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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51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6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신단수(神檀樹)-홀씨 The Holy Tree - Beginning ● 하늘은 땅이 들어나도록 빛을 던진다. 흑(黑)빛으로 혹은 흰(白)빛으로... ● 나는 신에게 염원한다. 나의염원은 시작과 탄생, 긍정과 희망이다 ● 나는 백색 공간에 신단수를 세운다. 신단수는 정신적 에너지(Spiritual Energy)가 되어 선(線)들은 신수(神樹)가 되고 점(點)들은 홀씨(Beginning) 가 되어 숲을 이루고, 생명이 되어 빛(明)이 된다. ■ 박서령
박서령의 '철학이 있는 맑은 그림' : 신단수(神檀樹) - 홀씨 ● "나는 철학을 그리고 싶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장식도 아니고 치장도 아니다. 나의 내면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이다." ● 박서령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나에게 도발적으로 한 말이다. 내가 도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무거움의 상징인 철학을 담아낸다니 말이다. ● 중국회화사를 큰 틀에서 보자. 송대의 문인화는 성리학(性理學)의 이취(理趣)나 상리(常理)를 담은 철리(哲理)적 문인화풍이, 양명학(陽明學)이 유행하는 명대에 이르면 점차 천취(天趣)나 성령(性靈)를 담아내라는 사의(寫意)적 문인화풍이 더욱 강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인화풍의 그림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철학을 강조하고 심령(心靈)을 담아내고자 하는 작가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교는 뛰어나지만 작품에 철학이 담겨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즉 과거와 같은 전통적인 문인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되나 하는 회의감에서 나온 말이다. ● 전통적으로 중국회화는 그림의 품격에 따라 일품(逸品)․신품(神品)․묘품(妙品)․능품(能品) 등으로 등급을 나누면서 철학을 담은 그림, 자신의 심령을 표현한 그림을 좋은 그림으로 평가하였다. 제한된 색과 형상을 통해 나를 담아내고자 하는 어려운 작업을 시도한 작가는 이번 전시회도 여전히 담(淡)과 빛의 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예술정신을 표현해 내고자 한다. '신단수와 홀씨'라는 무거운 주제를 신독(愼獨)의 자세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경(敬)의 마음, 무자기(無自欺)의 맑은 심성을 유지하면서 가벼운 붓놀림으로 기발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주변에는 흔히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환웅(桓雄)과 관련된 신성한 나무를 비롯하여 삼한시대 각 읍락(邑落)의 소도(蘇塗) 안의 솟대, 경주(慶州)의 계림(鷄林) 등과 같이 크고 작은 신단수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신단수에 대한 이런 통상적인 의미를 이 글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왜 이 시대에 신단수와 홀씨를 거론하는가?' 하는 점이다. ● 자신의 그림을 심상(心象)의 예술로 규정한 작가는 여전히 수도승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몽롱(朦朧)풍의 문인화', '황홀(恍惚)풍의 문인화'를 다시금 선보인다. 이전과 다른 점은 '신단수와 홀씨'라는 구체적인 주제를 택해 작품 제작에 임하는 것이다. 생명력, 풍요, 창조, 관용, 영속성, 강인함 등으로 상징되는 나무의 의미에다 하늘과 대지를 연결해주는 의미를 더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작가가 궁극적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담과 빛의 미학을 통해 그 자신이 하늘의 신성함 및 생명성과 교감(交感)하고 감응(感應)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천인합일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 동양에서 좋은 그림이란 전통적으로 종병(宗炳)이 말한 '작가의 정신으로써 도를 본받는 것(以神法道)'과 '그려진 형상을 통해 도를 아름답게 표현한다(以形媚道)'는 것을 화폭에 표현한 그림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맑은 심성을 통해 도를 체득하고, 아울러 '신단수와 홀씨'라는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도를 아름답게 표현고자 한다. 도의 체득을 통해 자신의 뿌리가 되는 시원으로서의 신성한 공간과 그 공간으로의 복귀를 담이란 화두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 전통적으로 담은 문인화에서 표현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면서 아울러 문인들이 지향한 가장 이상적인 미적 범주였다. 철학과 윤리는 물론 시(詩)․서(書)․화(畵)․금(琴)․인(印) 그 어떤 문인예술 장르에서도 담은 기본적으로 요구되었다. 성리학의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의 금욕주의적 사유는 그것을 단적으로 말한다. 노장은 도의 맛으로서 무미(無味)함, 즉 담을 말하는데, 그것은 무지무욕(無知無欲)의 허정지심(虛靜之心)이다. 이런 맑고 고요한 마음은 도를 체득하게 한다. 동양예술을 인품론이라 규정하는 것도 알고 보면 바로 이 담 때문이다.
