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구동회_김도균_김무준_김민애_김인숙_노재운_김수자 박준범_안규철_이불_장성은_정소영_정재호_Sasa[44]
작가와의 만남 1차 / 2011_0514_토요일_02:00pm / 김인숙_Sasa[44] 2차 / 2011_0528_토요일_02:00pm / 안규철_장성은 3차 / 2011_0618_토요일_02:00pm / 노재운_정소영
10-minute talks 인근 직장인을 위한 핵심 전시설명 일시 / 매주 수요일 12:40pm
전시설명 평일 14:00, 16:00 / 토,일,공휴일 11:00, 14:00, 16:00
관람료 일반 3,000원(단체 2,000원) 초중고생 2,000원(단체 1,000원) ※ 20인 이상 단체 관람료 적용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PLATEAU 서울 중구 태평로2가 1550번지 삼성생명빌딩 1층 Tel. 1577.7595 www.plateau.or.kr
1999년 개관 이후 10년 간 서울 도심에서 문화 오아시스의 역할을 했던 로댕갤러리가 'PLATEAU(플라토)'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한다. '플라토'는 과거의 예술적 성과들과 현재와 미래의 예술적 실험들이 한 곳에서 만나 재해석되는 퇴적층(堆積層)으로서의 의미와, 예술가와 애호가 모두가 다가서기를 원하는 예술적 고지(高地)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개관 후 첫 전시로 5월 5일(목)부터 7월 10일(일)까지 개최되는 『Space Study(스페이스 스터디)』展은 김수자, 이불, 안규철 등 우리 나라의 대표적 현대 작가들과 Sasa[44], 노재운, 구동희 등의 중진, 신진 작가들이 다양하게 참여하여 과거 로댕갤러리였던 이 공간의 역사, 장소성, 의미에 대해 다양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관람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전시 공간이 설치, 조각, 사진, 비디오 등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새롭고 낯선 공간으로 재탄생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플라토의 전시공간 자체를 탐색의 대상으로 삼아 재개관의 의미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포괄적인 탐색을 통해 이미지와 스펙터클이 주도하는 현대미술의 빈 공백을 재탐사하고자 한다. 또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는 현실 사회에서의 공간의 재편현상을 반영하여 동시대의 삶의 조건을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플라토(PLATEAU) 의미 ● 1999년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과 「깔레의 시민」을 상설 전시하면서 '로댕갤러리'란 명칭으로 출범한 서울 태평로의 전시공간이 '플라토'란 이름으로 새롭게 재개관한다. '堆積層' 혹은 '高原'을 의미하는 #039;플라토(plateau)'는 지질학에서 차용된 용어이지만, 전시 공간의 새로운 이름이 됨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퇴적층'의 의미란 질 들뢰즈와 가타리의 지적처럼 과거의 결과물이 쌓인 고정된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탐사되어야 할 곳으로,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은 중간지점으로서 늘 스스로 진동하는 장소를 말한다. 즉 이제까지 쌓아 온 거장들의 성과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우리 미술계가 축적해 갈 예술적 성과물이 늘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되고 실험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또한 '高原'을 의미하는 '플라토'는 아티스트들이 한 번쯤 오르고 싶은 高地로서의 전시 장소로, 아티스트들만이 아니라 미술을 사랑하는 관람객 모두가 고양된 예술적 감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되고자 한다. '플라토'는 로댕 작품의 상설전시는 물론, 보다 폭넓게 국내외 현대미술의 현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동시대 국내외 미술의 변화를 바로 이 곳, 플라토'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공간'과 '장소'의 경계에서 ● 낯설고 추상적이며 경계가 불분명한 '공간'은 시간과 더불어 삶의 조건으로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 공간을 길들이고 조직화함으로써 의미있는 '장소'로 만들어 나간다. '로댕갤러리'로 알려졌지만 한 동안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곳, 이제 '플라토'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자리 매김하려는 이곳은 과연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일까, 아니면 낯선 공간일까. 기시감과 생경함이 교차하는 플라토의 개관은 『Space Study』전을 구상하는 사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근대 철학에서 정체를 가져오는 반동적인 것, 신체와 결부된 것으로 인식 되었던 '공간'은 다양한 경험, 사건, 욕망에 의해 분열되고 있다. 실존하는 코드와 영토는 의문시되며 공간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내외부의 전위 현상이 주목되고 있다. 즉 내부에 유사-외부를 포괄하는 것, 친근함의 영역인 '장소'가 언캐니(*uncanny-낯설고도 친숙한)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 아티스트들은 새로운 코드를 창안하여, 폐쇄와 동일화를 방해하고 탈주선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여행자 집단, 즉 노마드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물리적 환경인 전시공간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새롭게 체험하고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그로부터 특이성의 공간을 생산해낸다. 하나의 장소이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며 낯설게 하기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간에 개입해 흔적을 남기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공간을 길들임으로써 전시공간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동시성을 실천한다. 14명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공간과 장소의 경계에 대해 사유한다. 김도균, 장성은, 정재호가 플라토의 공간을 세밀하게 탐색하고 측정함으로써 미지의 전시공간과 마주했을 때 느낄 법한 일종의 '공간공포'를 극복해낸다면, 김수자와 김민애, Sasa[44]는 플라토의 공간이 함의한 역사, 장소성, 기능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확장한다. 안규철과 박준범, 김무준과 정소영은 플라토의 공간을 보편적인 미술관 공간으로 일반화하여 현실공간과 유리된 화이트큐브의 아우라를 해체하고, 김인숙, 구동희, 이불, 노재운은 플라토에서 촉발된 공간과 장소에 대한 관심을 근대역사, 현대사회, 증강현실의 공간 로까지 확장하는 식이다.
