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예술가를 만나다

근원 김용준_수화 김환기展   2011_0427 ▶ 2011_0626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기획 / 성북구립미술관

관람료 / 성인_2,000원 / 학생_1,000원 / 토요일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관람 종료시간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성북구립미술관 SEONGBUK MUSEUM OF ART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6번지 Tel. +82.2.6925.5011 sma.gongdan.go.kr

두 예술가를 만나다 ● 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살았던 옛 '노시산방(老柿山房)'의 터가 있다. 한 세기를 향해 지나가는 시간은 무심하게도 그곳을 다른 이의 삶의 터전으로 변모시켰고 그 옛 모습은 온전히 감추어졌다. 흔히 시간은 그렇게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고 때로는 사라지게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곳을 바라보며 지켜내지 못함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간다. 이제 곧 영원히 잃어버리는 시한부의 공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련한 자취를 남긴 그곳은 같은 공간을 살았던 두 예술가의 인연에서 잠시 멈추게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전개시킨 두 거장을 함께 기리고자 하는 이번 전시의 초석이 된다.

김용준_매화_종이에 수묵_26.5×18cm_1948

근원 김용준(1904-1967)은 근대에서 현대로 향하는 혼돈의 시대를 겪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을 고취한 예술가이다. 그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들은 한국 미술사상 가장 선구적인 것으로 각인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그러한 행적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김용준은 한국 근대 미술에 있어 몇 안 되는 서양화가였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으며, 중앙고보 학생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을 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어 서양화 1세대라 할 수 있는 고희동, 김관호 등에 이어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과 함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유학 시절 작품 제작과 출품 뿐 아니라 다양한 평론 활동을 지속하였다. 또한 특이할 만한 것은 그가 몇몇 미술 단체를 직접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동문들을 모아 '동미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동경에서 길진섭, 구본웅, 이마동 등과 함께 '백만양화회'를 조직하여 주도해 나아갔다. 이 두 단체의 설립 목적에서는 김용준의 향후 다양한 활동에 대한 중심이 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김용준_은거 隱居_종이에 수묵, 담채_37.8×20.5cm_1944

'역사적으로 보아 조선이 미술의 나라였고, 민족성으로 보아 조선이 미술의 나라인 것이다.(중략) 동경미술학교에서 현대의 예술의 모든 유파를 연구하며, 그리하여 최후에 조선의 예술을 찾으려 함이다'(김용준,「동미전을 개최하면서-上」, 동아일보, 1930.4.12) ● '우리들은 모든 속악을 혐오하여 예술 아닌 일체의 것과 비정신적인 일체의 것에 무관심 한다.(중략) 이에 우리들은 예술과 사회사상과의 엄연한 구별을 규지하는 동시에 미술상으로 나타난 네오레알리즘을 영구히 조상(吊喪)하여 버린다.'(김용준,「백만양화회를 만들고」, 동아일보, 1930.12.23) ● 이를 통하여 김용준이 서양화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 직후 동양화로 전향하여 전통적인 회화 세계를 탐닉하였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인과관계의 배경 속에서 김용준이 서구의 사상과 문학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미술의 세계적인 흐름에 관한 사색의 여과 장치를 거쳤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그가 추구한 문인화는 기존의 도제 관계를 벗어나 본질적인 정신세계의 맥을 향하고 있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이처럼 김용준은 민족 고유의 미를 찾으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그가 추구한 동양화의 세계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김환기_무제_종이에 과슈_27×20cm_1960

김용준은 회화 작업에만 머물지 않고 미술이론가로서 더욱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해 나아갔다. 그는 지식인으로 시대적 지성에 심취했으며, 청년 시절부터 이미 다양한 평론을 통하여 민족 미술 전반에 관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행보는 1949년 「조선미술대요」라는 종착점에 이르러 그 정점을 찍게 된다. 「조선미술대요」는 김용준을 미술사학자의 대열에 오르게 했다. 이 책은 혼돈의 시대에 한국의 미술사를 한글로 집필했다는 상징적인 의미 뿐 아니라, 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와 당대에 이르는 우리의 미술에 대하여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정립하였고 한국 미술의 성격과 미술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는 상당한 가치를 갖는다. 문체 또한 수필체 서술 방식을 확립하였으며 뼈대 있고 격조 높은 문장력을 통하여 일반 대중이 우리의 미술사를 접할 수 있는 감격스러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된다. 이는 국가로서 정착하지 못했던 암울한 시기에 찬란한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는 주축으로서 한줄기 빛이 되었던 것이다.