작가는 여전히 심상의 공간으로서의 넉넉한 여백과 소(疏)와 밀(密)이 적절하게 조화가 이루어진 형상의 농밀함 속에 담백함을 지향하고자 한다. 작품의 큰 틀에서는 허(虛)와 실(實)의 상생(相生)을 꾀한다. 작가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번 전시회에서도 원대 예찬(倪瓚)이 즐겨 사용한 방식인 화면 가운데 텅 빈 여백이 주는 정적이면서도 담백한 맛을 담고 있는 삼단구도를 즐겨 응용한다. ● 예찬은 중국회화사에서 가장 정적인 맛을 잘 담아낸 화가인데, 일기(逸氣)를 통해 문인화가 지향할 것을 규정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화면을 통해 자신의 은일(隱逸)적 삶이 지향하는 맑은 심성을 담아내는데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였다. 일기를 강조하면서 자신이 그린 마음속의 대나무를 삼이나 갈대로 여긴들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해 신사(神似)를 중히 여기고 형사(形似)를 가볍게 여긴 것으로 말해지는 예찬이 사실은 형과 신을 가장 잘 겸비한 화가로 평가됨을 기억하자. 작가는 이제 형과 신을 함께 갖춘 예찬의 일기를 담아내고자 한다. ● 화면 중간의 드넓은 여백이 자칫하면 무의미한 텅빈 공간이 될 수 있음에도 작가는 소산간원(蕭散簡遠)함과 소조담박(蕭條淡泊)한 맛을 듬뿍 담고 있는 심상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구체적인 형적(形迹)은 삼원법(三遠法),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과 같은 전통적인 기법을 자유자재로 운용하여 자연스럽게 산을 그리고 아울러 시원으로서의 신성한 공간을 창출한다. 간혹 망원(望遠) 기법을 통해 우주에 퍼져가는 신단수의 기운을 표현한 것에서는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 화면 중간을 이처럼 넉넉한 여백으로 처리하면서 화면의 상단부에 속하는 산과 나무를 그릴 때는 밀(密)과 소(疏)의 절묘한 조화를 통하여 하늘과 땅의 교감 및 하늘로 향하는 기(氣)의 움직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려진 형상에서는 농밀함을 응용하되 담묵(淡墨)을 통해 그 농밀함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을 탈색시킨다.
나무와 산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것의 지향점은 현색(玄色)으로 이루어진 혼돈(混沌)의 하늘이다. 하늘과 맞닿은 산이면서 또 하늘가와 그 경계선이 모호하다. 물결치는 듯한 나무들의 형상과 중층적으로 이어진 나무 형상을 통해 하늘과 대지의 간극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부유하는 듯한 수많은 나무를 통해 산과 계곡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궁극에는 신성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 '신단수와 홀씨'를 통해 혼돈의 황홀한 세계로 이끌어 간다. 천지에 가득 찬 인온(絪縕)한 기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기적 관계망을 이룬다. 시원으로서의 신성한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기의 흐름은 표일(飄逸)한 맛을 드러낸다. 기의 확산은 번잡하지도 어지럽지도 않다. 왜냐하면 궁극의 지향점은 현색의 하늘로 또 다시 전체적으로 응집되기 때문이다. ● 전체적으로 허와 실, 소와 밀, 동과 정을 적절하게 묘합시킨 구도와 형적은 감상자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져들게 한다. 몽롱한 가운데 자연스레 감상자의 정신을 우주에 퍼지는 거대한 기의 흐름에 동참하게 한다. 천인합일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램은 작가 자신도 신단수의 홀씨 되어 우주로 퍼져가고 하늘로 상승한다. 홀씨는 다시 대지에 뿌리내려 우주적 질서에 참여하고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간다. 대지에서는 고무(鼓舞)함으로써 진신(盡神)된 뭇 여인들을 통해 도를 체득한 열락과 황홀경을 드러낸다. 작가가 지향하는 마음이다. ● 이처럼 하늘과 대지를 연결해주는 우주목(宇宙木)으로서 신성한 나무와 생명의 응집체인 홀씨에는 담의 미학과 함께 빛의 미학이 담겨 있다. 이런 담은 흔히 형식적 차원의 넉넉한 여백이나 담묵을 통해 담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심상의 예술에서 더 중요한 것은 마음속의 담이다. 작가는 마음속의 담을 우주로 확장시키고자 한다. 더 나아가 신단수와 홀씨를 통하여 현대인이 잠시 잊고 있었던, 아니 이제는 잃어버린 삶의 시원으로서의 신성한 공간에로의 체득과 복귀를 요구한다. 작가가 지향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삶의 시원으로서 신성한 공간, 도를 체득한 황홀한 세계는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작가가 신단수를 통해 그리고자 한 천인합일(天人合一)적 공간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사는 삶의 영역, 마음속에 있다. 도는 인간의 삶과 멀리 있지 않다는 '도불원인(道不遠人)'의 사유를 담고 있는 셈이다.
어느 시대건 전통적 기법이나 소재를 그 시대에 맞게 어떻게 창신적으로 운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특히 동양예서는 법고(法古)로서의 '고(古)'와 창신(創新)으로서의 '금(今)'에 관한 논쟁은 항상 있어왔다. 작가는 '신단수와 홀씨'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빛, 나무, 여백, 기의 응집과 그 확산 등 다양한 요소를 전통적 기법을 응용하여 묘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작가는 문인화의 전통적 기법과 정신세계를 오늘날 자신만의 감수성에 담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전통적으로 그림에서 철학을 강조하다보면 형사(形似)보다는 신사(神似)를 강조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하지만 황홀하면서도 천취와 신운(神韻)이 감도는 듯한 작가의 작품에는 형(形)과 신(神)이 겸비되어 있다. 극공(極工) 이후의 사의(寫意)적 풍모와 불사지사(不似之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제 작가는 생(生)-숙(熟)-생(生)의 삼단계 과정에서 숙의 경지를 넘어 자신의 색깔을 담아내는 '창신적 생'의 첫 단계에 접어들었다. 작가가 '철학을 그리겠다'고 하는 지난한 예술의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이다. 다음 전시회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 조민환
Vol.20110511h | 박서령展 / PARKSEORYONG / 朴曙伶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