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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2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카이스 갤러리 CAIS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번지 Tel. +82.2.511.0668 www.caisgallery.com
민병헌의 작품에 대하여_풍경과 누드 : 시선의 방법론 ● 민병헌의 최근 풍경사진들은 흐릿한 겨울의 바닷가, 끝없이 눈발이 흩날리는 깊은 계곡의 산자락과 같은 아스라한 공간들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을 기억할 때마다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짙은 회색의 공기는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대기를 부드럽고 희미한 톤으로 뒤덮고 있다. 그의 사진들에서 풍경들은 희박하다. 그리고 이 희박함은 세 가지 방향에서 민병헌의 사진을 교직(交織)한다. 첫 번째는 대기를 채우고 있는 습한 빛에 의한 희박함이고, 두 번째는 시야(視野)가 남기는 여백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시선과 대상 사이의 거리에 의해서 생겨난다. 대상은 시선에서 최대한 먼 곳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특이성을 요구한다. 이 세 가지의 희박함- 빛, 여백, 거리-의 중첩은 민병헌의 사진을 구조적으로 완결하는 요소다. 다시 말해, 그의 사진은 희박함으로 구축되어 있다. 왜 그럴까? 어째서 사진은 희박해야 하는가? ● 희박함은 호흡을 가쁘게 한다. 이 중첩된 희박함은 주변의 공기를 물들인다. 민병헌의 사진이 전하는 역설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먼 곳을 바라볼수록 시선의 현전을 강렬하게 감지한다.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은 숨을 멈추게 한다. 시선이 흔들리거나 대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숨을 참으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혹은 바라보아야 할 뚜렷한 대상이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풍경의 일부, 다른 풍경의 부분들과 동일한 평범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전체를 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치 프랙탈 효과처럼, 부분은 전체의 반복이다. 사진가는 공간 전체를 개관(槪觀)하는 대신, 집요하게 부분을 응시한다. 텅 빈 희박한 공간의 미세한 점을 뚫어지도록 보는 것이다. 역으로, 먼 곳에 있는 대상은 강렬한 시선을 요구한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더 집요하고 명료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어디에 있는지 잃어버리거나 식별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흔들림 없이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먼 곳의 풍경이다. '멀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시선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해 시선이 소멸하는 (눈이 머는) 것이다. 먼 곳의 풍경은 손에 잡힐 듯 하지만 매번 그 곳에 없는,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을 속성으로 한다. 먼 곳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 곳에 갈 수 없거나, 가서는 안 되는 곳이거나, 혹은 먼 곳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혹은 세 가지 모두가 이유일 수도 있다. 어떤 장소를 먼 곳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넓은 시계 안에서 그 장소를 찾아야 하고, 이어서 그 곳을 집중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그 곳은 넓은 연속성의 일부이지만 나의 시선에 의해 다른 모든 장소들로부터 구별된다. 시선은 거대한 공간의 일부를 커다란 거리를 가로질러 다른 부분으로부터 떼어낸다. 시선이 세계를 분절하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분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Sea」 연작은 바닷가에서 바라 본 수평선 아래의 거친 바다의 표면과 파도가 부딪히는 연안의 바위들, 모래사장과 그 위로 날아가는 물새들의 흐릿한 그림자들을 포착하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겨울풍경 안에 서있는 작가와 그의 고막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뷰파인더 안에는 망원렌즈가 포착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바다의 비밀스런 표면이 확대되어 나타나있다. 덧없을 만큼 먼 곳의 덧없는 작은 풍경의 덧없이 짧은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는 아무도 없는 겨울 풍경 속에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본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공감각적 장면을 공감(共感)한다. 민병헌의 사진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 산, 나무들, 새들은 구체적 맥락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들은 아무리 봐도 작가의 시선 속에서 특이성을 과시하는 피사체들이 아니다.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구체적 풍경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멂'이다. 사진을 보는 관객의 위치로부터 사진이 보여주는 피사체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는 아득한 공간이 위치하고 있다. 사진은 피사체를 가리키는 대신 이 빈 공간을 가리킨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대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기와 시간의 흔적, 입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 시선을 기록한다. 빛이 드러내는 것 역시 이 비어있는 거리다. 사진은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한다. 그것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진가의 의도가 빈 공간을 향할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계'로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사진의 '기계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세 개의 막(膜) : 1) 격막(diaphragm), 2) 망막(retina) 혹은 감광면(photosensitive plane) 그리고 3) 투명한 원근법적 피라미드의 밑면이 있다. 