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되기 Becoming- Monster

여우수작 세 번째 이야기展   2011_0427 ▶ 2011_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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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27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이종림_이인애_맹주희_장경연_정해진_정유정_신근아_한지현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이 시대의 괴물-(초)상,또는 『괴물-되기』 ● 우리가 여기서 고민하는 이미지-괴물은 착한 사람으로도 악한 사람으로도 표상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양쪽이 적당히(균형적으로) 섞인 그런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괴물은 오히려 변종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며, 모종의 형태적 거부감도 내포한다. 괴물은 모든 것을 타당한 형태로 범주화하는 우리의 습관, 상식, 이해관계로는 접근이 되지 않는 머나먼 은하수 너머의 외계인의 초상과도 같은 낯선 모습일 것이다. 혹 괴물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어도 우리가 아직 느끼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그런 지각 불가능한 (사회적, 통념적, 병리적으로) 존재로 허공을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여나 그런 괴물-상들이 우리 곁을 활보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그런 사회에 우리가 속해 있다면-더 할 나위없는 바램으로서-그 사회는 상당히 바람직한 이상향이 아닐까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 그러나 어쩌면, 괴물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에는 우리는 이미, 또는 벌써 너무 멀리 와 버린 지도 모른다. 괴물은 이미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곁에서 머나먼 외계로 떠나버린지도 모른다. 괴물은 물론 선명하게 성별적인 구분이나 피부색과 같은 인종적 특성으로 분류될 성질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이상한 혈색과 종잡을 수 없는 몸집으로 마치 연체동물을 연상시키는 듯 자유자재로 신축이 가능한 그런 몸체를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듯 상상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물론, 머리가 여럿일 수도 있어 마치 메두사 같기도 한 모습을 한 것이 괴물이 아니라고 단정 할 수는 없지만.

이종림_...fly_혼합재료_2011
이인애_습관적인 반복-숲_한지에 혼합재료_40×40cm×12_2011
맹주희_check_혼합재료_31×43cm_2011

우리가 여기서 괴물의 신체와 이미지를 논할 때, 이것을 정신의 그릇으로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괴물의 신체는 신선이 가진 신체와는 다를 것이다. 신선과 천사는 초월의 정신을 담은 신체-신체의 제약을 한 단계 뛰어넘는-로써 이해할 수 있지만 괴물은 육신의 한계, 그것을 벗어나려는 의지, 삶의 역사, 중력에의 저항, 비명, 냄새까지를 지니고 있는, 완성으로서의 의지를 가진 비완성체의 형태를 가진 존재로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괴물은 천사/악마, 콩쥐/팥쥐 등과 같은 선/악의 2원적인 대립각을 세우는 그런 상대 개념으로서의 악마상이나, 윤리적으로 험상궂은 이미지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멜라니에 대응한 스칼렛과 같이, 진취적이지만 이기적이고, 당돌하지만 파렴치한 태도로 그려진 착한 여자에 대립되는 배드걸, 소위 팜므파탈의 인물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장경연_nameless garden_천에 혼합재료_70×64cm_2011
정해진_Leopard flower_비단에 채색_37×45cm_2011
정유정_괴물되기-本性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53cm_2011