1. 관찰, 측정, 구성 : 공간을 길들이는 법 ● 건축물의 외관에서부터 실내까지 도시적 건축공간에 관심을 가져온 김도균은 플라토의 구석구석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탐색했다. 그의 작업방식 중 「F」시리즈가 정면(facade)과 색(farbe)에 중점을 둔 건축의 이미지에 관한 작업이라면 벽(wall), 각(winkel), 흰색(white)을 포괄하는 「W」시리즈는 보다 직접적으로 공간을 언급하는 작업이다. 그의 사진은 전시장 구조의 전반적인 조망이 아니라 선과 면이 맞닿아 만들어 내는 공간의 가장자리를 시각화함으로써 공간의 물리적 특성을 확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프레임에 포착된 공간은 더 이상 삼차원이 아니라 수직과 수평으로 정제된 평면이며 미학적 차원으로 전이된 감상의 대상이 된다. 장성은의 공간 지각방식은 사람의 몸을 이용한 실존적 측정행위에서 비롯된다. 몸과 의식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몸의 행동이 항상 지각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짐짓 유머러스해 보이는 그의 행위는 미지의 영역인 공간을 파악하는데 가장 실제적인 방법이 된다. 프랑스 유학시절, 파리의 비스콘티 골목을 친구들 19명이 포개어 설 수 있는 곳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낯선 지형을 몸으로 탐사하기 시작한 작가는 공간의 고유한 특성을 찾아내고 측정하여 공간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전시장인 플라토에서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 부분은 작품의 크기를 제한하는 출입구였고 그 크기를 다소 과장되고 우스꽝스런 방식으로 측정함으로써 전시공간에 대한 심리적 방어를 표출했다. 공간에 대한 적극적이고 반성적인 인식과 감각적 체험을 통해 공간은 장소로서 구체적인 현실성을 얻는다. 기억 속에 잠재해 있던 공간에 대한 굴절된 이미지들을 재조합하는데 관심을 가져온 정재호는 플라토의 외부 전경과 내부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는 대규모 벽화를 제시한다. '가시성'의 측면에서, 어떤 광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작가는 주목한다. 다소 불규칙한 플라토의 공간을 분절적으로 밖에 기억할 수 없는 것은 디지털적 사유에 의해 파편화된 정보를 습득하는데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꼴라주 기법에 의해 건물의 내부와 외부가 맞닿아 뒤틀린 공간은 닫힌 구조를 개방하여 분열적 다양성을 실현하며 관객은 전시관람 중에 무심코 지나온 공간을 다시 기억하고 스스로 재구성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2. 의미화된 장소의 재구성 ● 우리가 알고 있는 장소는 그 곳만이 가진 특유의 역사로 인해 의미화된 공간이다. 그러나 오래된 코드를 전유하여 새로운 도덕적, 미학적, 정치적 코드를 창안하는데 관심을 두는 작가들에게 과거 로댕갤러리가 가졌던 아우라는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이 된다. 로댕의 「지옥의 문」을 위해 건축된 글래스 파빌리온은 기도하는 두 손을 형상화한 로댕의 「대성당」에서 착안한 것으로, 현대적 건축물로는 흔치 않게 유기적 원형구조가 특징이다. 김수자는 장소의 특수성과 '바늘여인'으로서 자신이 추구했던 이상향을 대면시킴으로써 제 3의 지대를 창안한다. 인간 존재의 종말을 보여 주는 「지옥의 문」은 존재의 제로지대, 즉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괄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연꽃환을 만나 존재의 시원으로 환원된다. 더불어 티베트 승려들의 만다라 독송과 그레고리안 성가, 그리고 이슬람 성가가 한 공간 내에서 중첩되는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물론, 종교라는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해져서 마침내 바늘의 끝과 같이 경계가 사라진 지점을 완성한다. 반면, 철저한 자료수집가이면서 능란한 자료 활용가이기도 한 Sasa[44]는 과거 로댕갤러리의 특정 역사로부터 동시대사의 보편성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특수성을 확보한다. 그에게 주어진 길이 15미터의 벽면은 통상 전시의 도입부로 활용되는 공간인데, 전시의 시작지점은 즉각적으로 로댕갤러리의 원년인 1999년을 소환한다. 작가는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자 세 번째 밀레니엄을 앞둔 세기 말의 해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사고 107건과 4개의 신조어를 선택한다. 암호문처럼 숫자로만 기록된 이 역사는 「지옥의 문」에 호응하듯 주로 죽음에 관한 기록들이다. 또 다른 전략은 그가 선택한 짙은 하늘색의 색면에 있는데, 로댕갤러리 역사상 가장 관객이 많았던 오노 요코의 전시를 기억하며(그녀 역시 살인사건의 간접적 희생자라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애장품인 오노 요코의 앨범 재킷의 컬러를 차용한 것이다. 공적 기억은 무수하게 가지치기를 한 사적 기억들에 의해 증식된다. 