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사물들 remembering objects

황연주展 / HWANGYUNJU / 黃娟珠 / installation.photography   2011_0422 ▶ 2011_0512 / 월요일 휴관

황연주_채집된 풍경 채집된 슬픔 104(Paris, Montparnasse, 2005)_디지털 프린트_11×14inch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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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22_금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of the Arts Council Korea 서울 종로구 원서동 90번지 Tel. +82.2.760.4722 www.arkoartcenter.or.kr

들판의 저 이름 없는 풀 한포기 조차, 누군가에는 기억이기도 할게다. 기억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사물에 부여하는 어떤 방식, 오래된 습관이나 태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사물들은 그저 존재하고 있겠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어떤 기억 속에서만 더 오롯이 자신의 희미한 존재(의 이유)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황연주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그렇게 사물들의 기억으로 향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관계가 뒤집혀 있는 양상 또한 드러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사물들이 자리하는 것에도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사물들 스스로가 기억하도록 하여 그 기억의 주체가 되는, 그러나 결국은 익명의 누군가들일 수밖에 없는 자들의 어떤 특별한 관계들을 재설정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연주_기억하는 사물들 part 2._장소특정적 설치작업_가변설치_2011

이번 전시는 우리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갖는 특별한 의미들을 주목하면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일상의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로 정감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고,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기억하는 사물들, 혹은 기억의 마디 속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독특한 기억들을 채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사물들의 수집인 동시에 이와 연동된 누군가의 어떤 기억 또한 채집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기억이 담긴 사물들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 혹은 낯선 우리 내 이웃들에게 다음의 조건들로 전시를 위해 임시로 빌려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전시의 구성요소로 삼았는데, 첫째, 현재로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것, 둘째,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현재도 쓰임새를 가지지만 빈도수가 많지 않은 것. 단, 너무 소중해서 빌려줄 수 없는 것들은 제외했다. 어쩌면 그 이유는 크고 거창한 것들, 무겁고 진지한 것들보다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나지막이 전하는 의미에 관심이 많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했기 때문인 듯하다. 작고 힘없는 것들, 그래서 세상의 큰 것들에 비해 소외받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로 작가의 시선은 향한다. 그런 사물들이 가진 기억은 가녀린 것들이기에 더욱더 붙잡기 힘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소소한 사물들에 부여된 누군가의 희미한 기억들 또한 함께 불러 모으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나하나의 사물에 부여된 기억의 음성들, 결국은 익명의 중얼거림이 될 기억들 말이다. 작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러한 사물들 혹은 그 사물들이 가진 기억 자체였는지 아니면 그 사물들에 기억을 부여한 그 익명의 누군가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작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어떤 단단함으로 향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힘없고 상처받은 작고 소소한 것들이 함께 이루며 만들어내는 강도(强度)말이다. 여기서 가시적인 것들은 최소한의 형상으로만 자리할 뿐 작가의 시선에서 잠시 비껴가있는 듯하다. 작가는 이를 '집적의 힘'이라 부르고, 작가 노트에서 이를 '소소한 것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스펙타클한 장관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꿈꾼 답니다.'라고 적어놓았다. 시각예술의 진정성도 어쩌면 그런 것들이 아닐까. 평범한 것들이 갖는 소소한 의미들, 혹은 더 나아가 상처받고 소외되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비껴간 것들에 대한 각별한 시선으로 향하는 그런 태도들 말이다. 화려한 이미지의 만화경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시대에 작고 소소한 것에 주목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최소한 어떤 미덕을 읽어낼 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가시적인 것은 어쩌면 그 다음의 문제이니 말이다.

황연주_기억하는 사물들 part 2._ 장소특정적 설치작업_가변설치_2011_부분

작고 소소한 것들, 그렇게 소외받고 상처받는 것들을 향한 작가의 각별한 시선은 사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작가의 세상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고, 낯설고 힘없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에 대한 어떤 희구이기도 한 것 같다. 이 거친 세상 속에서 세상의 낮은 것들과의 소통을 꿈꾸는 희망인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을 넘어 더욱 적극적인 것으로 향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기억이 담긴 사물들을 타인의 사물들과 함께 어우러지게 하여, 그리고 그런 사물들에 대한 낯선 이들의 생각들을, 음성들을 함께 모아놓음으로써, 우연하고 일시적이지만 어떤 의미 있는 공동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을 확장시킨다. 소외받고 상처받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나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함께 어우러지는 기억의 공동체 말이다.