김환기_불상_佛相_연필 드로잉_27×19.5cm

미술품이란 규모가 크기만 하다고, 또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반드시 아름다울 수는 없다. 크거나 작거나, 교모하거나 서투르거나, 미의 내용은 그것으로 결정되지 못한다. 구수하고, 시원스럽고, 어리석고, 아담한 구석이 있는 것이고서야 우리에게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어느 나라 미술보다도 조선민족의 미술에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김용준,「근원 김용준 전집2-조선미술대요」, 열화당, 2001, p.22) ● 김용준이 이렇게 독창적인 문체의 미술사 서적을 집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수필가로서 품위 있으며 담백한 문장을 익히 잘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48년 그간의 글들을 모아 수필집 「근원수필」을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을 그대로 투영해 내는 솔직한 글로서 그 인격과 지식의 폭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근원수필」은 김용준의 삶과 가치관을 탐색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이고 김용준을 한국의 수필가로서 최상의 위치에 이르게 했다. ● 마지막으로 김용준은 미술 교육자로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설립에 있어 실질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미술대학을 세우고 커리큘럼을 만드는 과정에서 민족미술을 되살리는 교육론 및 방법론을 제시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한국 미술 교육의 기반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 근원 김용준의 민족미술과 전통미술에 대한 순수한 정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일관된 노력과 업적은 그의 월북 이후에도 지속되었음이 분명하며, 명확하지 않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변치 않았으리라 추측하는 바이다.

김용준_장정-「돌다리」표지_이태준 저_박문서관_1943

수화 김환기(1913-1974)는 한국의 예술가 중 가장 예술가다운 모습으로 기억되는 작가이다. ●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중략)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 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김용준, '육장후기', 「근원 김용준 전집1- 새 근원수필」, 열화당, 2000, p.128 ) ● 김환기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한국 추상회화의 선각자로서 그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보이는 일관된 성향은 자연을 한국적인 감성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점이다. 이는 그가 주로 다루었던 항아리, 달, 별, 학, 구름, 밤하늘 등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소재뿐 아니라, 뉴욕 시기에 완성된 우주를 표현한 점화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김환기는 일찍이 동경 유학을 경험하였고, 향후 파리와 뉴욕에 거주하며 상당 시간을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낸 작가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환기는 서양의 미술과 문학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항상 추구했던 것은 한국적인 소재와 정신에 관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서구의 형태와 전통적인 서정성이 결합된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해 나아갔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점은 김환기가 다양한 외적인 요인 속에서도 끊임없이 동양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려고 했으며, 항상 내면적인 감정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작가였다는 점이다.

김용준_장정-「피리」_윤곤강 저_정음사_1948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김환기, '편지와 일기(1973.3.2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문예마당, 1995, p.331) ● 김용준처럼 적극적으로 문필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김환기 역시 한 때 문학도의 꿈을 키웠을 만큼 글쓰기를 즐겼다. 그림에 짧은 글을 함께 적어두는가 하면 일기와 편지를 일상으로 삼았고 적지 않은 수필과 시를 남겼다. 그의 글 역시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소박하고 정직한 그것이다. 김환기가 남긴 글들을 모아 편찬된 에세이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통해서 작가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김환기_장정-인간보 人間譜_1955년 12월 호

