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학제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506_금요일_06:00pm
갤러리 비케이 개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비케이 Gallery BK 서울 용산구 한남동 657-155번지 1층 Tel. +82.2.790.7079 gallerybk.co.kr
과거와 미래에서 건너온 사이보그 전사들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로댕의 청동시대, 앵그르의 샘과 오달리스크, 피카소가 아들 클로드의 장난감 자동차와 주전자 손잡이 그리고 항아리 등 오브제를 조합해 만든 새끼를 안고 있는 원숭이, 인도 힌두교의 춤추는 시바, 제주도의 돌하르방,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 안드로이드. ● 이것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혹은 이것들이 한자리에 있게 만든 근거는 무엇인가.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이것들을 분류 내지는 항목으로 부를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분류며 항목인가. 미셀 푸코는 상식으로 통하는 분류와 항목이 사실은 임의적이며 이데올로기의 결과라고 했다. 한 틀이 다른 틀을 억압하고 살아남은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논법으로 말하자면 상징투쟁의 소산이며, 앙드레 말로 식으론 상상의 미술관이다. 김학제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미의 규준이며 준칙들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머릿속에서 지금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의 규준이며 준칙들이 어떻게 호출되고 세팅되는가. 이 항목이며 분류 속엔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가 들어있고, 선사시대와 고전주의, 현대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간의 단층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미술사와 종교와 민속이 탑재돼 있다. 얼핏 보면 이것들을 연결하고 연속시켜주는 개연성이 오리무중이지만, 뜯어보면 그 개연성이 보인다. 혼성이고 잡종이며, 하이브리드고 퓨전이며, 크로스오버다. 요샛말로 치자면 통섭이고 깔때기의 논리다. 온갖 이질적인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지점들이 합류되는 장소이며, 상식이 탈맥락되고 재맥락되는 장소이며, 세계가 재편되고 재구조화되는 장소이다. ● 예술가의 머릿속은 세계가 수리되고 정비되는 상상력의 공장이다. 언어는 그 자체 자족적인 구조와 생리를 가지고 있는 닫힌 체계라고 했다. 언어가 닫힌 체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전은 다만 죽은 언어들의 집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 의미가 생성되고 픽스되는 것은 말의 용법과 글의 용법 속에서이다. 그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상황과 전제, 문맥과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그 상황과 전제, 문맥과 맥락의 네트워크인 작가의 머릿속에서이며, 구조적으로 머리에 흡사한 생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이브리드스페이스며 월드와이드웹이며 인터넷이다. ● 인터넷은 흡사 머리의 유비적 표현을 보는 것 같다. 인터넷은 세계를 작가의 의식의 눈앞에 불러모아준다. 정보의 바다는 의식의 바다에 흡사하다. 그것은 바다답게 무한정 열려있다. 무수한 길들이 있지만, 그 길들은 언제든 지워질 수가 있고, 새로이 생성될 수가 있다. 무수한 관계들이 있지만, 그 관계들은 언제든 고쳐 잡을 수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의식 속에서이다. 그리고 의식과 더불어 픽스된 의미 또한 언제든 지워질 수가 있고, 새로이 생성될 수가 있고, 고쳐질 수가 있다. 바다가 그런 것처럼.
김학제는 자신의 의식이 가닿는 이질적인 지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그것들이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일탈시켜 새로운 범주체계로 재편한다. 얼핏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보이는 그 재편은 그러나 사실은 통섭과 깔때기로 나타난 동시대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그리고 의식이 구조화되는 방식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이다. 인터넷 환경 이후에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대 창작주체의 생리는 이미지의 생산보다는 소비에 경도돼 있다. 전에 없던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왕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이 창작에 등치되는 것이다. 서핑과 맵핑 곧 정보의 바다며 이미지의 바다를 헤엄치다가 붙잡힌 이미지를 질료 삼아 자기 식의 인식 지도를 그리는 행위로 나타난 동시대 이미지의 작용방식에 대한 공감이 김학제의 작업의 저변에 면면히 흐른다. ● 그리고 그 흐름의 핵심이 차용이다. 더 이상 오리지널리티는 없다. 다만 시뮬라크라 곧 실제로는 없는데 있는 양 하는 것들, 은연중에 혹은 공공연하게 실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 두르러져 보이거나 미소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그 의미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거나 그 정체를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재현적인 척 하면서 사실은 재현을 배반하는 것들, 차이의 놀이로 정체성의 논리에, 유목의 놀이로 정박의 논리에 반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 놀이의 생리는 기생적이다. 즉 차용이 원본에 기생하는 이유는 다만 원본을 숙주로서 취할 뿐, 궁극적으론 자신의 자족적인 존재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며, 그 자체가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로 등극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김학제는 서양미술사를 차용하고, 종교적 아이콘을 차용하고, 민속적 오브제를 차용하고,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그렇게 차용된 이미지를 토대로 점토소성 과정을 거쳐 정교한 형상으로 빚어낸다. 그리고 그 형상을 이용해 주형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성 질감이 나는 형상을 떠낸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원본은 판이한 사본으로 재생된다. 