김민애는 세상과 대면하면서 종종 겪게 되는 소통의 불능을 예민한 관찰로 가시화해온 작가다.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이면서 드러나지 않는 시스템들의 모순과 부조리는 그의 전작들에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나 내다볼 수 없는 창문, 들어갈 수 없는 문처럼 기능이 탈각된 공간으로 표현됐다. 플라토의 전시공간도 작가의 물음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특이한 조합의 전시공간을 눈여겨보며 의문부호를 덧댄다. 전시공간의 철골구조를 반복하는 수직의 구조물을 세우고 미려한 난간을 만들어 공간의 전시적 기능을 재현하면서도 견고해야할 구조물 바닥에 바퀴를 달아 그 노력의 진지함을 무력화시키는 식이다. 세 개의 전시장 사이에 존재하는 옥외의 잉여공간을 다시 주목함으로써 작가는 개방과 접근금지의 모순이 감춰진 견고한 시스템의 이면을 들춰낸다.
3. 화이트 큐브의 변용 ● 모더니즘의 산물인 화이트 큐브는 흰색의 벽들과 인공광원으로 구성된 가장 정제된 공간의 대명사다. 현대미술의 조형요소가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삶의 맥락을 단절한 채 진공상태와 같은 중립성을 유지하는 전시공간은 포스트모던의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시공간의 대세로 군림한다. 정소영은 2mx2mx2m 크기의 실제 화이트 큐브를 해체하는 급진적인 행위를 통해 규정된 전시공간의 의미를 확장하고자 한다. 파괴된 벽체는 바닥을 따라 펼쳐지면서 자연의 풍경과도 같은 잠재된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파괴의 끝자락이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임을 알린다. 건축가 양성구는 해체된 화이트 큐브를 단서로 우리의 삶 속에 깃든 생성과 소멸의 싸이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건축공간을 제안한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도시가 생산 공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쓰레기 소각장이다. 정소영과 양성구의 작품은 수직과 수평으로 서로 조우하면서 인공과 자연의 공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안규철의 작품세계에서 '방'은 현실 밖의 공간으로,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지만 결코 소시민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인간이 현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등장해 왔다. 이전의 작업을 개념적으로 발전시킨 「식물의 시간」은 현실과는 다른 시간이 지배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미술관이라는 특수 영역에 대한 사유로서 제시되었다. 낙원(식물원)이자 작가의 꿈이 실현되는 공간이지만, 내부로 진입할 수 없이 오직 뒷모습만 보여 주는 공간은 사회와 유리되고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는 화이트 큐브의 현실 속 위상이라 할 수 있다. 레지던시를 전전하는 젊은 작가에게 미술관처럼 크고 넓은 공간이 주어진다면? 전시공간에 한시적으로 천막교회를 만들어 우리 사회의 종교적 강박을 표현하기도 했던 박준범은 플라토를 자신의 불안정한 주거환경 속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정리정돈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질서와 달리 그의 정돈 방식은 마치 컴퓨터의 기억장치처럼 철저한 계획에 의해 체계화된다. 기억과 경험, 소유물들을 모두 나열하여 목록화한 뒤, 저장 구조와 설계도를 만들고, 기억의 선명도나 비밀스러움의 정도에 따라 5개의 세부단계를 만들어 총 26개의 방에 배치한다. 전체 공간 대비 포장상자의 규모는 평균수명 79세를 기준으로 30대 중반의 본인의 나이만큼, 즉 총 공간의 2/5 내지 3/7을 점유하는 수준이다. 이 모든 행위는 작가 특유의 전능한 손에 의해 수행된다. 작품의 보고인 미술관과 작가의 기억 창고는 일시적으로 동일화된다. 미술관의 전시작품보다 그 외관을 감상하는 일에 더 흥미를 가진다는 김무준에게 세계적인 미술관 건물은 신화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자신의 관심과 동경에도 불구하고 여행이라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건축재료에 근접하는 재료로 가장 간단한 형태의 미술관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는 기호를 물질화하여 소유, 소통, 이동의 자유를 획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4. 공간의 사회학적 전망 ● 공간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그 범주를 상대적 공간의 개념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물리적 경계 넘기나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의식은 우리의 일상, 신체 경험은 물론, 공동체의 역사와 미래를 조망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는 안과 밖, 고유한 것과 낯선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문화적으로 뚜렷이 정의된 경계들이 점차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공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더욱 숙고하게 된다. 