격막은 카메라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각형의 암막으로, 초-고속으로 열렸다 닫힘으로써 시간을 선택하고 분절한다. 망막은 이미지가 성립되는 장소이며, 반사거울(reflector)에 의해 사진의 감광면과 일치한다. 사진이 눈이 본 것을 기록한다는 표현 속에는 망막과 감광면 사이의 미세한 시차, 간격이 무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이 사진가가 본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가가 이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투명한 원근법적 사각뿔의 밑면이란, 카메라가 구조적으로 내포하는 일안적(monocular) 투시에 의한 가상의 투명한 막, 피사체 앞의 절단면(virtual cut)을 가리킨다. 이 투명한 막은 사진기를 통해 망막 혹은 감광면에 기록되는 이미지와 일치한다. 사진은 이 가상의 막(virtual layer)을 기록한다. 이 세 개의 막은 각각 상이하지만, 카메라에 의해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자연에 내재하는 무한한 지속, 비-가시성, 공간의 연속성(continuum)으로부터 시간의 분절, 가시화 그리고 불-연속성을 추출해내는 프로메테우스적 장치로서의 사진이 지니는 경이는 이 '막'들의 중첩에서 비롯된다. 망원경이 두 개의 렌즈를 중첩함으로써 거리를 소멸시키는 것처럼, 사진은 세 개의 막을 중첩시킴으로써 세계와 시선을 일치시킨다. 사진의 기계성은 이 일치의 과정이다. ● 「Snowland」 연작은 앞서의 「Sea」 연작에서처럼, 뚜렷한 피사체를 찍은 것이 아니다. 절벽이나 숲, 눈 덮인 들판, 나무 한 그루, 전봇대가 서있는 도로 따위는 서로 필연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눈이 흩날리고 있거나 쌓여 있다는 것이다. 눈은 흰색과 밝은 회색의 톤을 사진의 전면에 부여하여 전체를 흐릿하게 만들 뿐이다. 눈은 빛을 대체한다. 눈에 덮인 세계는 사진을 최소화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나무와 산비탈의 흙은 마치 가볍게 긁힌 자국들처럼 희미하게 화면을 덮고 있다. 눈이 내린 세계는 어디를 보아도 균일한 거리의 음영(陰影)들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카메라는 어디를 바라보건 상관없다. 그것은 다만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다. 사진의 기계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선 속에는 어떤 다른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시선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혹은 무엇이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지, 등의 질문들과 연관된다. 시선의 욕망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대신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릴 수 있을까?
「포트레이트」 연작은 여성을, 그것도 옷을 반 쯤 걸쳤거나 벗은 여성의 누드를 찍은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진들은 다른 민병헌의 사진들과 달리 구체적인 욕망의 대상을 적시하고 있다. 피사체인 여성의 몸은 마치 목탄으로 그린 것처럼 상대적으로 뚜렷한 부분들과 흐릿하게 번진 듯한 모호한 그림자들로 묘사된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포즈'에 있다고 보았다. ("나는 과거에 찍은 현전하는 사진의 부동성(immobility)을 다시 바라본다. 포즈는 바로 이 정지상태에 의해 구성된다."(Roland Barthes, "Chambre claire", ed. du Seuil, p. 123)) 무엇보다도 사진은 '인물의 예술(art de la Personne)'로 시작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인물사진은 두 가지 상반된 대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던(ça-a-été)' 대상으로서의 피사체, 즉 사진이 가리키는 의식의 대상인 '노에마(noème)'로서의 인물을 적시하지만, 동시에 현재 '살아있는(vivante)' 것으로 되살려진 대상을 눈 앞에 제시한다. 그것은 죽은 것의 살아있는 이미지이다. 사진이 영화와 다른 점은 정지를 통해 이 역설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포즈'는 이 이미지 이후에 다른 어떤 다른 이미지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 '존재했던'과 '살아있는' 것 사이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몇 초 사이이건 아니면 한 세기를 넘게 지난 것이건 사진은 대상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동시에 그것을 생생하게 지금-여기에 되살린다. 시선이 사진 앞에서 존재감을 잃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이 끔찍한 이중성(시체-생생함) 때문이다. 민병헌의 사진 속에서 '포즈'는 또 다른 거리 (반투명한 스크린)에 의해 멀어진다. 사진의 이중성이 만들어내는 신체의 생경함은 '멂'에 의해 시선의 소멸로 이어진다. 대상에 대한 시선의 욕망이 사진의 이중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시선의 소멸 혹은 희박함은 사진의 이중성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생생한' 대상이 아니다. 대상은 사라지거나 멀어지고 있다.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이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흐릿해지고 있다. 남은 것은 사진의 표면과 그 표면에 기록된 시선의 흔적이다. ● 「포트레이트」 연작은 다른 풍경사진들처럼 텅 빈 공간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피사체인 여성들의 모습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에로틱하다. 아무리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흐릿하게 기록된다 해도, 이 인물들이 남기는 최소한의 윤곽은 그 자체만으로 시선의 욕망을 강렬하게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풍경사진과 인물사진의 차이이다. 그러나 주체는 욕망이 아니라 시선이다. 풍경과 누드. 이 두 가지 범주 사이를 오가면서 민병헌이 드러내는 시선의 모습이 곧 이 전시의 테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주체로서의 시선이야말로 사진이 생산하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 유진상
Vol.20110420h | 민병헌展 / MINBYUNGHUN / 閔丙憲 / photography