컴퓨터에서 뜯어낸 부속을 비롯해 그 출처도 아리송한 온갖 기계 부품들을 조합해 몸체를 대신한다. 그 몸체는 비록 한 덩어리로 떠내진 탓에 실제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여차하면 붕하는 기계음을 내며 움직일 것만 같다. 이로써 원본의 캐릭터들 모두가 일종의 사이보그들로 재생된다. ● 사이보그는 미래에서 온 전사들이다. 그래서 마치 미래(아직 오지도 않은 시대, 그래서 없는 시대)에서 온 전사들이 역사시대에 개입하면서 역사시대는 졸지에 낯설어지고, 물적 토대에 바탕을 둔 감각적 현실이 생경해진다. 이를테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유난히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것은 바로 다산과 풍요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생명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비해 작가의 사이보그 비너스는 오히려 모계사회의 권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미술사를 재고하려는 페미니즘의 기획으로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기계 젖에선 젖 대신 윤활유가 흘러내릴 것만 같다). 앵그르의 샘을 패러디한 사이보그 여 전사 역시 유혹하면서 처벌하는 팜므파탈의 원형 내지는 전형 내지는 전범으로 읽을 수가 있고, 그 경우가 다르겠지만 다른 경우들 역시 원본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여지가 많고, 나아가 그 개연성은 아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열려져 있기조차 하다(이로써 일종의 하이퍼텍스트가 실현되고 있는 것). 가상이 현실에 개입하면서 현실이 붕 떠버린다고나 할까. 이처럼 역사시대에 출현한 사이보그 전사들로 인해 불현듯 현실이 낯설어지고, 가상과 현실이 전복되고, 가상이 현실에 비해 오히려 더 감각적인 현실감을 얻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는 신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생인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이보그는 미래에서 온 전사들이 아니라 현생인류들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들이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인체기관이 확장되고 연장된 것으로 본다. 나는 클릭 한번으로 원고를 보낼 수가 있고, 전화 한통으로 세상 끝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소식을 전해들을 수가 있고, 골방에 틀어박힌 채 천리 밖을 볼 수가 있다. 익명 뒤에 숨어 아무런 개념 없이 아무개를 해코지할 수도 있고, 관음을 위해 세상의 모든 여자들과 남자들을 호출할 수도 있다(당연히 당사자는 호출된 줄도 모른 채). 이쯤 되면 현생인류는 이미 이전의 인류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이미 현대(혹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미리 살고 있는 것이므로 그에게 미래는 없다. ● 미래를 테마로 한 소설이나 영화들이 거의 예외 없이 암울한 색채로 그려지는 것은 다만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나 브레이크가 고장 난 문명의 드라이브 때문만은 아니다. 현생인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세상 끝을 다 봐버린 만큼 그의 호기심은 시들해졌고, 미래를 앞당겨 산 만큼 그의 육신은 노후해졌다. 피곤하고 또 피곤하다. 어쩌면 몸과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비극은 예비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의식의 눈으로 세상 끝을 봤고, 그 의식의 귀로 세상 끝을 들었다. 미디어는 아마도 세상을 광속으로 변하게 할 것이고, 미디어에 의해 개발된 인간의 의식은 광속보다 빠르게 세상을 먼저 보고 들을 것이다. 빠른 것은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혹,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가는 것은 다만 세상의 껍데기일 뿐, 정작 그 속은 세상이 핑핑 돌아가는 줄도 모른 채 정박보다 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여하튼 분명한 것은 미래의 비전이 대개는 어둡게 채색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김학제는 자연을 대질시킨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잊고 있었다. 우리보다 더 먼저 살았고, 인류가 한갓 전설이 된 이후에까지 더 오래 살아갈, 그리고 모더니즘 이후로만 쳐도 수백 년에 걸쳐 문명이 파괴한 것을 일순간에 복구할 자연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진즉에 그 끈질긴 생명력에 마땅한 경외감을 거둬들였고, 그 무한한 스케일에 마땅한 두려움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한때 자연에서 신을 발견한 파스칼 같은 사람이 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 무한한 스케일이 곧 신이며 숭고다. 자연 속에 숨은 신이 숭고다. ● 작가는 그 숭고의 흔적을 찾아서 세상 끝으로 간다. 이번에는 다만 의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갔다. 가서, 수천수만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편집을 하는데, 편집을 하는 이유는 풍경이 더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숭고가 더 잘 드러나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조각을 이미지로 중첩시킨다. 처음엔 디오라마 식으로, 이를테면 배경그림 앞에 조각을 포치하는 식을 거쳐, 나중에는 아예 조각을 이미지로 만들어 배경그림에 합성한다. 그래서 그렇게 합성된 사진 속에 무한한 자연과 사이보그로 진화한(?) 인간이 담겨진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성의 옷을 입은 그는 무심한 자연에 난데없이 끼어든 이방인처럼 보이고, 숭고한 자연에 내팽겨진 고철더미처럼 보인다. ●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미래서정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무슨 종말에 대한 알레고리 같다. 적어도 현재 상황으로 유추해보건대 사이보그는 인류가 갈(진화할) 수 있는 끝이다. 인간은 이처럼 그 끝에서 기껏해야 금속덩어리나 고철더미에 지나지가 않는데, 자연은 너무나 아름답고, 숭고하고, 무한하고, 무심하다. 인류 마지막 날(지구가 끝장나는 날 같은 날은 없다. 다만 인류가 끝장나는 날이 있을 뿐), 금세 자기를 복원하고 복구한 자연을 쳐다보는 사이보그 인간이 슬프다. 아름답고 숭고한 자연과 대비되면서 감미롭게 슬프다. ■ 고충환
Vol.20110506c | 김학제展 / KIMHAKJ / 金學濟 / sculpture.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