독일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타인을 알기 위해 인물 사진을 찍어 온 김인숙은 우연한 계기로 건축물 사진을 찍으면서도 유형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삶의 환경으로서의 공간에 주목해 왔다. 특히 근대성의 산물인 유리 건축물의 모순적인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현대인의 복합적인 심리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그는 사무공간의 투명성과 감시의 파놉티콘(*Panopticon-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을 위해 개발된 유리건물이 오늘날 사생활의 의도적 노출과 소통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 간의 경계가 무뎌지고 때로는 전도되는 현대적인 삶 이면에 내재된 소외와 공포의 심리를 드러낸다. 구동희는 신작 비디오에서 도시설계 과정에서 아무런 용도없이 방치된 유휴지에 주목했다. 자신이 산책하는 홍제천변 고가도로 하부에 존재하는 이 공간은 바리케이트 하나로 외부와 겨우 구획을 그은 곳에 지나지 않는데, 출입자가 거의 없는 듯한 그 곳의 정체, 존재 이유, 크기, 거주자, 환경 등을 알아 가는 행위는 암중모색처럼 모호하기만 하다. 어둠 속에서 안무를 연습하듯 콘크리트 기둥과 허리에 묶은 끈을 감고 풀면서 공간을 측정하고 작은 빛에 의존해 그림자와 유희하는 모습은 마치 장소라는 의미의 세계를 조직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뿌리내린 장소감은 영영 획득될 것 같지 않다. 도시의 기능에서 누락된 공간을 통해 사회적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삶을 우회적으로 언급한다. 2005년 이후 「나의 거대서사」라는 프로젝트로 풍경의 조형화를 시도해 오고 있는 이불은 집단적 경험의 총체인 역사를 사유화하는 모순된 방식으로 역사를 조감한다. 이중거울과 형광등을 이용해 라이트박스를 만들고 그 안에 파편화된 근대 도시건축 풍경을 배치하여 끝없는 무한 공간을 창출하는 이 작품은 보편적 자유와 인류 해방을 목표로 한 근대 기획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역설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은 종종 권력의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무한 공간의 이미지가 착시효과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말해주듯 작품의 표면은 관객의 모습을 반사하면서 공간감을 부정하고 명백한 평면으로 제시된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영화에서 정보를 취득하고 그것을 가공하여 작업하는 노재운에게 공간은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차 중심화되고 정치 경제적으로 영토화되는 현실공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특이한 공간증식 방법과 우리의 지각을 확장하는 오늘날의 증강현실의 공간은 그 모태를 영화적 상상력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실제공간과 영화적 공간 사이의 상호침투 현상에 주목하면서 두 공간을 잇는 다양한 통로를 제시한다. 영화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변모한 수많은 스크린의 프레임은 향후 무용지물이 될 테지만, 그것을 사다리로 조형화하여 역사를 현재화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현실로부터 영화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다중의 입구를 제시한다. 또한 SF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외계로 이동하는 장치인 트랜스포터를 설치하거나 '문(Gate)'의 약자를 영화 『스타 트랙』의 전용글씨체로 제안한다. 외계에서 펼쳐질 풍경은 동양화와 서부영화의 풍경을 합친 듯한 반(半)존재의 세계로 제시되고 그 위에 화제(畵題)처럼 글씨가 조각된 수직의 조형물이 오버랩된다. 그 문장은 수많은 SF영화에서 반복 인용되는 클리쉐로서 최초 외계인의 발언으로 알려진 '클라투 바라다 닉토(Klaatu Barada Nikto)'(*51년 영화 『지구 최후의 날』에서 로보트 고트(Gort)의 지구 파괴 프로그램을 멈추는 암호)다. 개연성과는 무관하게 우연에 의해 증식하는 '겹꽃'처럼 그가 제안하는 영화적 상상력의 공간은 분열의 양상을 띠고 자율적으로 만개하면서 현실 공간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 삼성미술관 플라토
Vol.20110502c | Space Study - 삼성미술관 플라토 개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