황연주_기억하는 사물들 part 1._6채녈 스피커 사운드설치_2011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동체와는 다르다. 누군가의 말처럼 어떠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공동체, 예외적으로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타인이 고독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그런 익명들이 엮어내는 수다한 중얼거림의 공동체 말이다. 전시장에 낯설게 섞여 있는 작가와 타인의 사물들, 그리고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음성들은, 각자의 기억과 상처를 희석시키는 사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들로 확장된 것이며, 그렇게 우리 모두의 공감을 만들어내는 사물들로 전환됨으로써,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 엮어내는 단단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작고 힘없지만 수다스러운 많은 익명의 우리들이 엮어내는 공동의 기억들인 것이며, 그 우연한 함께함이 어떤 단단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견고하기 이를 없다는 세상사의 딱딱한 구조들과도 다르다. 어쩌면 이 조차 일시적일 수 있겠지만 이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의미 있는 전언으로 기억되기에, 결코 순간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전시는 앞서 말했듯 기억하는 사물들 자체로 향해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기억들의 이름 없는 주인들이 우연하게 만들어내는 어떤 특정한 관계들, 일시적이고 우연한 공동체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희망에 대한 기대로 향해 있는 듯 하다. 그 기대로 가는 여정에 작가의 타인의 기억을 끌어안아 기쁨은 물론 슬픔조차 함께 하려는 소통의 방식이 가로놓여 있다. 슬픔도 서로 쌓이면 힘이 되는 법이다. 이번 전시에서 지극히 비정치적이면서, 정치적인 세상에 대한 태도를,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소통에 대한 희구를 읽을 수 있었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소소한 개인의, 익명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여 공동의 기억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려 한 그 기저에서 세상에 대한 작가의 어떤 태도 변화를 읽게 한다. 개인의 내밀한 기억의 울림에 대한 경청에서, 더 넓은 세상으로, 더 적극적인 몸짓으로 나아간 것이기에 의미심장한 느낌마저 전해준다. 상처를 이해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작가에게 있어 이번 전시는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짐으로써 자신의 상처 또한 치유 받을 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어떤 깨달음 같은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와 희망이 여린 듯하지만 짙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황연주_채집된 풍경 채집된 슬픔展_인사미술공간_2011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나하나 저마다의 의미 있는 기억일수 있는 사물들의 어울림을 통해 공동의 기억을, 상처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드러내려 한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인사미술공간이 가진 지하, 1층, 2층의 수직적인 공간의 구조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아슬아슬하게 일시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 수직적인 구조만큼 적절한 방식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기억이 가진 계통 발생 혹은 자라남의 구조마저 입히고 있어 흥미롭다. 지하는 이전 작업들이자 현재에 이어지는 사진 작업들로 구성된다. 이들 사진 이미지들은 작가가 '채집된 풍경, 채집된 풍경'이라 불렀던 낯설고 묘한 울림을 전하는 이미지들로 이번 전시의 후경이 되는 설정인 동시에 현재에 이어지는. 작가의 과거 기억의 풍경들이며 이번 전시의 계통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는 바탕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가장 지하에 이들 사진작업을 배치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황연주_채집된 풍경 채집된 슬픔 95(London, 2005)_디지털 프린트_11×14inch_2005
황연주_채집된 풍경 채집된 슬픔 62(용인, 2011)_디지털 프린트_11×14inch_2011

전시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자라나는데, 지하 전시공간에는 작가의 이전의 어떤 기억들이자, 상처도 서로 나눌 수 있음을 알아챘던 작업들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작업인 동시에 이번 전시의 바탕이 되는 작업들이 배치되고, 1층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타인의 기억들을 채집하면서 동시에 진행했던 인터뷰가 익명의 목소리들의 집합들로 전해진다. 그리고 2층 전시공간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자신과 타인의 수집된 사물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로 전시된다. 각각의 기억들이 담긴 사물들을 대롱대롱 매다는 형식으로 가시화시킨 것은 이들 기억들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질서에 놓인 것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은 공간 속에 놓인, 기억임을 드러내기 위한 설정 때문이다. 기억은 때때로 시간의 마디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머뭇거리면서 불안한 듯 아슬아슬하게 잠겨 있어, 그러한 사물들이 엮어내는 익명의 기억의 공동체 또한 우연하고 일시적이기에 결코 안정적인 구조와는 거리가 있어서 인 듯 하다. 이렇게 지하, 1층, 2층 전시실은 수직적인 층위를 이루며, 전시의 내용적인 얼개를 이룬다. 마치 기억이 저 아래의 과거의 이미지들로부터 자라나(지하), 숱한 사람들의 낯선 중얼거림을 현재의 음성들로 전하여(1층), 소소하지만 저마다의 의미를 담은 기억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단단한 울림을 함께 엮어 내리란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2층), 이들 전체 층위가 모여 하나의 전시가 구성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각별하기만 했던, 저 숱한 기억을 가진 어떤 사물들, 익명의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수다스러운 목소리를 현재를 중심으로 전시 공간 전체에 웅성거리게 한 것이다. 마치 작가 자신의 세상에 대한 느낌과 사유를 펼쳐왔던 시간의 흐름을 자라나게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나지막한 시선과 태도로 세상의 힘없고 상처받은 것들이 서로 힘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작지만 단단한 울림으로 공명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 민병직

Vol.20110425f | 황연주展 / HWANGYUNJU / 黃娟珠 / installation.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