일방적으로 피해자/가해자가 분명히 갈라질 수 없게 돌아가는 우리네 삶,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키는 현대 사회, 누군가가 착하고 악한지를 가늠할 고정된 윤리적 시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은 이렇게 단순히 2원적으로 착함과 악함이 갈라지지 않는다. 인종, 젠더, 국가. 종교, 문화, 이데올로기, 정치-경제적 간극 사이의 갈등은 우리에게 편리한대로, 이해 닿는대로 그렇게 어느 한쪽 편을 지지할 수 없는 딜레마를 반복해서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갈등의 세계에 우리는 괴물(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언젠가 괴물-되기가 얼마나 가능한지를 실험하고 노력해보기나 했을까/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가 꿈꾸어야 할 우리의 "괴물"은 우리 각자의 상상력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때의 괴물은 물론 한강에서도 출몰 할 수 있다는 그런 파괴력을 가진 괴생명체도 아니고, 소위 룩키즘이 판치도록 얼짱/몸짱이 동경되는 오늘의 우리 풍토에 대항하는 초월적 외모(?)를 가지고 내면의 상반된 아름다움을 외치고자 하는 대안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괴물을 어떻게 상상하고 실천해야 할까? 괴물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이지만-마치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괴물들이 괴물에서 벗어나 우리가 가진 고정된 습속의 카테고리에 들어와버리듯이, 괴물들을 우리가 가진 목적과 이해 속으로 끌어들이려 해도 문제일 것이란 점이 제일 곤혹스러울 것이다. ● 우리는 사고나 행동이 남과 달라서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달되지 않는 거리를 가진 것을 이질적이란 의미(para-logy)에서 괴물-같다 라든가, 괴물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런 거리에 문제가 있으리라는 의혹 이전에 벌써 괴물은 우리에게 사고의 외곽으로 이상한 존재가 되어 밀려나간다. 누군가에게 사교적으로 정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을 부여할 때, 그것은 주변으로부터 거슬리는 듯한, 그래서 남들의 시선과 저항하는 면이 있어 어딘가 엉뚱하게 두드러진다는 면모를 두고 회자 된다. 외모는 사람들의 눈에 동질성을 지니는 비슷한 모습(homo-logy)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괴물을 배척할 때, "괴물"이라는 비유적 호칭의 사용이야말로 우리의 인식 태도나 상상력의 부정적 면을 보여준다고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이질성만으로 배제-배타의 전제 대상이었다. 오늘날 드디어 우리가 감히 생각해 보기 시작하는, 또한 적극적으로 생각해 봐야만 하는 방식-세상의 기준의 통제에 놀아나는 아키즘적 시스템 밖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잠재력을 보여주는-은 아니었다. 소외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괴물 분류는 배제와 억압의 집단적인 임의의 기준이었다. 그런 소외의 의미가 아니라면 우리의 기성 인식 체계로는 얼핏 이해되기 어려운, 그런 인간의 기준에 위배되는 색다른 모습을 한 생물체를 두고 괴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오기도 했다.

신근아_이상한 풍경_한지에 혼합재료_75×114cm_2011
한지현_LLB514P- PIGGYBOOK_장지에 채색_45×53cm_2011

결국 "괴물"이라는 호칭의 개념에는 이미 그 배후에 무의식적 동질성(정체성)을 나눈다고 생각하는 이웃들과는 이질적인 차별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질성, 소외감, 적대감, 배타성. 경계성, 나아가서 혐오성 등을 동반하는 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런 대접을 받아왔던 "괴물" 이미지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긍정해야 할, 우리가 안심하고 믿었던 우리의 관점의 질서를 넘어서야만 하는, 그래서 진정 우리가 되길 꿈꾸어야 하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의 범주 이외의 것을 타자화하는 인간 개념에 의존한 정치학과 존재론의 기초로서 인간을 거부하는 괴물의 이미지야말로 미래의 희망이라고 주장한다. ● 자아 형성의 심리에 갈등요인들로 사로잡힐 수 없게 열린 주체는 교회에 맹신하는 믿음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이보그 신자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흔히 영성이라고 내뱉는 배짱 좋은 황당한 믿음 같은 것을 장착하지 않는 신인류의 조상으로 출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괴물"의 출현이 현대에 와서야 가능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그럴 것이 중세만 해도 여성이 바람이 나면 그 자체가 괴물이 되는 것이었으니 당시 괴물의 개념이라면 아무 의심의 여지없이 적출-파괴되어야 할 타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괴물이라기보다는 더 좋은 이름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 악마, 저주의 대상으로의 악마. ● 여기서 내가 주제어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괴물" 역시, 일차적 연상에 쉽게 노출되는, 그런 일반적 인간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흉측한 모습으로서의 괴물로 부정-기피되어오는 상투적 생물 이미지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도나 해러웨이가 오늘날의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 연구해온 "사이보그"이미지에 더욱 가깝다.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이거나 사이보그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보그만이 인종, 종교, 계급, 성별 같은 지금까지의 인류의 갈등을 조장하는 고정된 범주의 요소들을 뛰어넘고 있는 신인류일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는 쇠덩어리로 된 무쇠인간 로봇 같은 것이 아니며 자신의 피부색으로 자아 형성 과정에서 번민하지 않아도 되는, 또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이나 젠더 사이에서 갈등할 이유를 갖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인간상이다. 그렇게 해러웨이는 신인류로 등장하여야 하는 금세기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을 사이보그로 명명할 수밖에 없는 점을 뛰어나게 주장했다. 사이보그라는 새인간으로 재탄생 되어야 하는 일처럼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관념으로는 정녕 "괴물"이 아닐 수 없으리라. 해저에 사는 가자미 유전자를 접합한 토마토와 나방의 유전자를 이식 받은 감자 등을 해러웨이는 새로운 사이보그세계의 일부로 보는데, 이는 새로운"괴물"로서, 자연과 인공이라는 고정적 범주에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 홍명섭

Vol.20110429b | 괴물-되기_여우수작 세 번째 이야기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