 숨을 쉬고 있다. 그리고 침대는 새들이 집적대는 소리를 듣는 대신에 나무 둥치에 모서리를 박아두고 나무가 돼버린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듯! ● 하지만 숲에 놓인 소파의 풍경은 다르다. 소파 위에 세워진 마네킹들은 다시 대화를 나눌 입도, 시선을 주고받을 눈도 없다. 담소를 나눌 공간에서 그들은 일방적인 방향으로 '놓여'있고 '서'있다. 예리하게 절단되어 피를 흘리는 소파는 훼손된 관계들이다. 공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마네킹들은 자신의 고통을 피와, 구멍 그리고 메마른 뿌리로 외형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숲에 서있는 사람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양순실의 그림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이다. 그런데 숲에 선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있다. 그들이 질질 끌려 나온 곳엔 핏물이 집으로 향하고 있으나 소파에 닿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은 숲의 나무들이다.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딱벌새의 공격을 받는다. 그들의 뒷통수를 가격하는 비겁한 운명 혹은 어쩔 수 없는 슬픔의 강도는 그들을 '등'으로 울게 하고 꽃처럼 붉은 피눈물을 쏟게 한다.

양순실_In the sh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1
양순실_In the sha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3×45.5cm_2011

결국 이 숲에서 다시 예전처럼 마네킹이 되어 고통을 수습하려 하지만 이번엔 잘 되지 않고 있다. 핏물로 적신 숲에서 비둘기도 허우적거리고 마네킹도 속수무책으로 함몰되고 있다. 존재를 집어삼킬 듯 공격하던 딱벌새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이 숲에서 살아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핏물이 띠를 이뤄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지점에서 두 마네킹은 최초로 두 손을 잡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따뜻함을 뒤에 두고 방금 지옥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온 듯한 새들이 피칠을 하고 허위적 허위적 재빠르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듯이 도망치고 있다. 이들을 따라가면 피난처에서 목을 축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혼자 숨어서 저 편의 구원의 행렬을 쳐다보고 있는 검은 치마의 그녀이다. ● 어떤 사람들은 양순실의 그림을 프리다 칼로(1907-1954)와 닮았다고 '쉽게'들 말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양순실의 그림은 프리다 칼로를 '엽기적'이라고 한 마디로 편리하게 규정짓는 점에서만 닮았다. 나는 차라리 양순실이 프리다 칼로처럼 자신의 정체를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양순실은 그리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불구(不具)며, 태초부터 삭제당한 음성이 웅웅거리고 절망에 지쳐있다. 그녀가 하루 6시간 노동을 견디며 화폭을 채운다고 그녀의 삶은 안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이미지에 몰두할수록 그녀는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때로는 부드러운 곡선과 아늑한 색채로 자신을 '위장'해 보지만 그것으로 그녀가 좀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제 양순실에게는 회화적 이미지에서 풀려나 대화적 상상력이 절실하다. 그래서 자의식으로 세상을 점검하는 습관을 포기하고, 맨 얼굴로 세상과 정면 승부할 수 있는 객기가 필요한 때이다. 양순실의 이미지는 그녀의 그림에서 불안과 우울을 확인하는 순간에 자신에게 그 저주(?)가 전염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늘 고통스러운 자들의 통속적인 비겁함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새로운 이야기로 구성될 것이다. ■ 이정훈

Vol.20110512b | 양순실展 / YANGSOONSIL / 梁順實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