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정원도 2(夢幻庭園圖_Visionary Garden)

김양희展 / KIMYANGHEE / 金良姬 / painting   2011_0416 ▶ 2011_0427

김양희_obsession_캔버스에 유채_73×91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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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16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함 space HaaM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37-2번지 렉서스빌딩 3층 Tel. +82.2.3475.9126 www.lexusprime.com

변신(變身)과 변이(變異) ● 알(卵)에게 배꼽이 생긴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기본적인 생물학 지식에 의하면 동물의 탄생방식은 난생(卵生, oviparity)과 태생(胎生, viviparity)으로 구분되고 고등생명체의 탄생형태인 태생의 증표가 배꼽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알(卵)에게 배꼽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이미 그 생명체의 속성이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출생근원을 변경하면서까지 자기 실체를 부정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김양희_obsession_캔버스에 유채_60×73cm_2011

변신은 비실재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이지만 인간이 의식적으로 절대자의 능력을 모방한 체험을 함으로써 절대자의 경지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인간 염원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속의 올림푸스 신들이 유희놀이의 수단으로 사용한 변신행위와 고대설화 속 도사들의 능수능란한 둔갑술(遁甲術)이 인간욕망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피조물(被造物)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꿈꾸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신화나 설화 속에서 "변신"이 라는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김양희_obsession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11

개별 피조물에게는 대자연의 절대적인 권위와 냉혹한 폭력은 오직 그에 대한 복종과 수용만이 개채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섭리(攝理)만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환경에 대한 적대적인 저항은 종(種)의 단절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단한 권위와 폭력에 대한 피조물의 대응은 보다 기민(機敏)하다. 자연의 위압에 대한 순응적 태도의 결정체가 바로 변신(變身)이라 할 수 있다. 알에서 배꼽이 생기고 그 배꼽에서 새순이 돋아 식물이 생장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생명체의 자발적인 변신과정 즉, 적극적 자연순응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등생명체를 지향하는 알(卵)에게는 배꼽이 생겼고, 고착성(固着性)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식물체는 궁극의 염원으로 탄생처가 고정된 대지가 아닌 대지로부터 자유로운 동물체로 변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양희_obsession1_캔버스에 유채_117×80cm_2011
김양희_obsession2_캔버스에 유채_117×80cm_2011

절대자에 대한 적극적 순응과정이 변신(變身)이라면 소극적 순응수단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다. 창조주가 부여한 피조물 고유의 물성을 변화시켜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변신은 형태가 변화하지만 물성변이(物性變異)는 형태가 소멸되거나 새로 생성됨을 반복하면서 피조물 자체는 물론 피조물을 창조한 대자연도 그 존재와 실체를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地境)에 이르는 것이다.

김양희_obsession4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7cm_2010

다른 일면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은 다른 세계를 꿈꾸느라 바로 여기가 그가 추구하는 다른 세계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절대적 모순 속에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늘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스스로를 망각시키는 몽환(夢幻)속에 매몰되고자 하는 원초적 집착을 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이 비가 되기도 하고 안개가 되기도 하며 또 정원에 뿌려진 달빛들이 만발한 꽃들로 바뀌기도 하는 화려한 변신(變身)과 변이(變異)의 환상(幻想)이 낯설지 않다. 대지가 곧 하늘이요 밤하늘이 곧 꽃밭이 되기도 하는 꿈과 같은 환영(幻影)이 어쩌면 나약한 피조물들에게는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 피조물에게 주어진 태생적 한계를 초월하여 더 진화한 형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피조물의 생존본능을 표현하는데 이러한 "하이브리드(hybrid)적 생명현상"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을 듯 싶다. 인간성(人間性) 상실(喪失)과 소외(疏外)로 표현되는 현대사회의 가혹한 생존환경을 감안한다면 "하이브리드"는 더이상 타부시 되는 이방인(異邦人)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개척해 나가는 진보정신의 표상(表象)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생명체라면 늘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듯 인간은 상실한 인간본성을 그리며 그곳으로 회귀하고자, 어느 날 문득 합리적 사고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 다시 한 번 경이로운 변신(變身)과 변이(變異)로의 일탈을 꿈꾸곤 한다.

김양희_obs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태생적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현대 인류들은 오늘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이미 변신과 변이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번뇌를 넘고자 신(神)의 영역을 시샘하면서…. 피안(彼岸)은 현실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 무모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人間)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면서도 사고(思考)하는 절대적 모순체임이 분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 김양희

Vol.20110421h | 김양희展 / KIMYANGHEE / 金良姬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