모름지기 예술에서 우열의 척도가 될 수 있는 함축이란 무엇인가. 요컨대 우리 문명인을 진심으로 매혹할 수 있는 예술이란 대상의 작품 그 속에서 무엇인가 높은 예지를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센스가 고답적인 종합문화의 실증이 됨으로 해서 우리들은 예술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예술소론' 위의 책, p.81) ● 이제 투명한 예술혼을 담고자 했던 성북동의 순박한 산골 정취로 다시 돌아와 보고자 한다. ● 소통과 공감은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나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최초의 발돋움이다. 서로에게 동질적인 무엇인가를 발견하면서 소통은 이루어지고 그러한 공감을 통하여 갈래의 길들은 잠시나마 교차하게 된다. 이러한 교감의 마디마디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실마리가 된다. 그들이 느꼈던 교감이 바로 한국의 근현대 예술에 대한 하나의 정신적 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에게는 분명 두 사람을 끈끈한 관계로 이끌어준 둘만의 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며, 지금은 비록 추측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두 사람에게 공통되는 부분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은 이번 전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다.

김환기_글, 그림-문학_1950년 5월호 p137

첫째로, 두 사람은 사회와 역사의 동요를 초월하여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찾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외적인 변화에 흔들림 없이 자신 안으로 몰입했으며 항상 가장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김용준이 제자들에게 늘 말하던 고졸(古拙) (김용준,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 열화당, 2007, p.10) 함이 아니었을까. '옛 것을 지키고 옹졸하다는 것', 다시 말해 뿌리를 알며 순수한 정신이 담긴 마음 자체인 것이다. ● 둘째로, 두 사람은 그림과 글을 통하여 자신의 신념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김용준은 청아한 민족적인 미를 담은 작품을 남겼고 이는 깊은 사색과 몰입에서 나오는 짙은 향을 머금고 있다. 김환기 역시 자신을 감추지 않았기에 더더욱 맑게 빛날 수 있는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 수화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물론 그의 그림이나 글은 모조리 항아리 예찬으로 시종(始終)하는 것이지만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수화의 그림이나 글도 필경 싱겁기 짝이 없으려니 했더니 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화(畵)와 문(文)은 요외(料外)로 감각이 예리하고 색채가 풍부하고 범속한데서 한층 뛰어난 짓을 곧잘 한다. (김용준, 「문인호평기-키다리 수화 김환기론」, 주간서울 제57호, 1949.10.17., 10면) ●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자연인이었다. '멋'이란 말은 외국어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한국의 독자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독특한 감각으로 여과되는 미적 관념인 것이다. 멋은 그림과 글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더욱 깊은 멋이란 삶과 사람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김용준과 김환기에 '멋'을 대입시키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용준_글, 그림-주간서울 1949년 10월 17일자_김환기론

김환기는 김용준 보다 아홉 살이 적다. 두 사람은 1930년대 김환기가 일본에서 돌아와 고향과 서울을 오가던 시절 만났으리라 추측한다. 그들은 함께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곳을 떠났다. 김용준은 자신이 살던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물려주었고 이로 인하여 동일한 공간에 대한 기억을 품게 된다. 승가사의 바랜 사진 속에는 김용준과 김환기가 나란히 앉아 있다. 두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들이 항상 함께 다녔음을 상기한다. 김용준은 종종 김환기에 관한 글을 쓰곤 했다. ● 두 예술가를 만나기 위한 여정 속에는 한국의 멋이 깃든 그림과 글이 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삶과 사람이 있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성북동 갈림길. 시간을 거슬러 수십 년을 앞선 이곳은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곳임이 분명하지만, 그 본래의 땅은, 그 기운은 두 사람의 그 시절 삶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옛 것을 소홀히 하고 과하게 혼잡해진 도시의 거대함 속에서 아직도 고즈넉함을 간직하려는 곳이기에, 오래전에도 이곳은 조금 더 자연과 가까운 곳이었고 그리하여 조금은 더 순수한 이들의 마음을 이끌었을지 모른다. ● 이제 그곳은 그처럼 추상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지만, 두 예술가의 끝없는 내면으로의 여행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는 그렇게 영원히 울림으로 남는다. ■ 김보라

Vol.20110428i | 두 예술가를 만나다 - 근원 김용준_수화 김환기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