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展 / SHIMGUESOP / 沈規燮 / digital painting   2011_0504 ▶ 2011_0509

심규섭_돌아가는 길_디지털 회화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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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504_수요일_06:00pm

심규섭 사이버 갤러리 gallery.misulban.com/sgssolo2011/

관람시간 / 10:00am~06:00pm

경인미술관 Kyung-In Museum of Fine Art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2전시실 Tel. +82.2.733.4448~9 www.kyunginart.co.kr

디지털과 그림그리기의 이중변주 ● 작품의 형식은 디지털 회화(Digital Painting)이다. 100% 컴퓨터로 작업했다. 모니터는 캔버스이고, 본체는 물감이며, 입력 장치는 붓과 다르지 않다. 디지털 회화라는 말은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다. 모든 예술은 도구와 재료에 의해 구현된다. 몸짓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 무용이나 마임이 되고,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면 시와 소설이라는 형식의 예술이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수성물감을 사용하면 수채화, 유성물감을 사용하면 유화라는 형식이 나온다.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작업을 하면 '디지털 회화'가 되는 것이다.

심규섭_나비, 날다_디지털 회화_2008

역사적으로 예술도구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과거의 도구를 대체한 경우도 있고, 단지 질적으로만 좋아진 경우도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도구의 출현도 있다. 디지털 미술도구의 경우는 과학기술과 IT산업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디지털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대중들의 정서도 바탕이 되어야 한다.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지고 초고속인터넷과 검색엔진, 포털사이트, 블러그 따위의 발전은 디지털음악, 디지털사진, 디지털영화와 같은 매체의 폭발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이런 다양한 흐름을 타고 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심규섭_새벽을 보다_디지털 회화_2010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지만 내용이나 소재의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도구를 바꾼 것이지 회화적 조형형식을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도구가 가진 특성이 있고 이러한 도구적 특성을 잘 살리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수성물감과 유성물감을 혼용하고, 화지와 물감과 대상을 분리하여 작업하는 것도 가능하다. 완성된 작품에 변형을 가해 여러 개의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며, 종이나 천, 영상과 같은 다양한 출력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은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표현방법을 사용한다고 더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런 실험은 이미 끝낸 지 오래이다. 디지털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세계를 닮아가려고 발버둥치고, 현실은 디지털 세상을 구현하려고 한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회화작업을 디지털 형식으로 구현하는 일은 시대의 흐름과 떨어지지 않는다.

심규섭_깊은 계곡_디지털 회화_2011

디지털 작업은 이중구조를 가지고 동일한 순환 고리를 만든다. 아날로그 현실을 디지털로 전환하여 작가의 생각과 표현을 담았다. 이렇게 완성된 디지털 작품은 다시 출력방식을 통해 아날로그가 된다. 이는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인식하고 디지털과 같은 두뇌의 활동을 거쳐 행동이라는 아날로그 형태로 순환하는 구조와 일치한다. 디지털은 O와 X, 열림과 닫힘, 0과 1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우리가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사실 가짜와 진짜의 교묘한 조합에 다름 아니다.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유발시키고, 반대로 현실체험의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로 확산된다. 이 둘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쩌면 원래 한 몸일지도 모른다. 이는 삶과 죽음, 있는 것과 없는 것, 진짜와 가짜라는 디지털의 원리와 인간의 삶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지점이다. 예술가는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존재한다. 예술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권위나 투자나 명예나 교양 따위 보다는 창조한 세상, 그 자체일 것이다. 창조는 신의 영역이고 자연의 영역이다. 또한 그곳은 생명 본연의 자리이겠지만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예술 창조와 자연 창조는 엄밀히 다른 문제이겠지만 구현하는 과정에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비단 예술창조 뿐만 아니라 문명이나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원리도 결국은 자연창조의 원리를 모방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예술가가 자연창조의 질서와 흐름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규섭_은장도_디지털 회화_2011

작품의 주제는 인간 저변에 깔린 삶과 죽음, 현실과 꿈, 진짜와 가짜, 소비와 생산, 하늘과 땅, 과거와 미래 따위의 혼돈을 자연의 질서와 흐름에 맞게 긍정적으로 통합하고 수용하는 내용이다. 인간의 불행은 크게 두 가지로부터 발생한다. 하나는 원래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을 억지로 분리시켜 대립시킬 때이다. 삶과 죽음은 원래 하나다. 현실과 꿈도 한 몸이다. 남녀도 결국 사람이라는 한 종이다. 삶이 죽음을 밀쳐내고 이기려고 할 때, 현실과 꿈을 대립시킬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 이유는 이러한 대립을 통해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규섭_흔적_디지털 회화_2010

둘째는 자연의 질서와 흐름을 거역하거나 이탈했을 때이다. 태양생태계가 있고, 그 하위 개념으로 지구생태계가 있다. 지구생태계 속에는 동물이나 식물생태계도 있고 흔히 국가, 문명, 사회라고 하는 인간생태계가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하위 생태계는 결코 상위 생태계의 흐름과 질서를 바꾸지 못한다. 지구생태계에 대항하거나 개조하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둔한 것이다. 또한 인간문명의 변화와 존폐도 인간 자체의 의지나 능력보다는 지구생태계의 변화에 의해 결정된다.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가치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결국 자연의 질서와 흐름에 공명하고 부합하는 일이다. 행복과 불행, 선과 악, 삶과 죽음 따위는 애당초 없었거나 필요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 인간이 공동체를 만들고 세상의 여러 부조리와 싸우고 희생하는 일 또한 자연의 질서와 흐름에 맞게 산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 심규섭

Vol.20110502e | 심규섭展 / SHIMGUESOP / 沈規燮 / digital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