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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517_화요일_04:00pm
후원 / 그린앤브라운픽쳐스_솔로몬아티스트레지던시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솔로몬아티스트레지던시 케이크갤러리 Solomon Artist Residency_Cake gallery 서울 중구 황학동 59번지 솔로몬빌딩 6층 Tel. +82.2.2233.7317 cafe.naver.com/solomonresidency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작품은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개시한다. 작품 속에서는 존재자의 "존재로서의" 진리, 즉 개시요 들추어 냄으로서의 진리가 일어난다"고 했다. 작품은 세계를 열고 대지를 불러 세워 존재자의 숨어있지않음이 산출되는 가능성이요 상태라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한 필자의 어눌한 해석을 언급하자면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조형물이나 그 조형물이 묘사하는 바를 통해 작가의 의도라는 사전적 의미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존재자가 상징으로 드러내는 세계와 존재자(관객)가 직접적인 만남의 관계를 가면서 존재의 일렁임이 일어나는 현상이며 작품의 퀄리티를 이야기 하기보다는 존재의 일렁임이 얼마나 풍부게 일어나는 사유의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때 작품 그 자체와 직접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서 참조하는 존재 외적인 사항들, 예를 들어 미술사조나, 창작의도, 시대적 배경, 작가의 삶, 작가의 이전작업, 작품의 제작과정, 작품가격, 보존상태, 평판과 같은 예술경영적 측면은 감상에 앞서 해석의 개념틀을 제공하기 때문에 작품을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에 의해 존재적 진리가 드러나는 상황, 예술경영이라 그가 부르는 오랜 미술사적 전통을 부인하는 이 두 가지의 주장은 이번 『아무것도 없는 전시』가 소개하는 이봄순 작가의 작업과 상호작용하는 감상행위에 몇 가지 화두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같은 저서에서 고호의 '구두'작업과 휠덜린의 '분수'를 예시로 들며 "구두가 보다 더 단순하고 본질적으로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분수 자체가 수식되지 않은 채로 보다 더 순수하게 그들의 본질 가운데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만큼 더 직접적이고 확연하게 구두와 분수와 더불어 모든 존재자가 훨씬 존재적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품이 단순하다 못해 마주할 존재자조차 찾기 어려운 『아무것도 없는 전시』의 경우는 어떠할까? 여기서 존재적 일렁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봄순 작가의 이번 전시, 『아무것도 없는 전시』의 모양새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북적대는 청계천 중고상가. 어색한 색상의 화면을 밝히고 있는 낡은 텔레비전이 칸칸이 줄지어 선 가게들을 지나 만나는 첫 번째 골목어귀의 성인용품가게를 곁눈으로 볼라치면 그제서야 케이크갤러리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평상시도 이러한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이 전시 일주일 전이라 하더라도 그 공간이 '어, 비어있네?' '여기가 전시장이 맞아?'라는 인상을 줄 것임을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무것도 없다면 대부분의 타 예술작업을 대하는 관행과 마찬가지로 조형성이나 이미지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고찰한다는 행위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그러나 작품과의 직접적인 만남, 상호작용하려는 '기투'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의도에서 (그래도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행위이니 한번쯤….) 전시장 안에서 시간을 좀 보내면 이곳 저곳 전시장 벽면 눈곱만한 구멍과 틈새를 메우고 있는 여러 가지 색상의 유토가 눈에 들어온다. 묘사가 아닌, 비재현적인 미니멀(단순)한 이미지도 아닌 유색의 유토만이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못 자국과 같은 공간이 지탱해 온 세월을 아주 작은 흔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비워진 상황으로 인한 불편함을 가져다 준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과 관객 사이의 존재론적인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상호작용에 의해 진리가 드러나는 상황이라 하였는데 이번 전시가 제공하는 바는 친절하지 못한 봄순씨가 장치한 의도적인 혼란의 시간과 공간이다. 사회적인 통념과 전시제도가 도와주는 기준자를 배반하는 공간의 존재와 맞닥뜨리면서 우리는 거기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심하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전시장의 모습은 이봄순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물론 하이데거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부족한 나로서는 나 자신이 인지하였다고 믿어지는 바를 묘사하기 위해 예술경영의 일부분인 이전작업을 예로 들지 않고서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ㅠㅠ. 『Barely Notice』 전시에서 보여진 「She Is Waiting for the Right Moment」연작은 건축물의 층계, 창문과 벽과의 거리, 몰딩과 같은 구성요소와 이들의 사이즈를 재고 여기서 얻어진 치수들을 가지고 종이 조형물을 만든 후 치수를 잰 그 자리에 다시 끼워 맞추어 설치한 작품이다. 건축물이라도 결국 인간의 손으로 짓는 일이고 설계도와의 간극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측정된 치수들이란 예를 들어 한 벽면 위쪽의 길이와 아래 쪽의 길이의 오차를 발견해서 얻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재어진 치수를 종이에 옮겨 사각형의 박스를 만든 후 측정된 장소에 다시 끼워 맞추려 해도 거기서 또다시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차가 미세한 관계로 그의 작업의 크기도 작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관객들은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데 이 연작과 이번 전시에서의 공통점이란 그의 작업을 감상하는 상황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상황은 두드러지게 제시되어있는 오브제의 해석과 인상이 아니라 주어진 시공간을 인식하고 정황을 사유해가는 일이다. 하이데거라면 존재적 진리가 일어남을 경험한다고 하고 싶겠다.
이봄순의 최근 두 개의 작품은 오브제 작업이 아닌 시공간임이 밝혀졌다. 그 작품의 상황을 감상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적어도 필자는) 두 가지의 들추어 내어지는 가능성을 사유한다. 첫째, 전시장에 아무것도 없지만 비워진 것 보다는 미세하기 때문에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인간이 만들어낸 오차가 쌓이고 쌓인 존재의 흔적이다. 둘째, 그 존재란 동시에 다른 존재가 아니라 전시장이라는 인간이 건립한 특정 구조라는데 있다. 이곳이 전시장이라 이름 지어진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미술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시장의 존재를 사유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오차를 만들며 진행되었던 하이데거가 정의하는 예술경영적 담론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사유를 지속해 나감을 해서 존재의 일렁임이 조금 더 풍성해지는 존재론적인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 신현진
Vol.20110508g | 이봄순展 / LEEBOMMSOON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